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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75)화 (75/115)

75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제국의 태양인 그가 이곳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애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침실로 간 그는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있는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여인이 그려진 다키마쿠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전히 아름답군. 이제 찾아와서 미안하다, 나의 릴리카 짱.”

다키마쿠라의 부드러운 천에 코를 묻고서 카를라히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빠르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약속한다능……. 크흑!”

카를라히는 다키마쿠라를 세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2D 애인을 두고 인간 약혼녀를 만들다니, 그것은 곧 릴리카 짱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자신의 맹세에도 릴리카 짱은 못 미더운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저 프린트된 천이 주름진 것뿐이었지만 카를라히는 양심이 찔렸다.

“…릴리카 짱, 마음 같아선 너와 약혼식을 올리고 싶다.”

“…….”

“진심이다. 아직도 내가 못 믿음직스러운 건가……?”

“…….”

오늘따라 릴리카 짱의 눈이 차가워 보였다. 카를라히는 다키마쿠라와 눈을 맞추고서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다.

“그래……. 말뿐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지…….”

“…….”

“보여주겠다, 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카를라히는 다키마쿠라를 침대머리에 세워두고서 곧바로 탈의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바지를 벗을 땐 릴리카 짱의 뜨거운 시선에 부끄러워져 다키마쿠라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지만.

옷장을 연 카를라히는 체크무늬 셔츠를 꺼내 들었다. 청바지와 말린 포스터가 튀어나온 가방, 동글뱅이 안경까지 완벽히 착용한 후 다키마쿠라를 한 팔에 가뿐히 안아 들었다.

성녀의 임명식과 굳이 같은 날에 약혼식을 치르는 이유라면 있었다. 오늘은 바로 1년에 단 한 번 있다는 성스러운 날이기 때문이다.

만남을 축복하는 날로, 제국의 모든 커플들이 대신전으로 모여들어 신의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기도를 드렸다. 매년 이날을 기념하는 축제가 수도에서 열렸지만 오늘은 성녀 임명식까지 거행돼 더 성대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카를라히는 무려 인간 커플들이 바글바글한 그곳에 다키마쿠라와 함께 가서 맹세의 기도를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 * *

대신전으로 향하는 마차의 행렬은 길었다. 행렬의 선두에서 움직이는 크고 화려한 마차는 리니엇 공작 가문의 마차였다.

10인승의 넉넉한 마차 안에는 엘리나 공녀들이 타고 있었다. 순결함을 상징하는 흰색 드레스 차림의 엘리나1과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엘리나2,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엘리나3,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나4는 각자 다른 일에 몰두해 있었다.

엘리나4는 독서 중이었고, 엘리나3도 드레스 속에 숨겨놓은 단검을 꺼내 들어 손질 중이었다.

엘리나1은 팔려 가는 가축처럼 멍하니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옆에 앉은 엘리나2는 그런 그녀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말이다.

오늘 황제와 약혼식을 치르게 될 사람치고는 너무 우울해 보였다.

‘혹시 엘리나1은 황제에게 숨겨진 애인이 있다는 걸 아는 걸까?’

이쯤 되면 크리온과 황제의 관계를 아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곳이 정말 BL 소설 속의 세계라면 황제공, 폭군공, 대형견수, 미인수 정도 될 것이다.

예전 같았다면 제법 군침이 도는 키워드라고 생각했겠지만, 김빙의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앞으로 서로 물고 빨고 꽁냥댈 미남 둘을 쓸쓸히 지켜봐야만 하는 엘리나1의 입장에 과몰입한 것이다.

“저기 있잖아, 엘리나1.”

“응?”

“약혼하기 싫은 거지?”

엘리나2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엘리나1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너, 원래 눈치라고는 없었잖아?”

“아 그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너무 눈치가 없는 것 같아서 눈치 좀 길렀어. 과거의 나는 잊어줘.”

마치 하루아침에 급착해진 악녀를 보듯 놀라있던 엘리나1의 눈빛이 조금 차분해졌다.

“나 생각해 봤어, 어떻게 하면 너를 도울 수 있을지.”

“엘리나2……?”

“방법은 의외로 쉬웠어.”

엘리나2는 엘리나1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던 작은 티아라를 뺏어 들었다. 그러곤 자기가 대신 티아라를 썼다.

“나는 네가, 너는 내가 되면 되는 거였어.”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작정하고 속인다면 아무리 황제라도 알아낼 길이 없을 터.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네가.”

머뭇거리는 엘리나1을 향해 엘리나2는 괜찮다며 애써 밝게 미소 지었다. 이에 조용히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엘리나4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나1, 네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친자매를 위해 희생하는 것 같아 보여도 엘리나2의 심리는 사실 앞으로 진행될 일의 중심인물이 되고 싶은 거야. 저번 검술 대회에서 치어리더복이라 불리는 괴상한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 때부터 알아차렸었어.”

