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엑스트라인 네가 그렇게 부정한다 한들… 클리셰, 즉 운명의 굴레에 따라 모두가 빙의된 새 엘리나2를 좋아하게 될 것이니라. 그것이 빙의 여주의 클리셰니까.>
이야기는 폭풍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라라가 방에 틀어박혀 김빙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동안 김빙의는 정석대로 남주들을 만나고 다녔다. 물론 남주를 만나겠다는 목적을 품고 만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 왔으니 대신전이나 황성 같은 판타지 장소가 궁금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나2는 관광지에 들렀다가 누군가는 평생 보기조차 힘들다는 교황과 황제를 기다렸다는 듯 맞닥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남주 다 바쁜 탓에 엘리나2와 가벼운 인사말밖에 나누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그녀가 달라졌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마에다 ‘영혼이 달라졌어요’를 대문짝만 하게 써 붙여놓지 않는 이상 영영 못 알아차릴 둔감함이었다.
“하이루~ 다녀왔어요.”
김빙의, 아니 엘리나2는 공작저에 들어서며 문 앞에 늘어서 있는 고용인들에게 인사했다. 원래도 인사를 해주긴 했지만 손을 흔들거나 지나가면서 일일이 손을 맞대는 행위는 하지 않았었다. 어딘가 달라진 엘리나2를 담은 고용인들의 눈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던 엘리나2는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공작 부인과 마주쳤다.
“엘리나2, 행동을 조신히 하라고 여러 번 말했잖니? 그게 무슨 품위 없는 행동이니?”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엘리나2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태가 이상하다고는 들었으나 낯선 상대를 대하는 듯한 딸의 인사에 공작 부인은 당혹스러워했다.
“이 어미가… 기억나지 않는 거니? 정녕…….”
공작 부인의 충격을 받은 얼굴에 엘리나2는 갑자기 집에 있을 엄마가 생각났다. 분명 자신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저런 표정을 짓고 계실 것이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장난 좀 쳐봤어요, 어머니.”
공작 부인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으며 엘리나2가 배시시 웃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모습에 공작 부인은 크게 안도했다. 그러곤 품위 없이 굴어도 괜찮으니 앞으로는 그런 장난은 절대 치지 말라며 여러 번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그럼 이제 쉬려무나.”
방 앞까지 데려다준 공작 부인이 그렇게 얘기하며 먼저 몸을 돌렸다. 엘리나2는 멀어져 가는 공작 부인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방문을 열었다.
“휴…….”
문을 닫고 이제 막 침실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넌 역시, 엘리나2가 아니지?”
단호한 목소리에 엘리나2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 은색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자신’과 똑같은 생김새의 여자가 시린 은색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어. 네가 잠들어 있을 때 엘리나5가 다녀갔었어. 너의 영혼의 파장이 달라졌다고 말하더군.”
이미 모든 걸 눈치챈 상태인 것 같았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엘리나2, 아니 김빙의는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엘리나3이지? 맞아, 난 엘리나2가 아니야.”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려는 건가. 엘리나3이 허리춤에 건 검을 뽑으려 할 때였다. 엘리나2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이름은 김빙의.”
“기므빙으……?”
“김빙의.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이 몸에 들어오기 전까진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이었어…….”
이야기는 계속해서 길게 이어졌다. 엘리나2의 말에 엘리나3은 처음엔 의심스러운 반응을 내놓다가 점점 그녀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진실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편의점 사장이 세 달 동안 알바비를 안 준 거 있지? 내가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려고 마음먹기 딱 이틀 전에 5백 원짜리 섞어서 주더라! 글구 진상 짓 하는 인간들 꼭 있다? 그중 최악인 건 술 취해서 행패 부리는 놈들! 하, 생각하니까 열받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엔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얕은 살기가 느껴졌다. 생활에서 밴 일상 살기였다.
“그래서 공녀의 몸에 들어와서 너무 다행인 것 같아. 알바를 안 할 수 있다니 말이야! 만약 노예 몸에 들어왔으면 으, 진짜 자살했을 듯.”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엘리나3은 무거운 어투로 말했다. 이에 엘리나2, 아니 김빙의는 “미안…….” 하고 솔직하게 사과의 말을 이었다.
“헤헷, 그래도 이 몸 주인은 좋겠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너.”
엘리나3의 눈길이 닿자 엘리나2는 배시시 웃어버렸다. 정말 부러워하는 눈을 하고서 말이다. 그런 엘리나2에게 엘리나3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아주 살짝 밖으로 나온 검을 소리 없이 검집 속으로 밀어 넣고 엘리나3은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완전히 밖으로 나가기 전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엘리나2의 영혼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편하게 생활하면 돼.”
“…음, 정말? 정말 그래도 돼?”
“나도 널 가족으로 생각할 테니까 너도 그러라고.”
시크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김빙의가 아니었다.
엘리나2와 엘리나3의 관계는 그로부터 눈에 띄게 부쩍 가까워져 갔다. 공작저의 사람이 아닌 제삼자가 봐도 눈치챌 만큼 말이다.
