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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63)화 (63/115)

63화

틀에 박힌 자기소개이기는 하나 나쁘지는 않았다. 카를라히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선 클라이더의 옆에 앉아있는 식스틴 후작의 자기소개를 경청했다. 역시나 다를 바 없었다.

“다음, 자기소개를 들어보도록 하지.”

“네.”

세 번째 순서에 앉아있던 젊은 미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구불거리는 황금색 머리칼과 자신감에 찬 눈동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패기 넘치게도 카를라히가 앉아있는 책상을 돌아 그의 옆에 섰다.

“초면에 실례지만, 잠시 일어서 주실 수 있으신가요?”

왠지 모를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정중한 부탁에 카를라히는 흔쾌히 몸을 일으켜 주었다.

남자는 카를라히의 뒤로 가서 몸을 숙였다. 날카롭게 뻗은 콧날이 정확히 카를라히의 엉덩이 한가운데에 멈췄다. 한 손을 배에 얹고 엉덩이 냄새를 맡는 행동은 신사답게 상당히 정중했으나 동시에 행동 자체는 개 같았다.

이에 클라이더와 식스틴 후작이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네 이놈, 무례하다!”

“감히 폐하의 동구멍을 능멸하다니……!”

“아니, 너희 때문에 더 능멸당하는 기분이 드니 입 닫도록.”

카를라히는 두 사람에게 다시 앉을 것을 지시하고는 옆에 선 남자를 돌아보았다. 훤칠한 얼굴의 그는 방금 전까지 동구멍 냄새를 맡은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천재적인 특별함을 부각하기 위한 행동인 것일까. 그런 계획적인 행동이라면 이자는 기필코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니엇 공작 가문…….”

“리니엇 공작 가문?”

“……!”

“……!”

모든 후보자들이 경악하는 사이 금발의 미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공작 가문에서 애교를 담당하고 있는 대형견 남주 크리온이라고 합니다.”

“애교 천재인 건가.”

귀엽다. 쓸모는 없지만 왠지 옆에 두고만 싶은 귀여움이었다. 확실히 한 명쯤 귀여운 인재가 황궁에 있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카를라히가 턱을 문지르며 깊이 생각에 잠길 때 크리온은 조용히 자리에 들어서고 다음 후보가 앞으로 나왔다.

“페레우스라고 합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긴 흑발을 늘어뜨린 미남자는 새빨간 눈으로 조용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퇴폐적인 분위기와 반항적인 성미가 외모에서 느껴졌다. 옷도 가슴 앞섶이 브이자로 벌어진 까만 레이스 셔츠였다.

웬 날라리가 황궁에 다 지원을 했나 하는 탐탁지 않은 생각에 카를라히는 급히 자기소개를 중단시키고 이력서를 훑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입견을 곧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우스 씨, 스펙이 우수하군요.”

“감사합니다.”

외양만 조금 그럴 뿐 이토록 바람직한 인재는 본 적이 없었다.

“경력란을 훑어보니 조금 특이한 경력이 발견됐는데, 마왕성에서 일했나 보죠.”

“네, 천 년 정도 마왕성에서 근무했었습니다.”

“천 년이면 웬만한 일은 거뜬하겠군요.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바로 출근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출근해 주세요. 전에 일하던 최측근이 좀 안 좋은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나갔거든요. 업무는 제가 직접 옆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른 청년을 바라보며 카를라히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에 상대적으로 자동 탈락이 된 세 후보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클라이더와 식스틴 후작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을 때 크리온만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추욱 내리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추가 합격자를 발표하지.”

뜻밖의 말에 클라이더와 식스틴 후작이 그럴 줄 알았단 듯이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러나 카를라히의 손길이 내밀어진 곳은 그 둘이 아니었다.

“크리온,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파아아앗, 빛이 뿜어질 것처럼 환해진 표정으로 크리온이 고개를 쳐들었다.

180cm의 건장한 금발 사내는 곧 카를라히의 품에 달려들었다. 할짝할짝 뺨을 핥으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사내의 화려한 황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만지며 카를라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 * *

“처리한 문서들은 어디다 두면 되나요?”

“여기다 두면 됩니다. 그보다 정말 일 처리가 빠르군요.”

“하하, 아닙니다.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근무한 지 이틀째 되는 날 페레우스는 업무에 완벽히 적응해 있었다. 카를라히가 뿌듯한 눈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페레우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그의 책상 옆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이건 어디다 두면 됩니까?”

훤칠한 키에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크리온이었다. 그가 정중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것은 이번 달 말까지 확인하셔야 할 결산서이고, 이것은 남부 지방에서 올라온 공문서입니다. 이것은 오늘까지 처리하셔야 할 중요 문서로…….”

크리온의 넓은 양 손바닥에 한가득 들려있는 종잇조각들을 보며 카를라히는 훌륭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갈기갈기 찢어놨군. 아주 귀여워.”