사람의 본심에서 더 깊숙한 곳에 숨겨진 무의식마저 꿰뚫는 예리함이었다. 엘리나2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엘리나4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당당히 책까지 치켜들었다. 현 미시시피 대학 교수의 심리학 저서였다.

“방금 책에서 읽었는데, 요즘 사회에서 버림받고 관심받지 못한 아이들이 욕구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엉뚱한 짓을 한 후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 희열과 쾌락을 느낀다고 해. 이렇게 하면 튈 거라는 걸 스스로 잘 알면서 굳이 그런 짓만 골라 하는 이 현상은 성격 장애와 정신 분열을 일으켜 자살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한 정신병이야.”

“지금 나보고 관종이라는 거야? 헐랭방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어.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아직 우리에겐 이른 언어야.”

“그, 그게 뭐 어쨌다고?”

“애초에 엘리나2는 관종이 아니야. 생각 없이 행동할 뿐 그게 관심을 받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사고가 난 후 눈을 뜨자마자 관심 종자가 되었다? 이건 이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 미시시피 대학 교수님의 저서에 따르면 관종은 어릴 때부터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형성되는 거니까.”

엘리나4는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나게끔 책을 덮었다.

“즉, 넌 엘리나2가 아니란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엘리나1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하던 엘리나3도 검을 닦던 손짓 그대로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마차 사고가 일어나고 정신을 차린 그날부터 엘리나2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무엇보다도 엘리나5가 엘리나2를 보는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었지. 영적인 무언가를 감지한 게 분명한 거야.”

“…….”

“그리고 엘리나3, 너도 이 주제를 꺼내기 무섭게 고개를 든 걸 보니 뭔가 아는 게 있는 것 같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지적인 여주 엘리나4다웠다. 그녀의 말에 찔린 엘리나3은 입을 다물었다.

“맞아, 난… 엘리나2가 아니야.”

그때 엘리나2가 입을 열었다. 엘리나1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돌아보자 엘리나2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실토했다.

“눈을 떠보니 엘리나2라고 하는 이 공녀의 몸속이었어……. 어쩌다 이 몸의 주인이 되어버린 거지.”

“너 혹시 연가시니?”

“아니… 영혼이 몸속에 들어갔다고.”

“세상에…….”

엘리나1은 입을 틀어막았다. 김빙의는 그 어떤 질책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모두를 속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엘리나1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한 방울의 눈물을 소리 없이 떨어뜨리더니 곧 엘리나2를 와락 품에 안았다.

“눈치 못 채줘서 미안해. 그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도 못하고 많이 힘들었지?”

“아니, 엘리나3에게는 털어놨었어.”

“그래도 힘들었을 거야. 나는 너를 이해해. 비록 너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지만 말이야. 여성 편력이 심한 공작도 포옹했고, 폭군의 의붓딸도 포옹한 내가 포옹하지 못할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너의 깊고 깊은 상처를 내게 보여줄래? 달래줄 테니까, 어서.”

엘리나2는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엘리나1의 손길을 느꼈다. 진정한 어머니의 손길이란 이런 것일까. 어머니를 애증하면서도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고독한 늑대 같은 남주에게 백 퍼센트 먹힐 스킬이었다.

“끄흛, 끍, 엄마…가… 끄으흐흙 너무… 보고 싶어흐흛흛흛!”

엘리나2, 아니 김빙의는 울음을 터뜨렸다. 작지만 아늑한 품, 향수, 손맛, 고향의 맛 등 짧은 시간 내에 놓고 온 수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손길이었다.

“엘리나1… 고마워……. 끄흑, 덕분에 마음이 많이 진정됐어.”

엘리나2는 진심으로 환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너를 도와주고 싶어, 진심으로.”

“하지만…….”

“나한테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 줘.”

엘리나2의 굳은 결심이 담긴 말에 엘리나1은 감격에 찬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서둘러 드레스를 바꿔 입었다.

“들키지 않을까?”

노란 드레스로 갈아입은 엘리나1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그런 엘리나1의 손을 꽉 쥐어준 엘리나2는 걱정 말라며 더 환히 웃어 보였다.

말릴 새도 없이 커져버린 사태에 엘리나3과 엘리나4는 아무것도 못 본 척 다시 자기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대신전 건물 밖에는 인파가 몰려있었다. 영원한 맹세와 함께 축복을 받기 위해 온 커플들이었다.

“아! 밀치지 좀 마세요!”

“이봐, 그쪽이 밀쳤잖아요!”

한쪽에서는 이미 밀치고 밀치는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점점 과격해지는 몸싸움에 결국 사내 하나가 뒤로 떠밀린 순간이었다. 팔꿈치에 무언가 푹신한 것이 세게 부딪쳤다.

“이봐요, 괜찮…….”

남자는 뒤를 돌아본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자신의 팔꿈치에 부딪혀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여자 얼굴이 프린트된 천이 찌그러진 거였지만. 그리고 그 베개 여인을 소중한 듯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굵직한 팔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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