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럼 따로 안 만나고 따로 얘기만 나누는 건 괜찮은가.”
“그거라면 좋습니다.”
같은 의미였지만 단순한 크리온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라히는 크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엘리나2(김빙의)는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집에 있는 크리온이라고 하는 정체 모를 남자가… 사실은 이 나라 황제의 애인이었다니.’
공작가의 양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인이나 고용인도 아닌 남자가 그냥 세 들어 살기에 뭐 하는 사람이지 싶긴 했었다. 물론 튀는 아름다운 외모와 황실에서 일한다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황제가 자신의 애인을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공작가에 숨긴 거였어?’
그렇다면 이 소설은 BL 소설인 것인가. 그리고 그 BL 소설 속에 자신은 들어온 것이란 말인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엘리나2는 몸을 떨었다. 이 게이들 속에서 자신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갑자기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 보고 싶어. 아빠도… 김빙찬은 좀 안 보고 싶다.’
오빠 김빙찬을 떠올리니 없던 밥맛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눈가에서 글썽이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엘리나2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미하일이 힐끗 쳐다보았다.
‘…저번에 라라가 엑소시즘에 관해 물어보던 게 엘리나2 때문인가. 확실히 엘리나2 그년이 이렇게 찔끔대며 울 성격은 아니지. 남의 집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치우지도 않고 간 년인데…….’
그날의 폭주 사건이 꽤나 두껍게 앙금으로 쌓인 모양이었다. 역시 엘리나2의 몸속에는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여기며 미하일은 차분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아직 라라의 차례가 아니니 잠이나 자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경기는 엘리나3의 가발이 벗겨진 탓에 잠시 중단되었다. 엘리나3은 자신이 여자임을 사람들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 있었다. 이제껏 잘 숨겨왔으나 공녀라는 것이 들킨 이상 기사로서의 삶도 끝이었다.
“제길!”
아무도 없는 텅 빈 건물 안에 들어선 엘리나3은 세게 벽을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케첩처럼 걸쭉한 피가 손등에 묻어났다. 이에 얌전히 검집에 걸려있던 마검이 움찔 떨었다.
엘리나3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할 기력이 없었다. 돌아가서 다시 가발을 찾아오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풀이 죽은 모습에 마검은 서느렇게 날을 세웠다.
“마!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지릴 수도 있고 그런 거 아이가……! 뭐 이런 걸로 기죽고 있노!”
“…내 기사로서의 삶은 끝났어.”
“…시방! 그케 따지면 지린 내는?! 지린 내는 마검으로서의 인생이 어케 되는데!”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무시무시한 마검’ 타이틀은 떠나가고 ‘검술 대회에서 지린 더러운 검’ 타이틀만 남았을 뿐이다. 마검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차라리 과도로서의 순탄한 인생을 살았더라면 좀 더 편안했을 것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리기 전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카페 진동벨처럼 검집 자체가 부르르 떨리더니 얼마 안 가 마검의 의식이 뿌옇게 흐려져 가기 시작했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간다.
하얗게 커튼 사이로 터져 나오는 아침 햇살이 여린 속눈썹 사이를 마구 찔러댔다. 마검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을 뒤로하고 누운 채 고개를 돌리자 굵은 기둥을 휘감아 올라가는 잎줄기무늬가 양각된 침대 기둥이 보였다. 마검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화들짝 상체를 일으켰다.
연한 베이지색의 고급 가구들이 채워진 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마지막 장면을 생각한다면 지금 상황과 매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검은 목 아래를 내려다본 후 그대로 굳었다.
‘몸이 작아졌어…….’
껄끄러운 감정과는 달리 잠옷의 겉감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잠옷을 매만지며 멍하니 앉아있었을까, 가직한 곳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여인이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익숙한 칼자국을 뺨에 새기고 있는 여인은 유모검 라니오사였다.
“도련님께서도 참. 생일이시라고 일찍 일어나 계신 건가요? 후훗, 이럴 때 보면 어린애 같으시다니까.”
“시방… 마! 니 참말로 라니오사가? 라니오사 맞나?”
“무슨 꿈을 꾸셨길래 아침부터 상태가……. 네, 마검 가문의 유모 라니오사 맞답니다. 이만 꿈에서 깨시지요.”
마치 처음 들어본 사람의 이름을 말하듯이 마검은 계속해서 라니오사의 이름을 되뇌었다.
분명 라니오사가 죽은 지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을 터인데…….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었던 그녀가, 지금 눈앞에 살아있었다. 마검은 뭐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빠르게 눈치챘다.
초여름의 날씨에 덮기엔 너무 두꺼운 이불을 젖히고선 마검은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방 안에 서느렇게 감도는 찬 공기와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창가에서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채 마검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하얗게 눈이 덮인 창 너머의 세상은 마검이 알고 있던 세상과는 전혀 딴판이라 할 만큼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마검은 제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따끔했다.
“마! 겨울……? 초여름에 눈이 내릴 리가…….”
