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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72)화 (72/115)

72화

엘리나3과 크리온이 대기실을 잠시 나가있는 동안 로렌스는 죽은 듯이 누워있다가 뒤늦게 들어온 어느 기사에게 발견되어 호송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뒤, 라라가 남장을 하고 오빠의 대기실에 갔을 땐 이미 로렌스는 내장 파열 판정을 받고 누워있었다.

“…와줬구나, 라안…….”

“…아, 응.”

복수하러 왔는데 도저히 복수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라라는 얼쯤한 기분을 느끼며 대기실 문 근처에 서있었다.

“기껏 네가 응원해 주러 왔는데… 이런 꼴이라니, 한심하지?”

“응원하러 온 건 아니고, 그보다 어쩌다가…….”

“끔찍한 사고였어.”

로렌스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라라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이에 라라는 벌레라도 붙은 듯 기겁하며 그의 손을 떨쳐내었다.

“진짜 이름이 뭔지… 끝까지 안 알려줄 거야?”

“…응, 꺼져.”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남장하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강한 호기심이 일었으나 로렌스는 참아내었다.

“저기, 부탁이 있어.”

“응, 꺼져.”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또 한 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한숨을 뒤로하고 로렌스가 이윽고 운을 뗐다.

“나 대신에 검술 대회에 출전해 줘. 지금 이 몸으로는 출전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출전 기회가 양도되는 거였어?”

“아니, 네가 나인 척하고 출전해 달라는 거야. 우린 제법 닮았으니까…….”

“아, 기분 더러!”

서로 기분만 상한 순간이었다. 바로 대기실을 뛰쳐나가려는 라라를 로렌스의 뒤이어진 말이 붙잡았다.

“이번 검술 대회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내 가문이 위태로워져.”

“…그게 무슨…….”

“슈모르드 가문은 무가 집안이거든. 그렇다 보니까 혼담이 들어오는 순위도 그 집안의 명예에 따라 결정돼. 만약 이번 대에 검술 대회 성적이 좋지 않게 되면… 내 동생, 그러니까 개썩을 호래자식이자 빌어먹을 라라의 결혼도 덩달아 늦춰질 게 뻔해.”

‘…이 자식, 아침에 내가 욕한 거 들었네.’

라라는 그렇게 속으로 씹어댔으나 겉으로는 숫제 시치미를 떼야 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나름 동생을… 생각하나 봐.”

“얼른 시집가 주는 게 나한테 좋지. 어떻게 그 얼굴을 매일 보고 살…….”

쫘악―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로렌스의 얼굴이 반 바퀴 돌아갔다. 만화책을 넘기면서 다져진 생활 근육이 살기와 뒤엉켜 꿈틀거렸다. 정신을 잃은 로렌스를 두고 라라는 대기실을 벗어났다.

라라는 출전자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공간에 들어섰다. 긴장되었지만 확인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빠를 것이다. 갈색 머리에 평범한 인상을 한 남장 기사의 등장에 몇몇 기사가 술렁였다.

“라안……? 출전 자격도 없으면서 네가 왜 여기에…….”

“로렌스인데요. 갈색으로 염색했어요.”

“아, 뭐야. 로렌스 너였냐. 그러고 보니 라안 녀석이랑 머리 색만 다를 뿐 진짜 비슷하게 생겼네.”

‘죽여줘…….’

라라는 대기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오열했다.

“로렌스 쟤 왜 저래?”

“몰라. 들어오자마자 저러네.”

다른 기사들이 어깨를 으쓱하는 동안 홀로 조용히 앉아있던 엘리나3이 부름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첫 번째 대련 시합이었다. 긴 통로를 지나 야외 대회장으로 나오자 관중들의 함성이 쏟아져 들어왔다.

맞은편에 선 상대 기사와 마주 선 채 막 마검을 뽑아 들려는 그때였다.

“오, 미키 유쏘 파인~”

밝고 톡 튀는 목소리가 넓은 대회장 한가운데를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관중석 맨 앞자리에서 해괴한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 훤히 배꼽이 드러나는 적나라한 복장, 은발 머리를 양 갈래로 높이 묶은 엘리나2가 금색 털 뭉치를 양손에 들고서 흔들고 있었다.

“헤이, 미키, 헤이, 미키~ 이겨라, 엘리나3! 우승은 너의 것!”

현대인인 엘리나2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복장이라 하더라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달랐다. 그것을 증명하듯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엘리나2에게로 쏠렸다. 천박하게 저게 뭐냐는 경악한 눈빛과 한 번도 보지 못한 복장에 신선함과 흥미로움이 뒤섞인 눈빛이 오갔다.

그 눈길 가운데에는 상석에 앉아있던 황제 카를라히의 눈길도 섞여있었다.

‘…뭐지? 웬 관심 종자가.’

하고 슥 봐주다가 카를라히는 다시 앞을 집중했다. 짧은 은발 머리 기사가 보였다.

‘비슷하게 생겼네. 가족인가.’

카를라히는 의자에 걸쳐놓은 음료수를 들어 올려 빨대로 쪼옥 빨았다. 그리고 언제 경기가 시작하나, 무료한 눈길을 던졌다. 엘리나3이 막 경기를 시작할 때쯤에는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중요한 경기는 정작 놓쳐버렸다.

