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일곱 시간 정도밖에 기절하지 않았다고 해도 너도 안정을 취해야 되지 않나. 일단은 쉬는 게 좋을 거 같다.”
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인간 마차에서 떨어지던 엘리나2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해 쉬이 잠이 들 수 없었다.
* * *
엘리나2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라라는 그녀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향했다.
도착한 라라를 반긴 것은 때맞춰 나온 크리온이었다. 신사적인 몸짓으로 고개를 숙인 그는 라라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서 안으로 안내했다.
라라는 어느 방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크리온은 손톱을 세워 문을 긁다가 뒤늦게 문고리를 발견하고는 툭툭 치기 시작했다. 쳐대는 손길에 문고리가 순간적으로 기우뚱 기울어지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왠지 ‘굿 보이!’ 하고 큰 소리로 그의 영민함을 칭찬해 주어야 될 것 같았지만 라라는 조용히 크리온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늦게 나타난 침대 위에는 엘리나2가 엎드린 채 누워있었다. 엘리나2는 무려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만화책이었지만, 독서에 푹 빠져있던 엘리나2가 뒤늦게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아, 하이루.”
“…하이, 뭐?”
괜찮은 건지 몸 상태에 대해 물어보려 했던 라라는 당혹감에 슬며시 입술을 다물었다.
“하이루 몰라요? 아, 저랑 친구죠? 방가방가! 말 놓는다? 그보다 이 세계에도 만화책이 있을 줄이야 핵꿀잼~”
“…….”
라라는 다시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상태가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저기 크리온 씨, 엘리나2는 대체…….”
“눈치채셨군요. 사실 눈을 뜨고 난 후부터 계속 이래요. 자신이 엘리나2 공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평범한 대학생 김빙의라고…….”
“평범이요……? 어디가요? 이름부터가 비범하게 느껴지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지만, 엘리나2의 상태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그가 말하기를, 엘리나2는 기억을 완전히 잃은 상태라고 했다. 라라가 심각한 얼굴로 굳어있을 때 상황과 반대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대세 중의 대세는 차원 이동 빙의물이라니! 바른 클리셰의 길을 걷고 있느니라. 오, 신께서 이 소설을 지켜주고 계시는 게 분명해.>
‘그쪽이 신인데요……. 그보다 차원 이동 빙의물이라니, 그게 대체 뭐예요?’
<쯧쯧, 그것도 모르느냐? 여주 몸에 차원 이동한 영혼이 들어오는 것을 말하느니라.>
신의 말인즉, 엘리나2의 육체에 다른 영혼이 씌었다는 것 같았다.
‘세상에나……. 그럼 이제 엑소시즘을 해야 하는 건가요?’
<다 된 밥에 재 뿌릴 일 있느냐!>
벼락처럼 호된 호통이었다. 라라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있자 곧 신의 자애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마차 사고를 당하고 일주일간 혼수상태였던 공녀의 몸에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이방인의 영혼이 들어오고.>
‘정확히는 인간 마차 사고지만요…….’
<달라진 공녀의 모습에 남주들이 하나둘 공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니라.>
‘말투 빼곤 성격 자체는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발랄한 엘리나2의 몸에 발랄한 영혼이 들어와서 그런지 그다지 영혼이 바뀐 티가 나진 않았다.
<쳇, 엘리나2가 못된 공녀였었어야 됐느니라. 그래야 그 갭 차이로 인해 지금 모습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게 아니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악성 루머를 퍼뜨려 엘리나2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엘리나2는 제 친구라고요. 비록 눈치 없고, 하는 짓은 쥐뿔도 없으면서 사고만 치고, 그렇다고 남주랑 이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볼 때마다 속 터지게 만드는 발암 민폐 여주지만, 그래도 제 소중한 친구라고요!’
<네가 더 너무한 것 같은데. 너 그동안 꽤 쌓였구나.>
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은 속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차원 이동 빙의물 로판들은 말이니라. 시작이 중요하느니라.>
‘시작이요?’
<그러하다. 빙의자는 일단 한번 죽고 다른 세계로 영혼만 넘어가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여기 부분이 특히 중요하느니라. 뻔하게 죽으면 사람들은 또 뻔하다고 안 보니 말이니라.>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주신께서는 되게 자본주의에 찌드신 것 같아요.’
<너처럼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자란 엑스트라 영애가 주신의 무거운 경제 사정을 알 리 있겠느냐.>
경제 사정을 운운하는 것부터가 제대로 돼먹은 신이 아닌 것 같지만. 암튼, 라라는 이어지는 신의 말을 경청했다.
<요새는 말이니라. 빙의 여주가 밤거리를 걷다 봉변을 당해서 차원 이동을 하는 게 유행인 것 같으니라. 예를 들어 교통사고라든지, 괴한에게 찔린다든지, 강에 빠진다든지 말이니라.>
‘아, 여러 종류가 있군요.’
<그래서 이왕 빙의된 거 프롤로그도 새로 써봤는데 한번 들어보겠느냐?>
자칭 평범한 대한민국 학생 김빙의의 죽음은 이러했다.
