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라라가 굳어있는 동안 페레우스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뱀처럼 요염하게 눈을 내리떴다.
“인간 계집, 감히 이 몸을 깨우다니.”
턱이 잡혔다. 항상 고객을 우선시했던 친절하고 성실하던 그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뜻밖의 행동이었다. 이번에는 강렬한 오글거림으로 고객 감동 실현에 앞장서는 것일까.
“페레우스 씨, 저예요. 저 기억 안 나세요?”
“내가 잠든 천 년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나를 기억하는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을 리 없을 텐데……. 계집, 넌 정체가 뭐지?”
‘천 년이나 처잤어?’
라라는 다른 의미로 흠칫 놀라며 붙잡힌 턱을 빼고 뒤로 물러섰다. 하나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는 페레우스에게 얼마 못 가 손목을 잡혀버렸다. 우악스러운 힘은 가는 손목이 끊어져라 죄어왔다.
“…읏, 아파요.”
“인간 계집, 날 봐라. 넌 대체 뭐지?”
“라라 슈모르드요. 정말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 얼굴… 어딘가 낯이 익군.”
페레우스는 집요한 눈길로 라라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내리깔아진 눈동자는 점차 붉은빛에서 탁한 자줏빛으로 변해가더니 어느새 검게 물들여졌다.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페레우스의 눈매가 여유롭게 벌어졌다.
“그래― 그렇군. 천계와 마계, 그 둘 사이를 잇는 지상에서 벌어진 제1차 혼돈 전쟁에서 대천사 놈의 기습 공격을 받고 땅으로 추락한 이 나를 발견하고 치료해 주었던 인간 계집…….”
“아니요.”
“아아― 생각났군. 마계의 차원으로 잘못 휩쓸려 와 마왕의 성 침실에 겁 없이 발을 들였던 그 인간 계집…….”
“아니요.”
“알 수 없는 계집이군. 하지만 나쁘지 않아.”
길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페레우스는 순식간에 라라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바짝 좁혀진 두 사람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오랜 세월 동안 굶주려 온 이 나의 갈증을 풀어다오.”
새까만 눈동자처럼 다분히 검은 의도를 품고 페레우스는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라라는 숨을 멈췄다. 천 년간 잤다고 했으니 분명 입에서 단내가 쩔 것이다. 퇴폐적인 붉은 색감의 입술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화학 무기를 보유한 군사 기지였다.
고개를 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라라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페레우스가 가볍게 손목을 휘어잡아 그녀를 침대 위에 무너뜨렸다. 꼼짝없이 밑에 누운 여인을 내려다보며 그는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어둠 속에 묻힌 눈동자 위로 매혹적인 붉은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페레우스는 얕게 떨리는 라라의 어깨를 내려다본 후 더욱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떨고 있군, 인간 계집. 이 내게 몸을 맡겨라.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최상의 환락을 선물해 주지.”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당장 아가씨에게서 떨어져!”
급히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들고 온 모니카가 그대로 페레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페레우스가 미처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프라이팬의 모서리 부분이 뒤통수를 정통으로 내리찧었다.
털썩, 앞으로 허물어진 마족의 시신을 피해 침대에서 내려온 라라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몸을 덜덜 떨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모니카… 이거 위험하지 않아?”
“세상에! 위자보드가 이렇게 위험한 게임이었다니!”
“아니, 네가 제일 위험해.”
라라는 침대 위에 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남자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길게 풀어 헤쳐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흘러내린 녹색 피가 침대 시트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라라와 모니카는 불안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모니카는 마침내 결심한 듯 녹색 피가 묻은 프라이팬을 침대 아래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페레우스의 발목을 잡아당겨 바닥으로 끌어 내린 후 마찬가지로 침대 아래에 구겨 넣고서 시트로 덮어 가렸다.
“이것들과 함께 숨겨놓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저기 모니카……? 왜 찝찝하게 내 침대 밑에다 숨기는데.”
라라는 다른 데다 숨기라며 모니카를 설득했다. 방 안을 서성이며 긴 생각에 잠겨있던 모니카는 두 손을 소리 나게 맞부딪친 후 말했다.
“아가씨, 저희 알리바이를 만들어요!”
“알리바이라니?”
“저만 믿으시고 다시 위자보드를 꺼내 보세요.”
모니카의 계획에 맞춰 두 사람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라라가 위자보드를 다시 꺼내 세팅하는 동안 모니카는 방 한가운데에 촛불 세 개를 켜두었다. 눈 깜짝할 새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가씨?”
“잘될까. 나 불안해, 모니카.”
“마음 굳게 드셔야 해요.”
“응, 알겠어…….”
마주 보고 앉은 암울한 얼굴의 두 사람은 위자보드를 시작했다. 5분 정도 포인터를 움직이며 질문을 던졌을까, 후르륵 하고 촛불 하나가 흔들렸다.
“지금 여기에 와줄 수 있나요?”
