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순간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묵직한 중저음이 흘러나온 것은 이 뒤였다.
“감히 나의 연인 릴리카를 다치게 해……?”
날렵한 턱선과 길게 뻗은 콧날은 베이다 못해 장미칼처럼 도마도 썰어낼 것 같았다. 동글뱅이 무늬가 새겨진 불투명한 안경 너머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히, 히익! 씹덕이잖아!”
부딪친 남자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줄행랑을 쳤다. 그와 싸웠던 남자도 슬금슬금 애인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불쾌하군.’
카를라히는 안경 너머로 찌푸려진 미간을 곧게 펴고서 릴리카 다키마쿠라를 안은 자세를 고쳤다. 소중하게 자신의 품속으로 그녀의 얼굴이 오도록 끌어안고서 대신전 입구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라히?”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카를라히의 걸음이 멈췄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자 코랄색 머리를 가지런히 한 갈래로 묶은 여인이 보였다. 라라였다.
“역시 라히네요. 뒷모습이 딱 라히인 거 있죠?”
반갑게 웃는 그 모습에 카를라히는 자신도 모르게 다키마쿠라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라히? 릴리카 짱 허리 터지겠어요.”
“아.”
카를라히는 다시 부드럽게 릴리카 다키마쿠라를 끌어안고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라능. 최근에 조금 일들이 많아져서 여유가 없었다능. 핑계겠지만, 저번에 보고 통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러니까 내 말은 흠, 보고 싶었다능.”
“저도요.”
혼자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라히와는 달리 라라는 담담하게 받아쳐 주었다. 라히는 애써 머쓱함을 달래려 머릿속에 떠도는 의문 하나를 입 밖으로 내었다.
“그보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아, 저도 맹세의 기도를 하려고요.”
“…….”
순간 카를라히의 머릿속에 ‘페아’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페아라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었던가. 싸늘하게 속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라히?”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구랑 같이 왔는지 물어봐도 되냐능?”
“음, 라히니까 특별히 소개시켜 줄게요.”
라라는 부끄럽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곱게 접힌 손수건을 펼치자 로브신사의 캐릭터 얼굴이 나타났다.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굿즈였다.
“이날을 위해 새로 모신 아이예요. 잘생겼죠? 특히 이 눈동자 부분 엄청 세련된 것 같다니까요. 일부러 고급스러운 천으로 했는데 진짜 로브신사의 피붓결처럼 부드럽고…….”
“라라… 너는 정말이지.”
손수건을 허탈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카를라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최고라능!!”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덕후 동지가 있다니, 그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라라의 어깨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밀려난 릴리카 다키마쿠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라, 라히?”
라라는 당황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생각보다 체격이 커서 더 생소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체크무늬 셔츠 너머로 단단한 사내의 가슴이 느껴졌다.
“워후! 정열적인 커플도 있네.”
“거기 두 분, 오래가세요!”
“휘익~”
“…그런 거 아니에요!”
짓궂은 휘파람 소리에 라라는 황급히 사내의 몸을 제게서 떨어뜨렸다. 혹시라도 소문이 퍼진다면 제 혼삿길에 방해가 될 것이 뻔했다. 라라가 무슨 해명이라도 해보라며 라히를 재촉하려 했으나 그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저기, 라히?”
“…….”
카를라히는 이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라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옆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크흠, 별 뜻은 없었다능.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그만…….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능.”
턱 아래를 긁적이면서 카를라히는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이상하게 손이 조금 떨렸다.
아까의 감촉이, 다키마쿠라와는 달리 따뜻했던 감촉이 자꾸만 생각났다. 라라의 얼굴이 닿았던 왼쪽 가슴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그가 다른 생각에서 좀처럼 헤어나질 못하는 동안 다키마쿠라는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치여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대신전에 들어서는 동안 두 사람은 오랜만에 활발히 침을 튀기며 덕톡을 나누었다. 마법소녀 릴리카 굿즈 한정판 발매 소식부터 시작해서 일반인이라면 질려 할 만한 공식 설정을 달달달 외우는 그들은 진정한 덕후라 할 수 있었다.
“앗, 그만 정신을 놔버렸네요.”
라라는 어느새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반인 통제 구역 같았으나 아마 저를 알아본 몇몇 성기사들이 그대로 통과하도록 내버려 둔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능.”
“그런데 어디로 왔는지 혹시 기억나세요……?”
“…….”
아무 생각 없이 걸어온 건 카를라히도 마찬가지였다. 동글뱅이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는 의미 없는 행동에 라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좀 더 자세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저기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미하일을 보러 이곳을 여러 번 찾아온 게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뗐다. 물론 자동으로 혀에도 모터가 장착되었다.
