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맞는 말이었다. 라라가 그렇게 수긍할 때쯤 철썩, 하고 방 안을 울리는 작은 마찰음이 있었다.
라라와 카를라히가 동시에 놀라 그 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인형의 왼쪽 뺨에 가있던 엘리나1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졌다. 그녀는 되레 충격받은 얼굴로 인형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발갛게 물들기는커녕 약간은 단단한 재질의 인형의 뺨은 그대로였지만, 엘리나1은 죄책감에 찌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딸을 때렸다는 것에 더없이 가슴이 미어져 왔다.
“아… 내가… 내가… 무슨 짓을…….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 주렴…….”
그대로 문을 열고 뛰쳐나가 버리는 엘리나1을 라라는 허탈한 눈으로 좇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일만 키우고 가면 어떡해.’
라라는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귀신 씐 황녀 인형이 폭주할 것만 같았다.
“…슈모르드 양.”
“…아, 엘리나4?”
“잠깐 귀 좀…, 저 아이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예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엘리나4의 눈은 무언가 생각이 있는지 결연해 보였다. 역시 지적인 여주였다. 엘리나4는 잠시 황녀의 눈길을 끌어달라고 말했다. 사건은 여주가 해결하도록 두는 게 상책임을 잘 아는 라라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폭군의 딸이지만 나름 곱게 자랐던 황녀는 충격에 빠져있었다.
“엄마… 엄마가… 날… 때렸어…….”
“저, 저기.”
라라는 공중 부양을 하고 있는 심상치 않은 황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에 카를라히가 놀라 붙잡으려 했으나 그 전에 라라가 한발 더 다가서며 말했다.
“나… 너의 친부모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엄마를 찾았던 황녀이다 보니 이런 얘기를 해야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 다가가도 될까?”
황녀는 플라스틱이 비틀어지는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채 황녀에게 다가간 라라는 황녀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곤 인형 옷에 삐져나온 천 자락에 적힌 브랜드명을 확인했다.
“아, 마마 완구의 공장 사장님이 너를 태어나게 했…….”
소리조차 낼 틈 없이 라라는 반대편 벽으로 날아갔다.
“라라!”
카를라히가 다급하게 소파로 뛰어가 소파에 부딪쳐 쓰러져 누운 라라에게 다가갔다. 라라의 뺨을 잡고 눈을 떠보라고 외쳤으나 완전히 기절해 버린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맥박은 안정적이었다.
엑스트라의 희생이 돋보이는 이 장면을 여주가 놓칠 리 없었다.
“고마워요, 슈모르드 영애.”
그사이 근처에 있던 흰 분유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엘리나4가 몸을 일으켜 마법진에 시동을 걸었다.
카를라히는 눈을 키웠다. 엘리나4가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쓸데없이 대단하군……!”
공중에 떠있는 인형 하나 맞히겠다고 수십 개의 불덩이를 쏘아대는 엘리나4를 그는 진정으로 대단한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불타고 있는 방의 모습에 조용히 라라를 안아 들고 밖으로 피신했다.
뒤늦게 소란을 감지한 황실 기사들이 달려 나왔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라라를 한 기사에게 넘긴 카를라히는 곧바로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근위대장이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폐하! 위험하십니다.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아니, 그녀를 구하는 건 나다. 나여야만 한다.”
낮은 목소리로 강경하게 얘기한 후 다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 그는 누가 보아도 남주답게 간지 나 보였다. 이에 동조한 기사들이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카를라히를 시작으로 하나둘 저산소증에 의해 털썩털썩 쓰러져 갔다.
“…하여간 폭군답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군요.”
젖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가시지. 근위대장은 불타는 방 한가운데서 도미노처럼 쓰러져 있는 그들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이어 지원 요청을 하여 쓰러진 자들을 복도로 옮기고 화재 진압을 도왔다.
불이 꺼지고 회색 연기가 거둬진 방의 모습은 참혹했다. 방 안을 둘러보던 기사 하나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엘리나4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그녀를 안아 들어 밖으로 나왔다.
“공녀님은 무사합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황제의 상태를 확인하던 근위대장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까부터 황녀 전하가 보이지 않는다만……?”
근위대장은 곧바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절반이 타들어 간 벽 한가운데에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황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괴하게도 그을음은커녕 금발 머리칼 한 올조차 타지 않았다.
“황녀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근위대장은 황녀에게 손을 뻗었다. 한 팔에 안아 들어 모시고 나가는 중이었다. 황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미처 붙잡기도 전에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황녀의 플라스틱 머리가 목과 분리되었다.
“…황녀… 전하…?”
“…대장님께서 어째서…….”
