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어머, 정말이니? 폐하를 가까이에서 만나 뵐 수 있는 기회잖아?”
웅성웅성, 정보를 나눠주기 위해 태어난 일회용 엑스트라들의 말에 라라는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황제 남주를 보게 될 기회가 생기다니, 엑스트라로서는 굉장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폐하께서…….”
“…폐하가 오시는구나.”
엘리나1과 엘리나4도 들었는지 둘 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11번, 113번, 114번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차례가 왔다. 엘리나1이 비장함에 타오르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한 채 먼저 면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라라가 들어섰다.
방 안 끝에 앉아있는 남자가 라라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무적으로 내리깔린 푸른 눈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직선상에 위치한 자신의 눈과 마주친 순간 크게 떠졌다.
‘아.’
숨이 턱 막혔다. 어째서 페아가 이곳에 있는 거지…….
‘폐하가 아니라 페아였나 보네.’
드디어 폐하의 용안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 알았는데, 라라는 약간의 아쉬움과 설레는 눈빛을 숨기며 면접 자리에 앉았다.
“흠.”
한편, 라라를 보고 놀랐던 카를라히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면접자로서 진지하게 면접을 진행했다.
“일단 황녀의 변덕이 심하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지. 그렇기에 황녀를 잠재울 수 있는 자장가를 연마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장가.”
엘리나1이 작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장가 한 소절씩 불러보도록.”
“……!”
“먼저 111번부터. 가능한가?”
이 자리에 선 순간부터 자신은 한 나라의 공녀가 아닌 111번의 번호표를 단 면접 응시자일 뿐이었다. 엘리나1은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이 새어 나오려는 두 손을 모으고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엘리나1의 입이 열렸다.
“…아아아 자장 자장…(심금을 울리는 맑고 구슬픈 노래)…자장 자장 아아아아…….”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천상의 노래가 아닌가 싶을 만큼 감동적인 노랫소리가 말이다. 어느새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눈을 감고 진지하게 그녀의 노래를 경청하고 있었다.
<여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느니라. 노래를 대단히 잘하거나, 대단히 못하거나. 음치 여주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되레 반전 매력이 된다지만.>
라라는 신의 목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엘리나1의 노랫소리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닌지 거만하게 앉아있던 페아는 어느새 얼굴을 모로 돌리고 있었다.
쓰읍, 하고 한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감정을 추스른 후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인정하지. 그대의 노래는 제법 쓸 만한 것 같군.”
“과찬이세요, 폐하.”
“그 자장가는 어디서 배운 거지? 두 살 때…, 어머니가 불러주셨던 자장가와 똑같았다.”
카를라히는 처음으로 무표정한 낯 위로 감정 한 조각을 드러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애증인지 서글픔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얼굴로 두 살 때 추억팔이를 하는 그에게 엘리나1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구라 치지 마세요.”
“들켰군. 사실 기억 안 난다.”
한동안 엘리나1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카를라히의 눈길이 엘리나4에게로 옮겨갔다. 엘리나4는 준비되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록 버전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록 버전 말인가?”
엘리나4는 대답 대신에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후, 하는 작은 숨소리와 함께 이 공간을 지배하는 투명한 목소리가 폭발했다.
“장가장가장가장가!! 지지지징 자자장가!! 자자자자자장―가!! 호우!”
라라는 순간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뭔가가 귀에 들어오긴 했는데 이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건 페아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짙게 깔린 가운데 페아가 두 손을 들어 느리게 박수를 쳤다.
“이것은… 완벽한 사이키델릭 록이군그래. 처음에는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브리티시 하드 록, 헤비메탈의 한 종류가 아닌가 싶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입으로 전자 악기를 흉내 낼 수 있다니 놀랍군. 그대의 스승은?”
“제 스승은 책 한 권입니다, 폐하.”
엘리나4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에 그녀를 담고 있던 카를라히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크게 떠졌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책으로 사이키델릭 록을 완벽히 독파했단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웬만한 사내들도 직접 현장에서 배워서 하지 못하는 일을 저 가녀린 영애가 해내었다고?’
카를라히는 진심으로 감탄에 차있었다.
‘터무니없는 천재를 황궁으로 보냈군, 리니엇 공작.’
뿌듯한 얼굴로 피식 웃고 마는 그를 보며 라라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앉아있다가 곧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서 긴장한 상태로 노래를 불렀다.
“자, 잘 자라― 우리 아악, 이.”
평범한 노래에, 전혀 웃기지도 귀엽지도 않는 일반인의 평범한 삑사리였다. 라라는 부끄러워하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엘리나1과 엘리나4가 어색함을 견디지 못할 때 딱 한 명만 흐뭇하게 입술을 휘고 있었다.
