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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64)화 (64/115)

64화

아기 침대 안을 들여다본 순간 유모는 심장 발작을 일으킨 환자처럼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헐떡거렸다. 뽀글거리는 금발 머리채를 길게 늘어뜨린 황녀가 홀로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침대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분명히 눕혀놓았을 텐데.

“…황녀님께서 혼자 앉아계시다니.”

이 사실을 서둘러 황실 어의에게 알리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뿌드득 하고 플라스틱 뚜껑을 돌리는 괴기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노을이 뒤섞인 어둠이 깔린 방 안.

황녀의 머리가 뻣뻣하게 유모를 향해 돌아갔다.

“폐하!”

카를라히는 한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비적비적 걸어가 방문을 열자 문 앞에서 석고대죄라도 하는지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는 대신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이 한밤중에 시끄럽게.”

“죄송합니다! 하나 사태가 사태인 만큼 한시가 시급하다고 판단되어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평소답지 않은 심각한 분위기에 카를라히는 슬며시 가운을 걸치고 그들을 따라 방을 나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하는 동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한밤중에 반역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존잘님 동인지 재판 일정이 취소된 것인가. 둘 다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골치 아픈 문제였다. 앞에서 달리던 신하가 걸음을 멈추자 카를라히는 그제야 자신이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네놈들, 감히 제국의 태양을 속였겠다!”

“그것이 아니옵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방 안을 보십시오!”

카를라히가 자신의 앞에서 활짝 열리는 두 문짝을 응시한 순간이었다. 펑, 하고 생일용 폭죽이 터졌다. 허공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색종이들 사이로 보이는 어떤 물체에 그의 푸른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황녀 전하께서 걸음마를 떼셨습니다!”

‘걸음마……. 저것이?’

암만 봐도 허공에서 2m 50cm는 족히 떠있는 것 같은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시퍼렇게 질려있는 카를라히의 모습에 대신들은 그가 딸아이가 걷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폭군이 딸 바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을 폭군은 기쁜 감정이 아닌 공포감만 깨우쳤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열린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커튼과 거칠게 흔들리는 모빌, 거기다 방의 조명은 잠잘 때 켜두는 스탠드만 켜놓고 있어 방 안은 어두컴컴한 귀신의 집이 따로 없었다.

가끔씩 번쩍이는 번개로 인해 인형의 얼굴에 음영이 훨씬 더 짙어졌다. 폭군도 지릴 만한 딸내미의 면상이었다.

“…저거 악령이 씐 건 아니겠지…….”

“황녀님은 천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저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정녕 보이시지 않는 겁니까!”

“깨끗하다 못해 아예 흰자인데……? 눈을 아예 뒤집어 깠다만……?”

카를라히는 최대한 문에 가깝게 붙어서 공중에 떠있는 인형을 불길하게 응시했다. 인형은 눈깔이 뒤집어진 채로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네, 네가 조금이라도,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그러지 마라. 나 지린다! 지릴 거니까!”

오줌을 지릴 거라고 협박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인형은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언제 방 안의 커튼과 모빌이 휘몰아쳤냐는 양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침대에 가만히 기대어 앉은 인형은 어느새 유리알처럼 파란 눈을 뜨고서 카를라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황녀님, 걸음마를 하시느라 피곤하셨나 봅니다, 껄껄껄.”

“우리 황녀님, 배가 고프시죠? 귀여우셔라.”

“…너희들 다 미쳤어! 미쳤다고!”

카를라히는 히스테릭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쏟아지는 것은 의아하다는 시선들뿐이었다. 왜 받아들이시지 않느냐고 탓하는 그들의 눈에 카를라히가 방을 뛰쳐나가려 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잠갔을 리는…….”

소름이 끼쳤다. 그야 잠금장치는 문 안쪽에 있었으니 말이다. 철컥철컥 무의미하게 문고리만 잡아 돌리다가 카를라히는 뒤로 바짝 다가온 노신하를 알아차리고 화들짝 몸을 떨었다. 노신하는 천천히 폭군의 귀에다 입을 가져가 낮게 속삭였다.

“엄마가 가지고 싶다고 합니다.”

“…뭐?”

“황녀님께서 엄마가 가지고 싶다고 합니다.”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카를라히는 방 중앙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황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플라스틱 눈깔에 강한 염원이 깃든 것만 같았다.

“아… 그래, 엄마든 뭐든 데려오마……! 데려오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 문을 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댔을까, 어느 순간 문고리가 완전히 돌아갔다. 벌컥 열린 문에 몸이 앞으로 쏠린 탓에 카를라히의 실내화가 벗겨졌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방을 허겁지겁 뛰쳐나와 맨발로 황궁을 벗어났다.

* * *

망할 상사도 깜방에 갔겠다, 있으나 마나 한 기사단 영업 부서에서 탈출한 라라는 오랜만에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했다. 마법소녀 릴리카 팬카페 열혈 회원들만으로 구성된 정모였다.

