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뭔진 몰라도 똑 부러진 아이라능…….”
“망할 자본주의 세상! 내 감동 물어내……!”
카를라히는 말없이 라라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폐하,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안경을 벗은 카를라히가 은밀한 걸음으로 황성 깊숙한 복도에 들어섰을 때였다. 불이 켜지며 기다렸다는 듯이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타났다.
“이 야심한 시간에 몰래 들어오시고……. 혹시 리니엇 공작 가문의 여식을 만나고 온 겁니까?”
옥체에 대한 걱정보단 은근한 기대가 섞인 눈빛들이었다. 카를라히가 질린 눈으로 무시하자 한 신하가 적나라한 질문을 던졌다.
“소설 중반부인데 키스 정도는 하셨겠지요?”
“무엄하다. 늙은이라고 봐줄 줄 아나.”
카를라히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드러나자 신하들이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은퇴 후 일절 연금 없을 줄 알아라.”
폭군다운 잔인한 발언이었다.
“폐하! 그, 그… 그것만은 아니 됩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다고 할 것 같습니까? 이미 노후 자금은 다 모아두었습니다.”
“…빌어먹을 영감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 폐하를 생각해 감히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 리니엇 공녀와의 약혼을 언제까지 늦추실 생각이신지요. 어느 가문의 여식이든 좋으니 한시 빨리 옆자리를 채우십시오.”
“제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낮 잠을 못 이루는 이 충복들을 생각해서라도 후계를 두셔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무척이나 피곤하니, 다들 이만 물러가도록.”
그러나 하이에나들보다 질긴 신하들은 카를라히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놈의 후계, 후계, 안 그래도 애 낳고 키우기 힘든 시대에 무작정 낳기만 하라는 무책임한 소리에 카를라히는 짜증이 났다.
침실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 하자 카를라히는 근처에 놓인 장식용 인형을 쥐고 문밖으로 던졌다.
“이것을 오늘부로 내 후계로 책봉하지. 자, 이제 퇴궁들 하시지.”
한 신하가 간신히 장식용 인형을 받아내 품에 안았다. 파리 내쫓듯 손을 휘적거리며 먼저 침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황제를 뒤로한 채 신하들은 하나같이 탄식했다.
“이것은 여아가 아닙니까…….”
* * *
달빛이 새어드는 기도실 안, 성녀 엘리나5는 무릎을 꿇고 경건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린 은색 머리칼이 새하얗게 반짝였다.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하얀 레이스 테이블보였다. 집에서 면사포를 세탁하고 까먹고 안 가져와서 다과실에서 급히 가져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을 향한 믿음과 청결한 마음이지 형식이 아니니 말이다.
“…나믈리아미타블리오…과음세보으살리아…….”
“성녀님,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똑똑, 하고 울리는 정갈한 노크 소리에 엘리나5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들어와도 좋다는 작은 허락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은밀히 조사를 나간 성기사였다.
“분부하신 대로 빈민가 주변의 암흑 세력에 대해 알아 왔습니다.”
“늦게까지 고생하느라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성기사 밀리오르는 몸을 낮춰 대답했다.
엘리나5는 그가 건네준 조사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몇 분 뒤, 시름 가득한 한숨 소리가 고요한 기도실 안을 울렸다.
“지금은 교황청을 노리고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라는.”
엘리나5가 달빛에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여신이 지상에 내려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가 쫓는 이 어둠의 세력은 머지않아 제국을 손에 넣으려 할지도 몰라요.”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련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걸 성녀인 이 내가 막아야 돼요. 이건 숙명이에요.”
신이 자신에게 신성력을 부여한 것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엘리나5는 태어나 신성력이 발현된 후로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신이 그녀에게 성녀로서의 운명을 짊어지게 한 건 그냥 성녀 설정이 간지 나기 때문이라지만 말이다.
엘리나5는 서글픈 눈을 했다. 추운 겨울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던 때가 있었다. 남들이 먹다 버린 음식물을 주워 먹던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릴 적 친부모로부터 버려져 거리를 떠돌던 자신을 지금의 아버지, 리니엇 공작이 우연히 발견해 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신성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저택으로 데려와 친딸처럼 기른 것이라지만, 그럼에도 엘리나5는 감사했다.
노숙자 소녀였던 자신은 공녀가 되었고, 지금은 이 나라의 성녀가 되었다. 주어진 사명, 그것은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아닐까.
느려터지게도 성녀 여주의 이야기는 이제 막 서막이 올랐다.
8장 폭군의 딸 정석
카를라히는 대낮부터 국무를 보는 중이었다. 최측근인 에스테반 공작이 감방에 가버린 덕분에 그의 일정은 평소보다 빡빡해져 있었다. 거기다 최근 들어 혼자 감당하기엔 업무량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최측근을 새로 뽑아야겠군.’
공고를 내기 위해 집무실을 빠져나온 그때였다. 언제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하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고 말했다.
