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보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큰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대천사 가브리엘의 짓입니까? 천계와의 전쟁을 각오해서라도 마왕님의 육체를 훼손한 그자들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만, 인간 둘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슨…….”
“나를 소환해 내고서 그 자리에서 해친 자들……. 그래, 분명 인간 여자 둘이었다.”
“한낱 인간들의 짓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되돌아왔지만 페레우스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조금씩 그의 눈에 핏빛 광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한낱 인간 계집에게 이 몸은 당한 것이다. 쿡… 큭… 크하하하학! 가브리엘 그자가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아아― 분명 이 나를 흥분케 만드는 증오 서린 눈빛일 게 틀림없겠지.”
긴 입술의 끝을 혀로 핥아 올리며 페레우스가 말했다. 표정도 말투도 이미 항마력 테스트 단계에 들어선 지 오래였다.
“마왕님! 지상과의 전쟁 선포를 허락해 주십시오!”
“마왕의 부활을……! 중2의 무서움을 인간들에게 똑똑히 알리는 겁니다. 크클… 클클클.”
“그렇다면 미리 화려하게 예고장을 보내는 게 좋겠지. 안 그런가, 나의 부하들이여?”
한 손을 들어 얼굴 반쪽을 가리고서 페레우스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높다란 천장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시뻘겋게 발광하고 있었다.
“…성녀를, 인간들의 성녀를 납치한다.”
“……!!”
“지상에 대한 보복이다.”
“마왕 폐하……!!”
성녀를 잃는 것은 지상의 크나큰 손해임을 마족들은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자신들의 왕이었다. 성녀를 납치하다니 스케일부터가 마왕 남주가 벌일 만한 일인 것이다.
“크크를, 언제든 맡겨만 주십시오! 저희들은 당신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기나긴 세월이 몹시도 무료하던 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왕님의 뒤통수에 난 구멍은 성녀의 강력한 신성력으로 메워야 되는…….”
“구멍……?”
페레우스는 멈칫하고 뒤통수에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모서리에 찍혀 오목하게 들어간 구멍이 만져졌다.
“…억!”
“마왕 폐하!!”
그대로 눈을 허옇게 뒤집어 까고 바닥에 쓰러진 마왕의 주변으로 마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페레우스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저희들의 왕이시여! 정신이 드십니까!!”
“…어, 제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 건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사내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제자리에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신거리는 페레우스를 향해 마족들은 일제히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막 부활하셨나 싶었으나 일시적인 쇼크로 인해 또다시 들어간 모양이었다.
“크클, 육체는 괜찮으십니까?”
“제가 여러분들께 괜한 걱정을 끼쳤나 보네요, 하하. 전 괜찮으니 다들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하하하.”
“마왕 폐하.”
그때 충신 중의 충신으로 불리는 마족 하나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나타났다.
“마왕님께서 명하신 것은 반드시 저희들끼리 해내어 보이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구체적으로, 뭐를 말씀하시는지?”
친절한 눈웃음을 지은 채 페레우스는 되물었다. 자신이 황성에서 일하는 사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전달 사항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마족은 끝까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사회생활만 천 년째였다. 이 묘한 분위기가 단순히 자신이 쓰러져 있던 일로 형성될 리는 없었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묻고는 싶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눈앞의 마족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단 거였다.
‘…분명 같은 부서에 계셨던 분이셨는데. 기억해라, 나 자신. 쿠를 씨였나, 콤바 씨, 렉바 씨……?’
한참을 속으로 고민하는 동안에도 얼굴로는 약간의 곤란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페레우스가 친절한 영업용 미소를 입가에 띤 채 해묵은 기억을 헤집고 있을 때였다. 돌연 마족이 결연한 의지가 깃든 눈으로 페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이 필렉, 한 몸 바쳐 마왕 폐하의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아, 맞다. 필렉 씨, 필렉 씨.’
“아하하, 뭔진 몰라도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필렉 씨도 올해는 원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저는 최근 지상에서 새 직장을 얻었거든요. 하하, 조금 일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는 하지만 상사분도 괜찮으시고…….”
페레우스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사람처럼 얘기를 늘어놓았다. 천 년간의 사회생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 *
엘리나2는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아직 시차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아침에 일어나는 게 곤욕스럽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꼭 일어나야만 했다.
방 창문을 활짝 연 엘리나2는 아래에 대기해 있는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마차에 오르려는 짧은 은발 머리 기사가 보였다.
“엘리나3!”
남장 중인 엘리나3, 아니 에드가3은 한 손을 들어 쉿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그제야 엘리나2는 입을 가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슬쩍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위험해.”
“괜찮아. 이따 1시부터 시작이었지?”
“응.”
“보러 갈게. 꼭 우승해야 해.”
“그럴게.”