[Yes]
포인터가 완전히 [Yes] 쪽으로 기울자 라라와 모니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거친 폭풍처럼 바람이 휘몰아치고 꺼진 촛불 사이로 새까만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나를 부른 자가… 크를르… 누구냐.”
찢어진 망토를 걸치고 낫을 든 사악한 악령은 자신을 소환해 낸 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입가에서 독약처럼 까만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돌아다니던 악령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악령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축축하고 차가운 것이 발끝에 만져졌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크르를……? 뭐지, 이건…….”
꺼진 촛불 하나를 다시 되살리고 아래를 확인한 악령은 그만 낫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방바닥에 고인 녹색 피 웅덩이에 낫이 적셔졌으나 그걸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다리의 힘이 절로 풀렸다.
“…허, 헉… 히익!”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는 검은 머리 마족의 몸뚱이였다. 악령은 주저앉은 채 벌벌 떨다가 뒤돌아 도망치려 했으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인영이 있었다.
“위자보드로 신고 접수받고 왔습니다.”
“…다, 당신은 누구…….”
“마족 형사입니다. 그보다 당신 뒤에 뭘 숨기는……. 아니, 저건 시체잖아? 이 새끼 잡아!”
마족 형사의 부하들이 몸을 날려 악령을 현장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악령은 곧바로 서로 끌려갔으나 자신이 죽인 게 아니며, 되레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실 안에 단둘이 있었던 점, 용의자의 흉기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혈흔 등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악령이 가장 유력한 가해자일 수밖에 없었다.
사흘간의 지독한 심문이 이어지는 동안 마족 형사는 살인 현장에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며 진범을 가려내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목격자를 찾기 위해 살인이 벌어진 저택에서 사는 거주자를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마족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피해자 페레우스 슈란 엑사이오스와는 평소 어떤 사이이십니까.”
“저희 아가씨 위자보드로 몇 번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예요.”
“혹시 사흘 전 밤에 무얼 하셨습니까?”
“저는 저희 아가씨랑 같이 그 시간에 요리를 하고 있었어요. 다른 동료 시녀들도 알 거예요. 다 같이 부엌에 있었거든요. 그보다 무슨 일인가요? 피해자라니…….”
“아직 못 들으셨나 보군요. 페레우스 슈란 엑사이오스 씨가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그 성실한 친구가! 신께서도 참 너무 가혹하시군요. 세상이 너무 흉흉하네요.”
“아무튼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 잘 잠그시고, 모쪼록 인간 아가씨들도 조심하십시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모니카는 그를 배웅하며 방문을 닫았다. 모든 상황을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라라는 슬슬 모니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페레우스 슈란 엑사이오스는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다. 어딘지 모를 좁고 딱딱한 공간 속에 자신은 반듯이 누워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뒤통수가 깨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왜 이렇게 아픈 것인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뒤늦게 자신의 뒤통수를 갈긴 누군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뿌연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마지막 기억 속 모습은 희미하기만 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마왕님! 어쩌다가!!”
“천 살밖에 안 된 우리 마왕님… 끄흑, 꽃다운 나이에 가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꺼흐흑.”
“마왕님… 부디 좋은 곳에 가셔야 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제법 소란스러운 울음소리였다. 페레우스는 두 팔을 들어 자신의 몸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을 힘껏 들어 올렸다. 빛을 받은 먼지가 눈처럼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관 뚜껑이 열리고 나타난 길쭉한 인영에 드넓은 마왕성 안을 채우고 있던 마족들이 일제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마, 마왕님이… 부활하셨다!”
한 마족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페레우스가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 서있자 곧 마족 하나가 뛰어와 그의 몸을 부축했다.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큭, 몸 상태가 아주 나쁜 건 아닌 것 같군. 오히려 이 차가운 피부 아래서 들끓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이 피가, 생명력이, 심장이, 맥박이 요동치고 있어…….”
“역시… 완전히 깨어나신 게 맞으시군요.”
검은 오라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중2병 대사에 모든 마족들이 감탄하며 무릎을 꿇었다. 우러러보는 시선에도 페레우스는 당연하단 듯이 날렵한 턱을 쳐들고 있을 뿐이었다. 겸손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오만한 눈빛이었다.
“천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잠든 지 천 년이 흐르고 나서 보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천계의 움직임은?”
“만약 있었다면 저희가 먼저 마왕님을 깨웠을 겁니다. 물론 내면에 잠든 마왕님의 영혼을 말입니다.”
그렇다. 천 년간 잠든 것은 마왕의 육체가 아닌 그의 몸속에 잠든 영혼이었다. 이제까지 천 년 동안 성실하게 마왕성에서 근무했던 ‘페레우스’도 마왕 그 자신이 맞지만 진정한 마왕이라 하기엔 어렵다.
마왕은 그 어떤 쪽팔림도 느낄 수 없는 견고한 영혼의 소유자여야 했다. 그 어떤 항마력도 뛰어넘는, 강력한 중2가 근간이 되는 영혼이.
“오랜만에 이 육체를 사용하려 하니 피곤하군. 하지만 몸은 주인을 기억하는 법이란 건가, 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