“폐하, 국무는 다 보셨는지요.”
“잠깐 다른 볼일이 있어 나왔다.”
“다른 볼일…이십니까. 혹 시간이 되신다면 황녀 전하를 보러 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명색이 부녀지간인데 한 번이라도 얼굴을 비춰주시는 게…….”
“황녀?”
카를라히는 뭔 개 똥 싸는 소리냐는 듯이 신하를 마주 보았다. 노신하는 혹여라도 심기를 거스른 것은 아닌가 초조해하며 운을 뗐다.
“황녀 전하께선 아직 어리십니다. 아버지의 따스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혹시 약했나?”
돈 게 아니냐는 말을 순화한 말이었다. 신하는 고개를 저으며 애수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 번이라도 봐주실 순 없는 겁니까? 이 늙은이가 부탁드립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황녀님이 진정으로 불쌍하지…….”
“아니, 아내도 없는데 무슨 놈의 딸이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딸입니다. 분명히, 폐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란 말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외국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더 나을 만큼 끔찍한 의사소통 수준이었다.
결국 백번 떠드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카를라히는 신하를 따라 그 황녀가 있다는 방으로 직접 향했다. 대체 어디서 약을 파나 싶어 들어간 곳에는 아기 요람이 중앙에 위치해 있고 방 이곳저곳에 장난감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방 끝에서 무언가를 안은 채 왔다 갔다 하는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유모는 깜짝 놀라 입을 떼려다가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황녀가 깰 것을 염려해 고개만 푹 숙여 보였다.
카를라히는 곧장 방을 가로질러 유모의 앞에 섰다.
“그것이 내 딸……?”
보여 보란 듯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검자줏빛 머리의 아름다운 사내는 이 나라의 드높은 자리를 꿰찬 젊은 황제였다. 듣기론 잔혹한 성정이라 그의 앞에선 여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자비를 바랄 수 없다고 하였던가. 유모는 불안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두 팔에 안겨있던 황녀를 내밀었다.
카를라히는 눈만 내리깔아 유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았다. 눈을 내리감은 것치곤 약간 실눈을 하고 있는 인형이었다. 유모가 황녀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비스듬히 들어 올리자 동시에 둥그런 눈꺼풀도 비스듬히 올라가 조금 흘기는 듯한 눈이 되었다.
“이게 내 딸이라고……?”
이제껏 거들떠도 보지 않던 황제는 처음으로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잠시 떨리는 손이 황녀에 가 닿았다. 유모와 노신하가 짧게 숨을 들이켤 때 황제가 황녀의 목을 쥐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
“이게 왜 내 딸이란 말이냐!”
“폐하!! 그러다 황녀 전하께서 정말 죽습니다! 부디 그 손길을 거둬주십시오!”
“너희들은 뭔데 심각하게 그러는데.”
괜히 죄지은 것 같자 카를라히는 슬며시 유모에게 인형을 던져주었다. 유모는 인형을 끌어안고 제자리에 앉아 흐느꼈다. 비스듬히 눕혀진 상태인지라 반 정도 눈을 치뜨고 있는 인형이 조금은 괴기해 보였다.
“제법 당돌하게 노려보는군, 이 플라스틱 눈깔…….”
카를라히는 인형을 힐긋 내려다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둘 다 약을 한 것 같으니 조만간 잘라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불쌍한 황녀 전하…, 태어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버림받으시고…….”
황제가 나가자 유모는 황녀의 고운 뺨에 어린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야만 했다. 벌써부터 얼마나 굳세신지 울음조차 터뜨리지 않고 계셨다.
잔혹한 폭군의 딸로 태어난 것이 잘못인 걸까. 태어나자마자 집어 던져진 황녀를 간신히 신하들이 받아내어 살아계신 거라 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가혹하더라도 자신의 딸에게까지 가혹하실 필요가 있는 걸까. 유모는 진심으로 황녀가 불쌍하기만 했다.
다음 날 카를라히는 마약 검사에 대해 알아보다가 오후에 자신을 찾아온 네 명의 사내를 맞이했다. 새로 최측근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올린 지 하루도 안 되어 전국에서 1,500명의 지원자가 신청하였는데 그중 최종 면접 후보자 네 명이 발탁된 것이다.
한 명은 락케스 공작가의 장남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식스틴 후작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눈을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가진 자들이었다.
치열한 공개 오디션을 뚫고 올라온 만큼 카를라히는 네 사람에게 기대 어린 시선을 공평하게 보내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들어보지.”
“네!”
1번 번호판을 달고 있는 락케스 공작가의 장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락케스 공작가의 장남 클라이더 락케스라고 합니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락케스 공작령에서 태어난 저는 성실하신 아버지 밑에서 늘 책임감과 근면 성실함을 배워왔습니다. 신조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일단은 힘껏 부딪쳐 보자이며, 뽑아만 주신다면 황제 폐하의 곁에서 성실히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