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지금부터 담력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시작점부터 종점까지 모든 코스를 통과하셔야 합격입니다.]
“응?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엘리나2가 투덜거리기도 전에 조명이 모두 꺼져 저택 세트장 전체가 암전이 되었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적응하자 그제야 네 사람은 빛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시작점의 방문을 열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안은 칠흑과도 같았는데 아까 방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그냥 다시 들어갈까……? 저기, 엘리나2? 엘리나1……?”
라라는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을 간절히 응시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라라는 숨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달팽이관을 두드리는 심장 박동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발소리보다도 더 컸다. 그러나 곧 형세가 역전되어 발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듯 생생해졌다. 아니, 실제로도 코앞이었다.
라라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구석 벽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스윽 얼굴을 내미는 자는 전체적으로 음영이 져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 같았다. 이윽고 그 뒤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자세히 보니 앞에서 걸어오는 남자도 목이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꺄흐읅!! 꺄알아ㅣ랑ㄱ아락!!”
실신 직전에 놓인 사람처럼 라라는 숨넘어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흉한 표정의 라라와는 달리 엘리나1은 눈물을 소리 없이 뚝뚝 떨어뜨렸다. 엘리나4는 얼어버린 것인지 책만 끌어안고 있었고, 엘리나2는 답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목이 돌아간 남자가 맨 왼쪽에 서있던 엘리나1에게 달려들었다. 강한 손아귀에 꼼짝없이 팔을 붙잡힌 순간 엘리나1은 억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
“읏……!”
눈물이 후드득 바닥을 적셨다. 이에 목이 돌아간 남자는 흠칫하고 쥐고 있던 팔을 놓았다. 엘리나1은 발갛게 손자국이 난 팔을 한 손으로 가리고는 남자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까지… 단둘이 같이 계신 거군요…….”
엘리나1의 시선이 남자의 어깨 너머에 서있는 머리 없는 인간에게로 향했다. 머리가 없어도 같은 여자로서 알 수 있었다. 몸에 분명 가슴이 달려있었다.
“더 이상 추하게… 두 사람 관계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 붙잡으려 드는 손길에 엘리나1은 거세게 반항하며 말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알고 있었어요. 목 없는 여자가 더 취향이라는 거…, 목 있는 저 같은 건 눈에 차지 않는다는 것도요.”
가슴이 아팠다. 엘리나1은 이토록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못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늘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목이 있어도… 당신을 좋아하고 싶었……. 흐윽.”
힘겹게 말을 잇는 엘리나1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뒤늦게 목 돌아간 사내의 손이 뻗어져 와 눈물길이 생겨난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엘리나1의 긴 속눈썹이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
이 틈을 타 라라는 엘리나4와 엘리나2와 함께 조용히 그곳을 벗어났다. 뭐가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한 고비를 넘겼다고 안도하려던 찰나였다. 엘리나4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요?”
라라는 조금 걱정되어 뒤를 돌아 물었다. 혹시 무서워서 그러는 거냐고 묻자 엘리나4는 무덤덤한 태도로 대꾸했다.
“귀신같이 실체가 없는 것을 믿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에요. 실제로 어느 심령 연구가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결국 귀신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밝혔었죠.”
지극히 논리적이고 침착한 어투였다. 한 팔로 두꺼운 책을 끌어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엘리나4를 보며 라라는 그녀가 더 이상 이런 바보 같은 담력 테스트에 어울려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저랑 엘리나2 먼저 갈게요. 혹시라도 마음 바뀌시면 늦어도 좋으니까 통과 지점까지 와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고 막 말을 꺼내려는데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붙잡는 손이 있었다. 라라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엘리나4가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도 얕게 떨리는 손으로.
“…저기요?”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라라 양. 저는 다만 이런 것을 무서워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얘기한 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요. 지금 다리에 쥐가 나서 잘 못 걷겠다는 거예요.”
태연하게 얘기하는 것치곤 시선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때, 아무것도 없는 복도 천장에서 실감 나는 귀신 비명 사운드가 울렸다.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라라가 움칫하고 위를 쳐다보고, 엘리나2가 히익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음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라라는 엘리나4가 너무나도 조용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가 닿은 그곳에는 얼음처럼 굳어버린 엘리나4만 서있을 뿐이었다. 파랗게 질린 안색부터가 누가 봐도 쫀 사람의 얼굴이었다.
“저 혹시 무서우신 거면…….”