“도련님? 무슨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어라, 열은 없으신데…….”
“…라니오사, 마!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노?”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는 라니오사를 돌아보며 마검은 다급하게 물었다. 아침부터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도련님을 향해 라니오사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대륙년 652년이잖아요, 도련님.”
“여기가 지금… 대륙년 652년이라고? 마! …그럼 내 나이가…….”
“열일곱이시지요. 잠이 덜 깨신 것 같은데 더 주무시겠어요? 식사는 조금 뒤에…….”
“…마!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인마검님과 주인마님검께선 2층 서재에서 티타임을 가시고 계세요.”
“지금 당장 뵈러 갈란다! 마!”
“도련님! 옷은 제대로 입으시고……!”
라니오사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마검은 맨발로 방을 뛰쳐나왔다. 황급히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놀란 눈의 고용인들과 마주쳐야만 했으나 대수롭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뵙는 거였으니까.
평소라면 깍듯이 지켰을 예의범절도 무시한 채 마검은 벌컥 서재의 문부터 열었다. 방 안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티 테이블을 사이를 두고 앉아있던 마검 부부가 고개를 돌렸다.
“마검?”
“무슨 일 있었니, 아가.”
놀람과 걱정스러움이 담긴 다정한 시선이 두 분에게서 뻗어져 오자 마검은 그제야 안도했다. 머리끝까지 북받쳐 오른 안도감에 금방이라도 다리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마검은 터져 나오려는 환한 웃음을 참은 채 부모님께 다가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란히 안아드렸다.
“아침부터 애교를 다 부리고, 후훗. 열일곱 살 먹은 애기구나.”
“다 커도 우리 눈엔 애기가 아니겠소, 부인. 그보다 마검,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마! 그게 끔찍한 악몽을 꿔서… 두 분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아입니까.”
다행이다. 모든 게 꿈이었다니…….
변함없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이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여전히 뇌리 깊숙한 곳에 잔존해 있는 악몽의 편린을 떨쳐내 버리고서 마검은 작게 미소 지었다.
엘리나3은 갑자기 허전한 기분에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걸려있던 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곳까지 뛰어오는 동안 어디다 떨어뜨린 것은 아닌지 생각에 잠긴 채 뒤를 돈 순간이었다. 장신의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있었다.
목덜미에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검푸른 머리와 새파란 벽안이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를 간직한 이 남자는 다름 아닌 드래곤인지 포켓몬인지의 피를 이어받은 황실의 주인, 황제였다. 동시에 폭군이라고도 알려진 사내였다.
“…폐하.”
엘리나3은 긴장감에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경기 중에 자신을 보고 쫓아온 것 같았다.
황제가 보는 경기 중에 여자임을 들켜버렸으니 황족 기만죄로 처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이 나라 전체를 속인 꼴이었다. 목이 베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목이 베이면 말을 못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대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경, 고개를 들라.”
역시나였다. 엘리나3은 떨리는 어깨를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벽안이 얕은 어둠 속에서 무섭도록 시퍼렇게 빛을 발했다.
“머리카락이 상당히 길군.”
카를라히가 손을 뻗어 엘리나3의 머리칼을 한 줌 쥐었다.
“이런 머리에다 가발까지 뒤집어썼으니 두피의 숨이 많이 죽었을 터. 상사들의 괴롭힘은 이해가 가나 그렇다고 자신을 숨기는 이런 무모한 방법을 쓰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가발로 속일 생각은.”
“머리카락의 생명은 곧 두피다. 생명의 근원인 두피가 상하면 머리카락은 빠진다는 걸 정녕 모른다고 말할 참은 아니겠지? 어째서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느냔 말이다!”
“…폐하.”
카를라히로서는 가슴이 답답했다. 이대로 계속 답답하게 가발을 쓰다간 두피에 이상이 생겨 탈모가 올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에드가3 경이라 불리는 젊은 청년의 놀란 얼굴을 보니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화를 내서 미안하군. 하지만 지켜보는 내내 걱정이 되었다.”
엘리나3의 은빛 머리칼을 놓아주는 대신 그의 손을 붙잡은 카를라히는 그 손바닥 위에 천천히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말 대신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서 남자는 복도의 그늘 너머로 사라졌다.
엘리나3은 손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탈모 방지 샴푸 샘플이었다. 그 위에 붙어있는 쪽지를 확인한 엘리나3은 아랫입술을 천천히 깨물었다.
[짐도 최근에 추천받아서 써보는데 확실히 탈모 방지가 된다는 느낌이다. 샘플 사용해 보고 괜찮으면 주문해 보도록.]
자신이 여자임을 눈치챘음에도, 이렇게 한결같이 대해준 자는 처음이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대우해 주었다는 느낌, 탈모는 전 세계 남녀노소의 고민거리라는 느낌, 세계는 하나다라는 느낌, 아무튼 대충 그러한 느낌으로 괜히 울컥해 버린 엘리나3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