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77)화 (77/115)

77화

“그, 저희 어디까지 들어와 버린 걸까요?”

“슬슬 돌아가야 될 것 같다능.”

“그러게요. 아, 저기 누가 오나 봐요!”

“오! 저자에게 물어보자능!”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본 라라와 라히가 다행이라며 웃은 순간이었다. 잘 걸어오던 인영이 순간 크게 절뚝거리더니 곧 벽을 짚고 허물어졌다.

“…아.”

“…아.”

두 사람은 어색하게 미소를 무너뜨리고서 쓰러진 사람을 향해 서둘러 뛰어갔다.

“저기, 정신이 드세요?”

라히가 앞으로 무너진 남자의 몸을 바로 눕히고 라라가 상태를 살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이곳 성기사인지 백색의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크윽, …도, 도망가야.”

“습격……?”

심각한 상황을 감지한 라히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카를라히가 기사를 부축하고서 라라와 함께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력이…….”

그때, 무겁게 닫혀있던 성기사의 입이 열렸다.

“력이, 항…마력이… 부족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뱉은 성기사는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늘어진 사내의 반대 팔을 라라가 어깨에 두르고 움직이려던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온다 했더니 말이야, 크큭큭. …인간들이 여기 있었군?”

뒤에서 들려온 기분 나쁜 목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손아귀가 라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라라의 몸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끌려갔다.

“라라!!”

끌려가는 라라를 붙잡기 위해 카를라히는 허공에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대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라라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길고 사나운 손톱을 세운 자는 거대한 검은 날개를 달고 있었다. 고퀄 코스어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몸 주위를 넘실거리는 검은 마력은 그자가 마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달콤하고 신선한 인간 여자의 피를 볼 수 있겠군……. 크크클.”

“꺄악! 이거 놔……! 오글거려!”

“그녀를 놔주라능!”

“두려움에 발버둥 쳐라, 우매한 인간들이여. 한낱 인간 주제에 이 마족 크리시앙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보, 컥!”

별안간 팔꿈치가 마족의 복부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놓으라고욧! 이거 놔!!”

“…이미 놓은 것 같은데.”

카를라히의 말에 계속해서 사정없이 배를 가격하던 라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한낱 인간 여자의 호신술 공격에서 벗어난 마족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마족의 얼굴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 난 아무것도 못 봤다능……. 그리고 너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능…….”

“…맞아요,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카를라히와 라라는 서로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눈에는 서로가 다였다. 서로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단 주변에 또 다른 마족이 있을 수 있으니 한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능.”

그의 진지한 말에 라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라라는 자신의 앞을 걸으며 주위를 살피는 라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 새삼 달라 보였다.

“라라.”

그 순간 그가 뒤돌아보았다. 어디서 받았는지는 몰라도 주차권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에 라라는 잠시나마 마음이 술렁였다. 매끈하게 잘 뻗은 턱과 입술이 순간 페아와 닮아 보였다.

“…길이라능.”

“네?”

“막다른 길이라능.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능.”

뒤늦게 라히의 말을 이해한 라라는 그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벽이 보였다. 벽 중앙에는 검은색 포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저게 뭐예요? 저기서 뭐가 나오는데요?”

“…엌씨, 저게 뭐냐능!”

카를라히는 뒤를 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벽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더니 웬 사내가 튀어나왔다.

검은 프릴이 달린 재킷 안에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V자 검정 티를 입고 있었다. 이 시대의 패션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심오했다.

“마족……?”

“크크큭, 이것 참 운이 좋군. 궁지에 몰린 먹잇감과 맞닥뜨렸으니 말이야. 어디 한번 맛을 볼까나? 크큭.”

라라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저렇게 오글거리게 할 수 있는지, 부족한 항마력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때였다. 자신의 손목을 감싸는 따스한 손의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주차권을 입에 문 라히가 진지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뛰아응!”(뛰자능!)

“큭, 감히 어딜! 놓치지 않겠다, 우매한 인간들이여! 크하하하!”

라히의 손에 이끌려 라라가 달리자 이에 맞춰 마족이 경쾌하게 검지와 엄지를 맞부딪쳤다. 그러자 검은 포털 속에서 고스룩의 마족들이 튀어나왔다.

“크큿, 흑의 계약으로 얽매인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저기 도망치는 먹잇감들을 뒤쫓아라. 한 마리라도 놓치지 말고…….”

라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냥 듣기 싫어서였다.

그동안 카를라히는 홀로 복잡한 생각을 이어갔다. 마족 하나면 몰라도 마족들이 단체로 신전을 습격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위험했다. 마치 혼자 조용히 놀러 온 여행지에서 단체 관광객들을 맞닥뜨린 처참한 기분이었다.

‘…제길.’