“그런 식으로 남을 의심하는 건 좋지 못해요. 심리학적으로 남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사람을 편집성 인격 장애라 부르죠. 편집성 인격 장애의 원인은 어릴 적 부모로부터 학대적인 양육을 받거나…(중략)…결론은 제가 쥐가 나서 걷질 못하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얌전하게 책만 읽기에 성격도 얌전한 줄 알았다면 오산이니라. 자존심 강하고 솔직하지 못한 면이 있는 지적인 여주이니라. 그런 여주가 귀신을 무서워한다? 얼마나 모에하느냐.>
‘그걸 나한테 어필해서 어쩌자는 거지…….’
남주 앞에서 이랬다면 아마 남주는 엘리나4가 귀엽다는 양 씨익 웃으며 바로 그녀를 업든지, 공주님 안기를 하든지 했을 테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것은 여주 둘과 엑스트라 하나였다.
일단 통과는 시켜야겠고, 그렇다고 자신이 업고 가기에는 무리였다. 어떻게 하면 엘리나4를 옮길 수 있는지 생각에 잠겨있던 라라가 뒤늦게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 분위기도 칙칙한데 저희 게임하면서 가는 건 어떨까요? 밝게요.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인간 마차에 타는 걸로 할래요?”
“인간 마차?”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나2가 끼어들며 물었다.
“두 사람이 팔을 겹쳐서 한 사람을 태우는 놀이야. 다른 나라에서는 인간 가마라고도 해.”
“그럼 한 사람은 타고 가는 거야? 나 마침 다리가 아팠는데 딱이다. 하자, 하자!”
엘리나4의 설명에 엘리나2가 흥미를 보이며 외쳤다. 라라는 슬며시 엘리나2에게 눈치를 주었다.
‘너 태울 거 아니야. 엘리나4 태울 거야. 알았지?’
라라는 정확히 그런 눈빛으로 엘리나2를 뚫어져라 보며 슬쩍 가위를 만들어 보였다. 이에 엘리나2는 알아들었는지 조용히 머리를 한번 끄덕였다.
“그럼, 가위바위보!”
라라의 외침에 맞춰 세 사람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엘리나4는 가위를 냈고, 라라도 예고했던 대로 가위였으나 엘리나2만 당당하게 주먹을 내었다.
“우왓, 내가 이겼잖아! 뭐야, 라라. 정말 가위를 낼 줄은 몰랐는데. 암튼 고마워!”
“넌 눈치도…….”
“응?”
“아니야…, 아무것도.”
밝고 쾌활한 여주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 중 하나가 넌씨눈이라고 했던가. 이젠 화내는 것도 지쳤다. 저 얼굴에 작은 악의가 깃들어 있다면 뺨이라도 갈기고 악녀를 자처했을 텐데 엘리나2의 얼굴은 너무나도 해맑았다.
“헤헤, 이거 미안한데. 그래도 내기는 내기니까 너무 날 탓하지 말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엘리나2가 교차된 팔 위에 두 다리를 끼워 넣었다. 안 그래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는 엘리나4와 함께 엘리나2를 들어 운반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라라가 위태롭게 한발씩 앞으로 내디딜 때였다. 출구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에 다시 다리 힘이 풀린 것인지 엘리나4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마차의 기반이 흐트러지면서 그 위에 앉아있던 엘리나2도 덩달아 몸의 중심을 잃었다.
“으아악!”
엘리나2의 머리가 딱딱한 대리석 바닥 위로 추락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 엘리나2?”
“…엘리나2!”
처음엔 미동하지 않는 엘리나2를 보며 장난이겠거니 싶었던 엘리나4도 어느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복도 끝에서 놀래려고 준비하고 있던 귀신 알바가 급하게 밖으로 나가 황궁 시종들을 불러왔다.
“그런, 엘리나2가…….”
“응…….”
뒤늦게 출구에서 만난 엘리나1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 라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공작가로 실려 간 엘리나2는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설마 여주인데 죽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모를 논클리셰로 인해 이대로 식물인간 엔딩으로 갈지 몰랐다.
암울함에 젖어있을 때 대기실 안에서 안내 방송이 낭랑히 울려 퍼졌다.
[1차 시험 통과자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27번, 35번, 39번, 111번, 113번, 114번, 158번, 197번…….]
“…우리는 합격인 거구나.”
엘리나1은 두 손을 가슴께 위에 꼭 그러모으고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나, 결심했어. 엘리나2의 몫까지 열심히 하고 오겠어……!”
<합격할 거라는 떡밥이니라.>
하긴, 여주니까 합격할 테지. 라라는 식은 국을 들이켠 것처럼 밍밍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10분 뒤 2차 면접이 있을 예정이오니 지금 호명되신 합격자분들께서는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번호순대로 27번, 35번, 39번이 먼저 들어갔다. 111번, 113번, 114번인 엘리나1과 라라와 엘리나4는 대기실에 앉아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그 옆에 무리를 짓고 앉아있던 어느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잘거렸다.
“2차 면접은 폐하께서 직접 보신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