다시 서류를 작성해야겠지만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기 위해선 서류 몇 장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천방지축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혼자 놔두면 집무실 안이 쑥대밭 돼서 퇴근 전까지 항상 데리고 다녀야 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더 줄 서류가 없으니 지금은 자리로 돌아가서 휴지를 찢고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크리온은 밝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애꿎은 휴지를 북북 물어뜯어 대는 동안 해가 기울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퇴근 시간임을 알리는 말에 크리온은 벌떡 일어나 그대로 문을 뛰쳐나갔다.

“참 발랄해.”

기운이 넘치는 부하 직원을 흐뭇하게 바라본 카를라히가 서류 정리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레우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마지막 서류를 넘겨줄 때였다.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미 누군지 눈치챈 카를라히는 서둘러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아슬아슬하게도 2초 차이로 문이 열렸다. 페레우스가 문을 열고 들어선 노신하를 맞이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그것이, 방금 전 나가셨습니다.”

“이런… 한발 늦었구만. 알겠네.”

신하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책상 위로 카를라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검자주색 머리칼을 이마 선을 따라 쓸어 올렸다.

“고맙군요.”

“아닙니다. 그런데… 주제넘은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왜 피하시는 건가요?”

“보나 마나 날 붙잡고 딸도 아닌 것을 돌보라고 하소연했을 테니까요.”

“…딸 말입니까?”

“내 딸이 아닙니다.”

카를라히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에 페레우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가지고 논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자기 딸인지 확실치 않은 거군요……. 역시 폭군 남주는 다르시네요.”

“난 순결주의자입니다.”

“역시 폭군 중의 폭군. 자기는 딸까지 있으면서 여주는 순결해야 된다라! 감탄했습니다.”

“아니, 내가 순결하단 겁니다. 여자랑 키스해 본 적도 없는데 딸은 무슨…….”

말하는 도중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장면에 카를라히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은 어느덧 입술에 가있었다. 얼굴이 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실수로 딱 한 번… 키스를 한 적은 있지만. 흠, 아무튼 동정입니다.”

“동정, 폭군이, 동정? 나쁜 폭군, 동정…….”

페레우스는 믿기지 않다는 듯이 입으로 작게 되뇌었다. 뒤늦게 상사 카를라히를 생각해 입을 다물었지만 나쁜 폭군 남주의 환상이 깨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표정이 왜 그럽니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조금 의외라고 할까…, 물론 폭군 남주가 꼭 문란한 남주일 필요는 없지요. 하핫.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될 때도 많으니 말입니다.”

“스스로 순결을 선택한 겁니다.”

“아앗,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한 지 아직 천 년밖에 안 된 신입이라…, 눈치가 없었다면 죄송합니다.”

굽신굽신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부하 직원을 앞에 두고 카를라히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려다 말았다. 깍듯하고 진솔한 사과에 마음이 누그러진 것이다.

“이만 퇴근하세요.”

“넵!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페레우스는 밝게 인사하며 문을 나섰다. 퇴근을 한 그는 곧바로 마력을 개방했다. 스멀스멀 발끝부터 기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이윽고 그의 거대한 몸체를 휩싸고 자취를 감추었다.

눈앞에서 안개처럼 흩어지는 검은 기운에 맞춰 페레우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황궁의 황량한 복도는 어디 가고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어느 방 안에 도착해 있었다.

모빌이 달린 천장과 방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아기 침대를 발견하기 무섭게 그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처럼 빨간 눈동자가 아래로 조용히 기울었다.

“처음에는 자기 딸이 아니라 부정해도, 결국 딸 바보가 되는 것이 진정한 폭군이라 들었습니다.”

실례, 하고 국어책 읊듯이 말한 페레우스가 그대로 침대 안을 엿보았다.

“이 작은 인간이… 이 나라의 황녀라니?”

비스듬히 눈깔을 깔고 있는 황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나이대 인간 아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무표정하기만 했다. 페레우스는 조금 놀라 황녀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마치 속이 텅 빈 것만 같았다.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설마 이 나의 강력한 마력에 돌연사한 것인가……! 크, 이토록 무서운 힘이 내 것이라니.’

따흐흑. 페레우스는 미간을 부여잡고 우는 시늉을 하다가 곧 오른손에 마력을 쏟아내었다.

“새 생명을 드리지요, 황녀님.”

업무 처리 능력이 우수한 직원답게 페레우스는 손도 기가 막히게 빠른 편이었다. 마왕성에 취직하기 전에 단기 알바이긴 하지만 마물을 창조해 내는 생산직 2교대 근무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의 기억을 살려내 비어있는 인형에 마력을 주입시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내었다.

그가 은밀히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뒤늦게 유모가 방을 찾아왔다.

“황녀님, 오늘도 인형처럼 가만히 누워만 계신……. 흐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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