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 *
이상하게도 라라가 시합할 때마다 상대 기사들은 하나같이 힐링한 표정으로 쓰러졌다. 카를라히가 다시 상석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쩌다 준결승까지 올라와 버린 라라의 경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로렌스! 네 녀석이 여기까지 올라올 줄이야. 하지만 이 경기의 승자는!”
“안 닮았다고!!”
라라는 발끈하며 상대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무거운 검을 휘두르다가 자신도 그만 중심을 잃고 흙바닥에 거하게 넘어졌다. 이 틈을 타 상대 기사가 반격을 하려 한 순간 어디선가 쏘아져 온 하얀빛이 상대 기사의 손목에 맞았다.
몇 년간 앓았던 손목 터널 증후군이 깨끗하게 사라진 기분이었다. 상대 기사는 검을 떨어뜨리고서 미련 한 점 남지 않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대련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 심판관이 곧바로 라라를 향해 깃발을 들어 보였다.
“…로, 로렌스 슈모르드 승!”
“그러니까 안 닮았다고!!”
라라는 다시 검을 주워 들고 이번에는 심판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분노 조절 장애였다. 심판관이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하고 비명을 지른 순간이었다. 흙먼지를 실은 바람과 함께 누군가가 다급하게 심판관 앞을 막아섰다.
“당신은……! …음 누구신데……?”
심판관의 당혹스러운 물음에도 엘리나2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그를 보호할 뿐이었다. 무방비하게도 자신은 치어리더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그만! 싸우는 건 이제 그만해―!!”
엘리나2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칼을 들고 설치다니, 이런 야만적인 놀이 문화에 신물이 다 났다. 엘리나3도 그렇고, 모두가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엘리나2의 진심 어린 외침에 라라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반쯤 쳐들었던 검을 허무하게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마터면 오빠 때문에 다른 사람을 검으로 해칠 뻔했다. 어떻게든 오빠 탓으로 돌리는 라라였다.
“정말, 차원 이동자로서 못 봐주겠네! 이렇게 서로 칼로 상처 입혀서 뭐가 남는 건데?! 다들 언제까지 이런 거에 열광할 건데? 건전하게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로 대결하라고!! 난 진심으로 응원해 주려고 온 건데, 이게 뭐야! 사람 하나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어!!”
엘리나2는 관중석을 향해 신들린 듯이 이빨을 까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길이 향한 곳은 상석에 앉아있는 황제 카를라히였다.
“이봐요, 당신이 이 나라 황제죠!!”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실시간 검색어에 ‘검술 대회녀’로 뜨고도 남을 관종 짓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나2는 당당하게 카를라히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신도 좀! 이런 거 가만히 보고 있지 말고 말리라고요! 당신이 이곳 최고 책임자 아니에요?! 정말 너무하시네! 백성 하나가 죽든 말든 상관없단 거예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신이 이래도 백성들의 왕이라 할 수 있어!”
엘리나2의 공개적인 디스는 계속되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김정일이나 박정희도 아니고~ 이 나라가 무슨 독재 정권이야 뭐야~”
‘여기 독재 정권 맞는데…….’
폭군이 존재하는 나라니까 독재는 맞았다. 라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끼어들고 싶어도 신이 너무 좋아해서 끼어들기도 뭐했다.
<역시 차원 이동 빙의녀이니라. 현대에서 넘어와서 그런지 이런 구시대적인 걸 시원하게 잘 꼬집는달까? 아무튼 이런 사이다가 있어야 차원 이동 빙의물 아니겠느냐.>
사실 그냥 관종인 것밖에 모르겠지만 라라는 대강 수긍하였다. 그동안 엘리나2의 관종 짓은 계속되었다.
“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랩으로 해!!”
“…리니엇 공작 가문의 여식이 며칠 전 마차 사고로 혼수상태였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고 들었으나… 이 무슨…….”
“아무리 한 나라의 공녀라 해도 저 몰상식한 행동을 두고만 보고 계실 겁니까! 황실의 권위를 농락하는 행위입니다!”
“도를 한참이나 넘어섰다고 봅니다……! 뭣들 하느냐. 저자를 폐하의 앞에서 끌어내지 않고.”
보다 못한 원로대신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으나 카를라히는 푸른 눈을 어둡게 가라앉힐 뿐 무겁게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폭풍 전의 고요와 같은 정적이 휘몰아칠 때였다.
카를라히가 상석에 세워둔 검을 빼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나2가 서있는 중앙으로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엘리나2의 목을 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참수형 엔딩…이느니라.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차원 이동녀라도 왕한테 대들면 X되는 것이니라.>
‘어떡할 거예요?! 너무 나댔어!! 이대로 뒈지게 생겼잖아요!!’
라라는 어떻게든 조심스레 나서서 막아보려 했으나 페아의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페아가 아닌 것 같았다. 짙게 그늘이 진 눈동자 속에는 칼처럼 시린 냉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기에 녹아든 살벌한 살기가 자신의 목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절로 손끝이 떨렸다. 공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공포와 마주하고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카를라히의 검이 빠르게 움직여 카를라히의 턱 앞에 멈췄다.