‘그 시크한 엘리나3까지 빙의한 엘리나2를 받아들이다니…….’
라라는 상황이 점점 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음에 좌절했다. 클리셰대로 가는 일은 오빠를 구할 수 있는 일에 가까워지고 있단 걸 의미함으로 기쁜 일이지만 그렇다고 엘리나2의 몸을 다른 혼이 차지할 수 있게 둘 순 없었다.
‘친구냐, 오빠냐, 그것이 문제로다…….’
물론 이제까지 라라가 마냥 손만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 나름대로 방법을 수소문했었다.
미하일에게도 혹시나 싶어 슬며시 떠보았지만 구마 의식 같은 것은 일체 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었다. 애당초 엘리나2가 뭐가 달라졌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엘리나5는 되레 갈 곳을 잃은 그녀의 영혼이 가엾다며 엘리나2를 방치 상태로 두자는 입장인 것 같았다.
‘조금 오컬트한 쪽에 문의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깊이 생각에 잠겨있던 라라는 아하 하고 손뼉을 쳤다. 사람의 영혼을 탐낸다는 마족이라면 영혼 분야에 빠삭하지 않을까.
‘마족을 불러내는 방법만 알면…….’
마족을 불러내는 금기의 마도서를 어쩌면 황궁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라라는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해 질 무렵이 될 때까지 라라는 황궁도서관에 진열돼 있는 책이란 책은 다 뒤지고 다녔다. 작은 실마리라도 건지기 위해 밤이 늦도록 조사에 임했으나 결국 황궁도서관 폐관 시간에 맞춰 가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라라는 허탈감에 쉬이 잠이 들 수 없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전속 시녀 모니카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나 모니카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라라는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좀 마족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였지……. 아, 맞아! 남주 중에 마왕이 하나 있었어. 마왕 같진 않지만 분명 마왕직을 했었다고…….’
“무슨 고민 있으세요?”
흠칫, 어깨를 떤 라라는 그제야 옆을 돌아보았다. 따스한 우유가 담긴 잔을 손에 쥐여주고서 모니카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라라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다가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켜고 마음이 진정되자 그제야 순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모니카. …혹시 마족을 불러내는 방법을 아니?”
“음, 아가씨 침대 밑에 있는 위자보드를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건 유령과 대화하는 놀이 도구잖아?”
“그렇긴 하지만 정말 대화에서 그치는 경우는 없어요. 말을 안 듣고 혼자 하다가 나쁜 악령을 불러내서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리죠. 아가씨는 호기심이 많은 편은 아니시니 엉뚱한 짓을 하시진 않으시겠죠?”
모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손수 침대 밑에서 위자보드를 꺼내주었다. 찝찝하게 왜 이런 걸 침대 밑에 숨겨둔 건진 몰라도 라라는 어쩌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 작업은 수월했다. 야심한 시각 라라는 방의 조명을 끄고 촛불 하나만 달랑 켜둔 채 위자보드 앞에 앉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굵은 소금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위자보드의 커버를 벗기자 가장 먼저 붉은 글씨의 경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절대 혼자서 하지 말 것.]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라라는 서서히 포인터를 움직였다. 철자가 새겨진 나무 보드 위에서 동그랗게 파인 포인터가 왔다 갔다 움직이며 문장을 만들어 내었다.
“저기 누구 오셨나요? 대답해 주세요.”
한 5분 정도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을 때였다. 유령이 들어온 것인지 갑작스레 포인터가 혼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에… 오셨나요?”
촛불이 한번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꺼지지 않아 안도할 때 라라는 그만 보고 말았다. 포인터가 멈춘 자리에는 [Yes]가 있었다. 라라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나 애써 집중한 채 질문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마족인가요?”
[Yes]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천천히 철자를 따라 움직이는 포인터를 눈으로 좇으며 라라는 따라 읽어 내려갔다.
“페레우스 슈란 엑사이오스…….”
쓸데없이 길었지만 그토록 찾던 마족과 연결됐음에 라라는 가슴이 다 후련할 정도였다.
“지금 제 앞에 나와 줄 수 있나요?”
포인터가 [Yes]를 가리키기 무섭게 엄청난 돌풍이 방 안에서 휘몰아쳐졌다. 안에서 분 바람으로 인해 창문이 열려 덜컹거릴 지경이었다. 라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웅크리고 있다가 뒤늦게 방 안이 잠잠해지자 눈을 떴다.
엉망이 된 방 한복판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잔잔한 어둠의 자락과도 같은 흑발을 길게 드리운 그가 서서히 눈을 내리떴다. 피맺힌 새빨간 눈동자가 낮고 소름 끼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깊은 잠에 취해있던 이 몸을 깨워 이곳으로 불러낸 자가, 인간 계집 너냐.”
평소와는 다른 말투, 눈빛, 그리고 쪽팔림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당찬 분위기.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