‘지인님 최고 귀여우시다…….’
부하 직원 크리온과 같으면서도 다른 귀여움이었다. 세상 그 어떤 현실 여자도 릴리카 짱을 능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덕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심장이 떨렸다. 무릎 위에 양 주먹만 꽉 말아 쥐고 있던 카를라히가 입술 선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흠, 흠. 113번 라라 슈모르드 합격.”
카를라히는 혹여나 낙하산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것을 우려해 바로 말을 덧붙였다.
“세 명 다 합격시키지. 엘리나1 지원자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황녀를 정화할 수, 아니 잠재울 수 있을 거라 판단해서이다. 엘리나4 지원자는 잠든 사람도 깨울 것 같지만 음악성이 뛰어난 점을 생각하면 놓칠 수 없는 인재다. 마지막으로 라라 지원자는 비록 남들보다 음악성은 뒤떨어지나 나의 마음을 울렸다.”
납득할 만한 주관적인 심사평을 내놓고서 카를라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은 지금 바로 나를 따라오도록.”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황성의 어느 방이었다. 폭군의 딸로 태어난 이상 대접이 좋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의 관심 밖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성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방이었다.
오르골 장난감이 돌아가는 소리와 음침한 냉기가 피어오르는 방 안은 조금 기괴하기까지 했는데, 라라는 무의식중에 팔등을 문질렀다. 그러다 끊긴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문지방을 넘지 않고 딴청을 부리고 있는 페아가 보였다.
“페아는 같이 안 들어가세요?”
“…아, 나는, 그…….”
카를라히가 적당히 둘러댈 거리를 생각하기도 전에 강한 바람이 불어닥쳐 와 그를 방 안으로 밀어뜨렸다. 동시에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오, 하느님아버지부처님 제발…….”
카를라히가 갑자기 손을 모은 채 중얼거리는 것을 본 라라는 알 수 없는 섬뜩한 기분에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방 중앙 아기 침대 위에 걸려있는 모빌이 오르골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형?’
두 걸음 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침대 안에 놓여있는 인형이 보였다. 라라가 경계를 풀고서 인형에게 다가가려 할 때 커다란 손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안 된다! 다가가서는…….”
그때였다. 오르골의 소리가 뚝 끊겼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모빌도 마치 누가 강제로 붙잡아 놓은 것처럼 멈췄다. 천장을 향해 퍼런 눈깔을 치뜨고 있던 인형이 라라를 향해 눈동자를 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얼음물을 끼얹은 듯 방 안은 섬뜩한 공포로 물들었다.
“엄마를, 데려왔구나?”
인형의 플라스틱 입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복화술처럼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나4는 기절할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기어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얼어붙어 있는 그녀를 대신해 그 옆에 서있던 엘리나1이 두 팔을 활짝 뻗었다.
“맞아, 오늘부로 너의 어머니란다.”
‘…안 놀라? 인형이 말하고 있는데?’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모성애 넘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여주 엘리나1이 진정으로 대단해 보였다.
“…엄마?”
“응, 엄마야.”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벌써부터 엄마 행세를 하기 시작하는 엘리나1을 보며 라라와 카를라히는 진심으로 놀라했다. 모성애가 아니라 저 정도면 정신병 아닐까.
“엄마라고 불러주면 난 기쁠 거야.”
“거짓말.”
다행히 인형은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이 가능한 지능형 인형인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너와 나는 피 한 방울 이어져 있지 않은 남남이잖아?”
“그건 나와도 마찬가지다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카를라히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벌써부터 될성부른 황녀는 아버지의 말에 귓구멍을 막고 있었다. 진짜 플라스틱이라 막혀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딸처럼 대해주겠지. 하지만 너도 진짜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날 소외시킬 거잖아. 아버지한테 잘 보이기 위해 나에게 잘 대해주려는 거면…….”
“…아니야.”
엘리나1이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긴 은빛 머리칼이 그녀의 허리 위에서 출렁거렸다. 진심이 담긴 애절한 눈빛이 통한 건지 인형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말없이 경청하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너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는 피가 이어져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이곳에 들어온 순간 어머니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진심으로 널 나의 딸이라 생각하고 있어. 물론 너는 나를 받아들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린 잘 맞을 것 같아. 응, 그럴 거야.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너처럼 예쁜 딸이 생겨서 너무 기쁜 걸…….”
“아나, 말 존나 많아.”
“엄마가 말하는데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내가 널 이렇게 키웠니!”
“엄마가 뭔데! 나한테 뭘 해준 게 있어, 오늘 처음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