“릴리카 짱의 진정한 매력은 마법이 풀리고 평범한 소녀가 되었을 때 같다능. 변신을 하면 만능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릴리카 짱의 진정한 모습도 좋다능.”
“아, 그것도 알 것 같긴 한데 팬들 사이에서도 마이너한 게 사실이죠.”
“마이너라…….”
“아, 마이너 파시는 분께 마이너라고 하는 건 큰 실례인데 죄송해요…….”
“괜찮다능. 나도 알고 있다능. 근데 라라, 넌 릴리카 짱의 변신 모습이 더 좋냐능?”
“변신을 하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되니까요. 그리고 변신 후가 인기가 많은 게 사실이고요. 아, 마이너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저 마법물은…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달까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들 그래서 마법소녀물을 파는 게 아닐까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은 라라는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그가 듣기엔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발언으로 들렸을까 우려되었다. 라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릴리카 짱이 변신 풀리고 나서 자존감 낮은 모습을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이 갭모에 쩔긴 하죠.”
라라가 허둥지둥 말하며 슬며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눈이 중요한데 정작 눈은 두꺼운 안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너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능.”
그때 카를라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어딘가 답지 않게 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뭐랄까, 갭모에도 갭모에지만 릴리카 짱의 본모습이 그냥 사랑스럽다능.”
“아.”
라라는 왠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릴리카는 마법소녀로 선택받기 전에는 운동 신경도 나쁘고, 공부도 못하고, 무언가를 특별히 잘하거나 특출하게 예쁘지도 않은 평범한 17세 소녀였다.
그런 흔함이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 사람은. 그냥 안쓰러워서? 아니면…….
“굳이 변하지 않아도 변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 본모습 자체가 너무 좋다능.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릴리카는 릴리카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능. 그게 변신 전이든 후든. 릴리카 짱은 하악…….”
‘아무튼 굳이 남들 때문에 변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얼굴이라.’
순간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페아가 떠올랐다. 머리를 쓰다듬고 가던 그 다정한 손길과 그날의 묘하게 간지러웠던 말들이. 화악, 라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라라?”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학학거리던 카를라히는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라라가 혼자 멈춰 서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라라! 어디 아프냐능?!”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어디 좀 봐보라능.”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의 발소리에 라라는 괜히 이 상황이 민망해졌다. 자신과 어떻게든 눈을 맞춘 채 상태를 확인하려는 라히 때문에 라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다능!”
“…아, 아, 알고 있어요!”
“단순히 안면 홍조가 아닐 수도 있다능. 빨리 신관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호들갑이에요. 후, 정말…….”
라라는 하는 수 없다고 여기고 천천히 운을 뗐다.
“사실… 예전에 어디선가 그런 비슷한 말을 들은 게 생각나서요.”
“비슷한 말?”
“그 예전에요……. 저 자신이 너무 평범한 게 스트레스라서 얼굴이라도 바꿔보려고 성형을 시도한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때 어느 분이 저한테 그랬었어요. 매력적이니까… 그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전 제 얼굴이라든가, 제 어떤 면도 매력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그때 그 말이 좀 두근거려서……. 아, 아무튼요!”
입이 방정이라 여기며 라라는 황급히 말을 끝내버렸다. 라히는 모르는 상대겠지만 아무튼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라라는 혼자 성큼성큼 걷다가 뒤늦게 따라 걷는 소리가 없자 뒤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라히가 혼자 우뚝 멈춰 서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라히?”
“…아, 흠. 그게… 그날은 그…….”
“네? 혹시 안면 마비가 온 거예요?”
마비 증세가 혀부터 시작된 모양이었다. 큰일이 아니냐면서 라라는 손을 뻗어 라히의 양 뺨을 붙잡고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으이나 그마응하라느으.”
뺨을 인정사정없이 치대는 손길에 라히는 괴로워하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떠세요, 마비 증세는?”
“…마취 주사를 놓은 것처럼 얼얼하다능.”
“그럼 큰일이잖아요! 어서 신관에게 가서…….”
“아니, 네가 세게 문질러서 얼얼하다능! 무슨 수타 짜장면집에서 알바라도 하냐능?”
라히의 말에 라라는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얼마나 세게 문질러 댔는지 안면이 골고루 벌겋게 물들었지만 덕분에 라히의 뺨에 피었던 홍조를 가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뗐다. 흐르는 침묵을 깨기 위해 라라가 먼저 슬며시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