“요, 췎!췎! 암더제국 더 땁끌래뜨 히빱모범 노블레스 페뷸러스 타블레스 골져스벗 댄져러스 난 비트를 비틀어 제껴버리는 제국 황제 카를라히―! 나의 마이크는 나의 검! 모조리 베어버려, 이 빗―치―! 검술의 검 자도 모르는 X만 한 쫌생이는 닥치고 있어라―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안하냐―!”
카를라히는 검을 마이크처럼 쥐고서 날카로운 랩을 선보였다. 이에 엘리나2는 뒤로 반보 물러서다가 곧바로 랩으로 반격에 나섰다.
“내가 빗―치라면 너는 국민들에게 빚―진― 빚쟁이! 혈세 다 어디로 갔냐, 하는 거라곤 X도 없는 제국 황제―! 이자는 갚아줄게 우리 엄빠 카드로― 우리 엄빠 건강하니까 네 엄마나 찾아…….”
서로의 부모님 안부를 묻는 훈훈한 패드립 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격렬한 비트에 맞춰 오가는 말들은 하나같이 원색적이고 강렬했다. 관중들은 하나둘 그들의 격해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인상은 찌푸려지는데 뭔가 속이 시원하게 긁히는 기분이었다.
랩은 20분 가까이 이어졌다.
“하아… 하아…….”
“하아… 후…….”
흙먼지가 이는 경기장 한가운데서 서로를 노려보며 랩을 쏟아내던 두 사람이 조만간 입술을 끌어 올렸다. 비록 디스랩이기는 하나 서로의 랩을 인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야만적인 문화 중 하나인 검술 대회를 대신해 제국에선 매년마다 랩 배틀이 행해졌다. 한 차원 이동 빙의녀로 인해서 말이다.
10장 마왕 신부의 정석
제국 역사상 최초로 우승자 없이 검술 대회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대신전에서는 성녀 임명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성스러운 날을 맞이해 황제와 엘리나1 공녀의 약혼식도 함께 거행되는 터라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엘리나5는 몸을 청결히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 잠시 연을 끊고 대신전의 깊숙한 장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성녀 전하.”
엘리나5는 문밖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성기사 밀리오르였다.
“이제 바로 내일이군요, 성녀님의 존재를 전 대륙에 널리 알릴 날이.”
“그렇네요. …과연 제가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자꾸 생각하게 되네요.”
지워질 듯 흐릿한 목소리로 엘리나5는 대답했다. 대신전 안에서 성녀로서 대우를 받는 것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며 칭송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엘리나5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겠죠, 신이 내린 운명이라면.”
“저 또한 목숨 걸고 성녀 전하를 지켜 보이겠습니다.”
안 그래도 최근 대신전 근처에서 포착된 불온한 움직임에 대신전의 경비가 훨씬 삼엄해져 있었다. 비장한 밀리오르의 각오에 엘리나5는 아련하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이 자수를 저희 공작가에 전해주겠어요?”
문틈 사이로 내밀어진 하얀 손에는 은빛 비단 자락이 들려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완성된 백로의 자수가 금방이라도 창천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밀리오르는 속으로 감탄하다가 그것을 곱게 품속에 접어 넣었다.
“무사히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밀리오르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엘리나5는 그제야 미소를 거두었다. 드디어 내일인가. 엘리나5는 창밖에 뜬 달을 한동안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 * *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드디어 오늘 엘리나1 공녀님과의 약혼이 성사되는군요.”
카를라히는 이른 오전부터 찾아온 신하들을 일일이 맞이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왕좌 뒤에 쌓인 폐물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비싼 몸값을 자랑하듯 호화찬란한 색색의 천을 휘감고 있었다.
질린 표정으로 카를라히가 상석에서 일어났다.
“슬슬 준비해야겠군. 의복으로 갈아입고 오겠다.”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르려는 호위와 시종들에게 그는 가볍게 언질을 두었다.
“시종은 필요 없으니 다들 나가라.”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문을 지나쳐 들어선 순간 양 기둥에 서있던 기사들이 문을 닫았다. 긴 복도를 지나 아무도 없는 침실에 들어선 카를라히는 거추장스러운 망토부터 끌어 내렸다. 벌써부터 피곤했다.
적당히 침대 위에 망토를 던져두고서 침대 옆 바닥을 향해 몸을 숙였다. 손끝으로 카펫을 들추자 그 아래에 가려져 있던 커다란 지하실 문이 드러났다.
문을 위로 들어 올리자 지하로 향하는 돌계단이 보였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황제만이 아는 비밀 공간으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진 탈출로였다.
카를라히는 근처에 놓인 촛등을 들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카를라히의 검자줏빛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외부와 이어져 있다는 증거였다.
한 시간 정도 걸어 마침내 통로 끝에 도달한 카를라히는 벽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머리 위의 맨홀 뚜껑을 열고서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평범한 주택가였다. 카를라히는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