“서, 설마… 대장님께서 황녀 전하를 시해하고 반역을 꾀하실 줄이야……!”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근위대장을 포위했다. 믿기지 않는지 하나같이 충격과 배신감으로 얼룩진 눈들이었다. 근위대장은 이제껏 자신을 믿고 따랐던 부하들의 원망 어린 눈에 당황하여 바로 몸을 숙여 황녀의 몸과 머리를 쥐었다.
“아… 험험, 이렇게 하면 붙지 않을까 싶은데……. 큼.”
아무리 목과 머리를 갖다 대어도 다시 붙질 않았다. X됐군. 근위대장의 머릿속에서 30년간 황실에 몸 바쳐 일해왔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려대는 근위대장을 향해 부하 기사들은 날 선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었다.
“…이제껏 당신의 등을 믿고 따랐건만……. 큿!”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입니까, 어째서!!”
“대답하시지 않겠다면, 이 손으로……! 크윽!”
스르릉, 하고 검을 뽑아 들어 제 목을 취하기 위해 달려드는 부하의 눈에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근위대장은 왠지 깔끔하게 목을 내줘야 될 것만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이 들었다. 간지를 위해 죽을 것인가,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집 가서 본드로 붙여 와보겠다고 해야 되는 것인가.
그때였다. 깔끔하게 부러진 황녀의 목 단면에서 검은 마력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제까지 텅 빈 몸 안을 채우고 있던 마력들은 곧 방 안을 한번 휘돌고서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흔적도 없이.
“…험, 지금 뭘 하고 있는……. 그보다 경, 지금 나한테 덤비겠다는 건가! 크흠!”
근위대장의 호통에 그제야 기사는 당장이라도 덤빌 것만 같은 제 자세를 알아차렸다.
“어, 어? 앗! 아닙니다! 아… 근데 제가 왜 검을 뽑고 있었던 거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아, 죄송합니다!”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기사를 뒤로하고 근위대장은 제 손에 들린 목이 부러진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그보다 이 인형은 뭐지?”
“여기는 그… 인형 창고였던 모양입니다. 왜 불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큰 피해는 입지 않아 다행이네요.”
근위대장은 왠지 모를 껄끄러운 기분에 목 없는 인형을 대충 집어 던져버렸다. 탄 물건들 위에 버려진 인형에게 어느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불과 3분 전만 해도 황녀라 불렀던 것을 전부 잊어버린 것처럼. 마치 잠시 귀신에 홀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이후로 인형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해진다.
9장 빙의물의 정석
라라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과 벽지가 보일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 살이었다. 뽀얀 햇살이 내려앉은 매끄러운 살 표면에 난 울퉁불퉁한 굳은살을 바라보다가 라라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약간 구린 냄새가 났다.
상체를 일으키자 그제야 침대 위에 얹어진 발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두 다리를 침대에 올려놓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는 남자는 깊게 잠든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호하다 지쳐 잠든 거…라고 하기엔 존나 편하게 발 뻗고 자고 있어…….’
검푸른 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이마빡을 한 대 갈길까 하다가 라라는 참았다. 대신 조용히 숨소리를 죽인 채 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잘생겼어…….’
역시 인성보다는 잘생긴 게 최고란 생각이 들었다. 빡쳐도 화가 가라앉는 걸 보면 말이다.
그때 페아의 곧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라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라라?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군…….”
“아, 네. 그보다 밤새 이러고 주무신 거예요?”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나 보군.”
“아니, 그냥 편하게 주무셨다고 하세요.”
졸아서 나올 자세가 아닌 것이다. 카를라히는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죽 그릇이 든 쟁반을 들었다. 뜻밖의 죽 그릇 출현에 라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난 거죠……? 여긴 어디고요?”
“황성 안의 객실이다. 네가 기절하고 대략 일곱 시간 정도 지난 것 같군.”
“그것밖에 안 됐어요……? 그럼 죽 그릇은 왜 갖다 놓으셨어요.”
“어젯밤에 야식으로 먹으려다가…….”
여주라면 기절도 한 일주일씩 해서 주위의 걱정을 사겠지만 엑스트라는 그런 것도 없나 보다. 라라는 납득하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제가 어제 왜 기절한 거죠?”
“불이 났었단 것만은 확실하다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 또한 모르는 일이다.”
“그렇군요. 담력 시험을 치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담력 시험 같은 걸 했을까요?”
<여름의 묘미 아니겠느냐. 왜 보통 일본 순정 만화에선 여주와 남주가 여름 합숙 캠프에 가서 담력 테스트도 하고 그러지 않느냐?>
뒤처리가 힘든 사건인 만큼 주신은 서둘러 이 일을 덮으려 들었다. 라라는 수긍하며 어젯밤을 회상하다가 엘리나2를 떠올렸다. 분명 기절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괜찮은 건지 걱정이 들었다.
“엘리나2는요?”
문을 나가려는 카를라히를 붙잡는 다급한 어조였다. 그는 라라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고 들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