여전히 변함없는 단답이었지만 엘리나2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빙의한 자신을 친자매처럼 여겨주는 엘리나3이 어찌 고맙지 않을까. 검술 대회 시작까지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았지만 엘리나2는 잠기운을 떨쳐내고 준비에 들어갔다.
‘아주 서프라이즈한 응원을 준비하는 거야!’
체육 대회만 하면 응원상을 휩쓸었던 과거의 이력을 떠올리며 엘리나2는 활짝 웃었다.
한편, 슈모르드 가문의 친남매는 조금 달랐다.
“…야! 라라 슈모르드!”
“으음… 뭐야.”
쾅, 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라라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흐트러진 짧은 코랄빛 머리가 자신의 시야를 점령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기사복을 차려입은 오빠 로렌스가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안 깨웠냐.”
“…나한테 언제 깨워달라고 그랬어.”
“깨웠어야지. 아나 진짜, 그걸 말해줘야 아냐? 너 때문에 검술 대회 늦게 생겼잖아. 어떻게 책임질 건데?”
라라로서는 친오빠의 탈을 쓴 웬수가 아침부터 왜 저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취학 아동도 저러진 않을 텐데.
“그보다 오늘 검술 대회야?”
“어, 보러 오지 마라.”
“왜……?”
‘우리 라라는 예쁜 것만 봐야지. 너한테 피 튀기는 그런 과격한 장면을 보여줄 순 없어. 그러니까, 오빠랑 약속하는 거야, 오지 않기로?’
원래 오빠라면 이런 대답을 내놓았겠지만.
“니가 창피하니까. 창피하니까~ 창피하니까 오지 마라. 보러 오면 죽는다?”
“억지로 보라고 해도 안 봐!”
라라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사랑하는 오빠의 얼굴로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개썩을 호래자식이자 빌어먹을 새끼. 한동안 조그맣게 욕을 씨불이던 라라는 기가 막힌 생각에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 새끼 내가 남장할 때는 또 태도가 다르지?’
오래간만에 남장 기사 라안이 되어볼까. 승진 시험에서 광탈한 덕에 검술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하지만 같은 기사이기 때문에 대기실 정도는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엘리나3도 응원할 겸 복수를 실행하기로 결심한 라라였다.
엘리나3은 홀로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의자 옆에 세워둔 검자루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검 손잡이를 힘껏 붙잡았다. 뜨거운 열기가 심장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마검.”
“마, 와 그라노? …아니, 왜 그러지.”
“약속 지키라고. 이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면 내게서 떨어지는 거다. 더 이상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제법 우승에 자신이 있나 보군. 좋다. 약속하지.”
마검은 사악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검이 되면 몸값이 미칠 듯이 오를 게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갑부 주인에게 팔려 가 매일 좋은 기름칠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한마디로 팔자 펴는 것이다.
“우후후훗…….”
무슨 악랄한 속셈을 품은 건가. 엘리나3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번뜩이는 마검의 날이 불길하다는 양 검집 속에 집어넣었다.
똑똑똑―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에 엘리나3은 검집을 허리춤에 걸고 문으로 걸어갔다.
“누구시죠.”
“나야, 에드가3.”
“로렌스 경?”
“에드가3,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널 꺾어주마.”
엘리나3이 문을 열자마자 면전에다 대고 한다는 소리가 이것이었다. 엘리나3은 라라와 쏙 닮은 코랄빛 머리의 사내를 한번 슥 훑고서는 관심 없다는 듯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시냐! 이봐!”
로렌스는 성큼 안으로 따라 들어서며 엘리나3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순간 로렌스의 몸이 반 정도 붕 뜨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다른 사람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닙니다, 로렌스 경.”
“…….”
어지럽게 흐트러진 코랄색 머리칼 너머로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로렌스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상체를 세웠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 학……!”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기실 안으로 정신없이 뛰어 들어온 건장한 사내가 로렌스의 몸을 짓밟고 지나갔다. 길가에 짓밟힌 잡초때기처럼 힘없이 누워있는 로렌스는 아랑곳 않고 사내는 폴짝 뛰어 엘리나3을 안았다.
“엘리나3! 오늘 검술 대회 힘내셔야 됩니다. 지켜보겠습니다.”
“고마워, 크리온.”
“뭘요, 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크리온의 혀는 방정맞게 엘리나3의 턱 주변을 핥고 있었다. 엘리나3은 특유의 차가운 무표정으로 질색하며 부담스러운 그를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렸다.
“그보다 일은 어쩌고 여기 있는 거야?”
“폐하께서 검술 대회를 보러 오셔서 따라온 거예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간식 줄 테니까 관람하는 내내 얌전히 있기로 약속해.”
“정말입니까? 얌전히 있겠습니다.”
휘둘러지는 검을 보고 흥분해서 날뛰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으나 간식 하나로 해결 가능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