카를라히는 마족이 하나가 아니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검도 없는 마당에 이대로 가다간 라라와 자신, 둘 다 위험에 처할 것이다.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멀지 않은 복도 코너 너머로 비스듬히 모습을 드러낸 마족을 발견한 카를라히가 달리는 것을 멈추고 라라를 벽 쪽으로 이끌었다.

“…이, 이제 어쩌죠.”

“라라, 내가 남아 미끼가 되겠다능.”

“그런…, 싫어요. 같이 도망치는 방법을 찾아봐요.”

라라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카를라히는 강경하게 라라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우리가 들어왔던 문은 저기 하나뿐이라능. 달리 도망칠 곳도 없다능. 저곳을 통과하면 바로 바깥으로 이어질 테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거라능.”

“하지만 그렇다고 라히를 버리고 갈 순 없어요.”

“버리고 간다니, 그런 생각 말라능.”

카를라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내가 원해서 남는 거라능.”

“라히…….”

“그럼 밖에서 보자능.”

좋은 사람이란 건 평소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라라가 슬며시 눈시울을 붉히며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심상치 않은 파괴음이 정확히 복도 코너 너머에서 들려왔다. 우왕좌왕하는 마족들 사이로 가녀린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대들이 그토록 찾는 성녀는 바로 여기 있답니다.”

부서진 잔해 사이로 은발 머리칼이 초연하게 나부꼈다.

“순순히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는다면 나 또한 신에게서 부여받은 이 신성한 힘으로 그대들에게 대항하겠습니다.”

“큭, 큭큭……. 인간들은 모두 이런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아주 재미있군, 재미있어. 크하하학!”

근처에 널브러진 다른 마족들은 눈에 안 들어오는지 한 마족이 의기양양하게 나섰다. 남들보다 두 배는 더 화려한 고스룩 의상을 보건대 아마 신분이 높은 마족 같았다.

마족은 엘리나5의 앞에 다가서기 무섭게 그녀의 은빛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러곤 바짝 얼굴을 갖다 대었다.

“아무리 성녀라 해도 어차피 인간 계집, 크큭, 순순히 따라오면 해치진…….”

그 순간 눈부신 새하얀 빛이 엘리나5의 눈에서 튀어나왔다. 빛은 정확히 마족의 이마 정중앙을 뚫고 지나갔다. 엘리나5의 안면에 초록색 피가 흥건히 튀었다. 암만 봐도 청소년 관람 불가였다.

“더 이상의 소란은… 성녀인 이 내가 용납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우아악!! 크큭.”

“오, 주여! 크큭.”

“앞으론 착하게 살겠습니다……. 크크큭. 이런 데서 죽고 싶지 않아!!”

마족들은 살기 위해 저마다 앞다투어 포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건물 잔해로 인해 폭이 좁아진 복도에서 열댓 명이 한 번에 달리려고 하니 곧바로 사고가 일어났다.

“마족 여러분! 크큭, 모두 이쪽으로 대피하세요! 침착하게 행동하십시오!! 크크큭.”

마족 하나가 포털 앞에 서서 외친 순간이었다. 하얀 빛줄기가 쏘아지더니 마족이 서있던 자리가 마치 초록색 물감을 넣은 풍선이 터진 것처럼 변해버렸다.

다시 한번 마족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먼저 포털로 들어가겠다며 서로를 밀치더니 기어이 단체로 바닥에 넘어져 뒹굴었다.

“젠장……! 처음부터 성녀를 납치하러 오는 게 아니었어……. 큭큭, 나도 참… 철없이 군의 명예에 집착했다. 이제 와 소중한 것을 깨닫다니……. 아버지… 어머니… 내 사랑 카타리나……. 크크큭.”

사방에서 쏘아지는 새하얀 신성력에 크게 다리를 다친 마족이 벽 아래서 울부짖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마족의 짙은 언더라인 밑에 드리워져 있었다.

밟고 밟히며 뒹구는 마족들 너머에서 라라와 카를라히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가 뒤늦게 포털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 빈 상태임을 깨닫기 무섭게 라라의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분명 마계로 향하는 입구겠지만, 왠지 저기가 단 하나뿐인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라라 자신만이 느낀 게 아니었다. 라라는 옆에서 자신을 추월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라히……?’

라라는 어이 상실한 눈으로 라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빨리 질주하는 모습은 생전 처음 봤다.

“어디 가세요, 라히……? 그쪽은 마계라고요, 호호.”

“하하, 너야말로 어디로 뛰냐능……? 내가 마족들의 포로가 될 테니까 어서 이 틈에…….”

“아, 아뇨. 다시 생각해 보니까 라히만 두고 갈 수가 없어서요. 제가 포로가 될 테니까…….”

“아니아니, 어떻게 나 혼자 살겠다고 널 포로로 보내고 저기로 가겠냐능.”

“포로가 더 생존율이 높아 보이는데요……. 그럼 같이 포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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