프롤로그
한밤중, 라면을 끓이던 김빙의는 갑작스럽게 걸려온 애인의 전화를 받았다.
‘빙의야, 할 말이 있어. 잠깐 나올 수 있을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자신이 보고 싶어진 걸까. 빙의는 의아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애인을 생각해 라면도 놔두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야심한 밤거리를 홀로 걷던 그녀의 눈에 가로등 아래 서있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반갑게 뛰어가려는 그때, 가로등 아래 서있는 그것이 움직였다.
가로등 불빛 속에 드러난 자는 애인이 아니었다. 탄 것처럼 까맣게 녹아내린 살가죽과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핏물이 흘러내리는 눈동자. 괴물과 눈이 마주친 순간 김빙의는 그게 뭔진 몰라도 살기 위해 달려야만 했다.
“허억… 허억……!”
삼선 슬리퍼도 던져둔 채 허겁지겁 골목을 벗어난 그 순간이었다.
빠아아앙―
요란하게 울리는 클랙슨에 고개를 돌린 김빙의는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승용차 한 대가 자신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운전석에 앉아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새하얀 날개를 보조석과 창문 밖까지 활짝 펼쳐놓고 있는 그 형상은 말 그대로 천사…….
“소녀여, 신의 명으로 데리러 왔다아아아!”
운전대를 쥔 대천사는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승용차가 김빙의를 들이박기 무섭게 김빙의의 가벼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차도 바깥의 강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김빙의는 강물 바닥으로 자꾸만 내려앉는 자신의 몸을 알아차렸다. 운도 지지리도 없구나 싶었다. 떠오르는 가족들의 모습, 어린 시절의 추억들, 그리고 집 앞에서 만나자던 애인…….
그 순간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벨에 김빙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살기 위해 두 팔다리를 힘껏 젓자 몸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물 밖으로 얼굴을 꺼낸 순간, 눈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손이 있었다.
“빙의야, 어서 잡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애인의 얼굴이 보였다. 김빙의는 애인의 팔에 매달려 간신히 다리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곧 뻗어져 온 다른 한 팔이 자신의 몸을 당겨 안아주었다. 든든한 가슴팍에 귀를 대자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어디 안 다쳤어?”
“고마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래,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 널 죽여야 하는 건 바로 나니까!”
김빙의는 자신을 밀친 두 팔을 공허하게 바라보며 차디찬 강물에 잠겼다. 믿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가 속으론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다니, 저번에 그한테 47억 채무 보증을 서달라고 한 뒤 잠적해서 그런가.
살기 위해 김빙의가 물 위로 다시 헤엄쳐 오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래에서 발을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이제까지 물속에 숨어있었던 건지 피부가 푸르뎅뎅했는데 김빙의는 그자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달 전부터 김빙의를 집요하게 스토킹을 했던 남자였다. 신고도 해봤지만 처벌 수위가 낮아 벌금을 무는 수준이었고, 그 뒤로 상황만 더욱 악화되어 버렸다. 살의를 드러낸 채 괴한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웅엉라아앙!”
물속이라 발음이 샜지만 입 모양을 봤을 때 ‘죽어라’인 것 같았다. 괴한이 휘두른 칼은 정확히 김빙의의 복부에 꽂혔다. 뱃가죽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가라앉는 자신의 몸과는 달리 괴한의 몸은 점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구나…….’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그때, 김빙의는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를 알아차렸다. 본능적으로 눈에 힘을 주자 김빙의의 충혈된 두 눈에서 빨간 레이저가 폭발하듯 쏘아져 나왔다.
그렇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김빙의의 부모님은 혹여라도 딸이 칼빵을 맞을 것을 우려해 딸아이의 배 속에다 레이저 기폭 장치를 달아두었는데, 괴한의 칼이 정확히 그 스위치를 건드린 것이다.
잔잔하던 강물 위로 솟구쳐 오른 붉은 레이저는 정확히 콘크리트 다리의 하단 부위에 맞았다. 서서히 다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로 기어오르던 괴한은 갑작스레 흔들리는 다리에 비명을 내지르다 부서져 내린 잔해를 맞고 강물 바닥에 가라앉았다.
김빙의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판타지 소설 속 세계였다. 그것도 공녀의 몸에 빙의된 채로. ―여기까지가 프롤로그이니라.>
‘뿌듯해하시는 것 같아 죄송한데, 진짜 별로예요…….’
솔직하게 평한 라라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살짝 다물려 있던 입술을 떼고선 마음속에 응어리진 말을 단호하게 뱉어냈다.
“아무리 빙의 여주를 찬성하셔도 전 이런 전개는 납득할 수 없어요. 엘리나2는 엘리나2예요! 이제 와서 다른 영혼에게 엘리나2를 빼앗길 순 없다구요!”
그렇게 외치고서 라라는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러 떠났다. 크리온만이 남아 '쟤 갑자기 왜 저러지?' 하는 씁쓸한 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