라라는 간만에 하얀 분을 얼굴에 펴 바르고 귀족 영애다운 드레스를 입은 채 모임을 즐겼다. 프릴이 달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던 티로나 영애가 싱긋 눈을 접으며 말했다.

“그보다 이번 소식 들었나요?”

“무슨 소식 말이죠?”

“최근 황성에서 황비를 공고 중이던데.”

마법소녀 릴리카 말고도 현실 정보에 빠삭한 티로니 영애는 핸드백 안에 곱게 접어 넣어둔 공고지를 꺼냈다. 구인 공고지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황녀의 어머니를 구합니다. 0명

<조건>

―19세 미만과 임산부 혹은 노약자 제외

―심약자 제외

―성별은 무관. 모성애 혹은 부성애가 강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만.

―어떤 공포적인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을 굳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

라라는 구인 공고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리고선 약간 떫은 표정을 지었다. 폭군에게 언제 딸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엘리나1과의 약혼이 추진 중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로맨스다운 로맨스가 생기나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냐, 이건 오히려 엘리나1에게 찬스일지도…….’

로판 개념녀 엘리나1이라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폭군의 딸도 태평양보다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을 터. 애당초 현재 황비 후보로 가장 유력한 여인은 엘리나1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모성애가 폭발하는 엘리나1을 보고 폭군이 마음을 열고 그녀를 황후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야말로 원하는 클리셰가 아닐까. 물론 1차 시험이 담력 시험이라는 게 조금 걸렸지만.

“이제 곧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네요. 이번 탄신 무도회에선 누가 폐하의 파트너로 선정될까요?”

“저번 파트너는 누구였었죠?”

“아마 없었을 거예요. 폐하께서 잠시 모습만 드러내시고는 바로 자리를 뜨셨으니까요.”

“아.”

잔혹하지만 동시에 고독한, 피로 물든 한 마리의 늑대였다. 그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여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 생일 파티에도 못 끼고 겉도는구나, 라라는 조금 안쓰럽게 생각했다.

‘엘리나1이든 엘리나2든 엘리나3이든 엘리나4든 엘리나5든 얼른 한 명이라도 폐하의 마음에 들어서 이번 황실 무도회에 파트너로 선정이 된다면…….’

“그 전에 검술 대회가 열리죠.”

“맞아요, 검술 대회도 있었죠? 이번 검술 대회에 우승 후보가 누군지 참 기대되네요. 정말 스토리 마를 일이 없겠어요, 호호호.”

“죄송해요! 저 갑자기 가야 할 곳이 생각났어요.”

라라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애들이 아쉽다는 눈치를 보내왔지만 그녀들을 뿌리치고서라도 가야만 했다. 하루빨리 폭군 클리셰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 *

“황녀의 어머니 지원자분들은 이쪽으로 오셔서 번호판 받아 가세요!”

화려한 황궁 안, 수많은 지원자들이 모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그들은 건강한 육체와 굳건한 마음을 지닌 이들로 모습만 본다면 무투 대회 선수들 같았다. 라라는 그들 사이에 쭈그려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번호판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지원자분 한 분이신가요?”

“아뇨, 넷이요.”

라라는 자신의 뒤에 서있는 은발의 아름다운 엘리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나1과 엘리나2, 엘리나4였다. 엘리나3은 다음 주에 있을 검술 대회 준비 때문에, 엘리나5는 성녀 임명식이 부쩍 코앞으로 다가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11, 112, 113, 114번입니다.”

네 개의 번호판을 받은 라라는 엘리나들의 숫자에 맞게 하나씩 배분하고서 자신은 남은 113번을 가슴에 달았다. 다시 대기실에 들어가 기다리는 동안 엘리나2는 허공에 대고 뭐라 뭐라 말을 이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너의 도움은 받지 않을 생각이야. 폐하의 신부를 뽑는 시험인 거잖아? 나 혼자서 정정당당하게 이 시험을 통과해 보이겠어! 그러니까 절대 날 따라올 생각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엘라임, 샐리온, 노아스, 너네도 마찬가지야.”

정령왕과 대화를 나누는지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그만큼 엘리나2도 황제의 신부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일 테다. 이곳에 모인 참가자들 전원 같은 생각이겠지만.

라라는 알지 못했으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사실이 있었다. 이미 황제의 신부라고 와전된 지 오래였으나 실상 구하고 있는 인재는 황녀라고 불리는 인형의 어머니로, 황제와는 털끝만치도 관련이 없는 자리였다.

한 시간 정도 앉아서 기다렸을 때다. 천장에 달린 마법 확성기에서 안내 방송이 울렸다.

[111번부터 120번분까지 1차 시험장으로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앗, 우리 차례잖아?”

엘리나2가 벌떡 일어나 외치자 엘리나1과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엘리나4가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라라는 그녀들을 따라 시험장 푯말이 붙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은 넓은 저택 구조를 본떠 만든 하나의 세트장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물만 분간이 가능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낮은 전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안내 방송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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