한편, 엘리나3이 준결승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대기실 안까지 퍼졌다. 구석에서 오열하고 있던 라라는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듣고 몸을 일으켰다. 밖에는 이미 상대 선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로렌스인가? 들리는 소문과 똑같이 생겼군.”

“…….”

라라는 깊은 내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살기를 알아차렸다.

“똑같다고 하지 마아!!”

이렇게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라라의 기습 공격에 상대 선수는 움찔 뒤로 물러서다가 검을 다시 바로 세워 막아내었다.

“…제법이군.”

상대 선수가 허리를 숙여 잽싸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대로 검으로 라라를 베어내려 할 때였다.

“헛……!”

갑자기 어디선가 뻗어져 온 환한 빛이 상대 선수의 척추에 맞았다. 상대 선수는 허리를 활 모양으로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 년간 그를 고생하게 만들었던 척추의 뻐근함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천국의 구름이 대신 허리를 받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앙!”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유연함이 찾아왔다. 상대 선수는 천국에 오른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그대로 대자로 뻗었다.

“…로, 로렌스 슈모르드 승!”

깃발이 라라를 향해 들렸다. 이겨놓고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웬 변태 새끼 때문에 눈만 버렸다고 중얼거리며 라라가 뒤를 돌 때 관중석에 앉아있던 미하일이 풀어 헤친 아래 단추를 다시 잠갔다. 그 환한 빛은 다름 아닌 그의 배꼽에서 쏘아져 나간 신성력이었던 것이다.

‘분명 탈락했다고 들었는데 왜 검술 대회 따위에 출전하고 난리야, 쟨.’

하마터면 위험할 뻔하질 않았는가. 미하일은 눈썹 끝을 구겼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라라의 뒷모습에 마음이 풀리는지 곧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그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엘리나3은 로렌스가 이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음 경기 준비를 마치고 야외 대회장 안에 들어서자 환호성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차게 검을 뽑아 들고 서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불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가진 사내가 걸어왔다. 준결승에 진출한 다른 기사단의 기사였다. 둘 사이에 묵례가 오갔다.

엘리나3이 발을 뒤로 반 뼘 물리며 대회장의 흙을 부드럽게 짓뭉갰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상대 선수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휘날리는 짧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엘리나3은 답지 않게 크게 눈을 떴다.

“…저 검법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들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등 뒤로 커다랗게 나타난 독수리 환영 때문에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독수리 검법.”

남자가 무겁게 운을 뗀 순간 독수리의 높은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피요오오오― 독수리 환영이 허공을 반 바퀴 돌다가 곧바로 엘리나3을 향해 빠르게 내려왔다.

‘아니, 저 사람만 장르가 다르잖아?!’

라라는 대기실 통로에 서서 지켜보다가 경악했다. 검술 대회라 하기엔 이미 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검을 힘차게 빙그르르 굴려서 상대 검을 링 밖으로 튕겨내어야 될 것만 같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하는 독수리 환영에 엘리나3도 긴장한 것인지 검을 추켜세웠다. 동시에 엘리나3의 팔이 얕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파동이었다. 쥐고 있는 마검이 떨리고 있었다. 엄청난 힘에 반응해 각성을 한 것인가. 엘리나3도, 라라도, 모두가 집중하여 마검을 지켜볼 때였다. 마검의 손잡이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엘리나3의 땀인가 싶었지만 노란 그것은 이제까지 마검이 흡수한 기름이었다.

‘지렸네…….’

그냥 쫀 거였다.

엘리나3은 축축하게 젖어 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누런 물이 손목을 타고 내렸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4원소의 힘을 가진 마검에 대해.

‘그렇다면 이 마검은… 물의 검?’

어떻게 보면 참 긍정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독수리의 환영이 엘리나3의 머리로 돌진하더니 그대로 가발을 가로채 갔다. 가발이 벗겨진 순간 환한 은색 머리칼이 허리까지 타고 내려왔다.

“……!”

순간 관중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여자가 아니냐고 술렁이는 몇몇 관중들 속에서 상석에 앉아있는 남주 카를라히만이 담담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긴 머리였나 보군, 저 남자 기사.’

보통 탈모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쓰는데 역인 경우는 처음 보았다. 하지만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기사단의 철저한 위계질서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숱이 얼마 없는 중년 기사들의 입장에서 풍성한 머리칼을 가진 신입 기사가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질투하여 괴롭히는 경우를 대비해 저렇게 풍성한 머리를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를라히는 이런 악습이야말로 바로잡아야 할 때라고 여기고 곧바로 신뢰하진 않지만 귀여운 부하 크리온을 불렀다.

“경기가 끝나면 저 기사에게 가서 내가 따로 보자고 한다고 전하도록.”

“왜요? 왜 따로 만나시려는 겁니까?”

“그럼 내가 저자와 따로 만나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네. 왜냐면 저는 저분의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저분도 저만 바라봐야 해요.”

“아, 그런 관계였나. 하지만 나는 저자와 만나야 된다.”

“싫어요.”

“상관의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군. 귀여워.”

단호하게 홱 하고 고개를 가로젓는 크리온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카를라히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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