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아악!! 그만! 그만 당겨요!!”
가죽 바지 찢어지듯 앙칼진 외침에 두 남자는 라라를 당기는 것을 그만두고 놓아주었다. 라라는 벌겋게 손자국이 남은 양 손목을 울적한 눈으로 내려 보다가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미하일이 쫓아가려 했으나 그 전에 라히가 나서서 막았다.
“그 상태로 나가면 바로 경찰에 체포될 거라능. 라라는 이 내게 맡기라능.”
틀린 말이 아니기에 미하일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사라진 두 남녀를 문 안에서 지켜보다가 미하일은 문을 닫고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댔다.
“제길…, 바지만 제대로 입고 있었더라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바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바지를 입고 뒤쫓아 가면 적어도 선수를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미하일은 빠르게 바지를 집어 들었다. 두 발부터 구멍에 끼워 넣었으나 종아리까지 들어가고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 라라가 두 치수가 작은 바지를 구해 온 것이다.
어떻게든 입으려고 무리하게 올렸으나 무릎에 끼인 채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미하일은 점차 피가 통하지 않는 무릎에 괴로워하다가 왼발에서부터 쥐가 일자 그대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찌릿찌릿한 발바닥이 고통스러웠다.
“크읏… 흣.”
누가 병약 남주 아니랄까 봐 미하일은 실감 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괴로워했다.
미하일이 힘겹게 숨을 몰아쉴 때였다. 갑작스레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미하일은 흠칫 놀라 턱으로 몸을 지탱하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성하, 여기 계신가요?”
문 앞에 서있는 자는 신성력의 흐름을 쫓아온 엘리나5였다.
“성하, 혹시 계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혹시 라라 양도 여기 있는…….”
“…열지 마!”
그답지 않게 다급한 어조였다. 뒤늦게 미하일은 차분한 음성으로 바꿨으나 아무래도 자세가 자세이다 보니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성녀, …부탁이니까 열지 말아줘요. 큿.”
“…지금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대로 가줘요, 부탁이니까.”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엘리나5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고통에 차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황 성하가 지병을 앓고 있다고 어렴풋이 듣긴 했었다. 설마 그 병이 재발한 건가 싶으니 도저히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엘리나5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여주의 오지랖으로 인한 스토리 전개였다.
펼쳐진 방 안 풍경에 엘리나5는 얕게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는 그가 쓰러져 있었다. 반쯤 바지를 내리고 있는 모습에 입술이 절로 딱딱하게 다물려졌다.
“이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
“성하? 성하……!”
대답이 없었다. 불과 문을 열기 전만 해도 대답이 들려왔는데. 엘리나5는 급박한 기분에 서둘러 미하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심장은… 뛰고 있어. 다행이야.”
미하일의 옆에 앉아 그의 왼쪽 가슴에 귀를 갖다 댄 엘리나5가 중얼거렸다. 그를 똑바로 눕혔지만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가지런히 감긴 두 눈은 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보세요, 제발.”
‘제발 좀 꺼져…….’
미하일은 속으로 욕을 했다. 그냥 쪽팔려서 눈을 뜰 수 없을 뿐이었지만 성녀는 죽어도 갈 생각을 안 했다.
지금은 성녀 하나라지만 혹여라도 이 눈치 없는 게 호위 기사를 끌고 왔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될 테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성녀님! 어디 계십니까?”
한 번에 들이닥친 기사들의 목소리에 미하일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다면 이 눈치 없는 성녀는 신성력을 퍼부어 대서라도 저를 살려내겠지만.
“그보다 거기 쓰러지신 분은…….”
기사의 놀란 목소리에 엘리나5는 차분하게 미하일의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가에 서있는 기사 둘을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전쟁이에요.”
“그게 무슨?”
“누군가가 역병을 퍼뜨렸고, 제가 이곳으로 오도록 의도했죠.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제가 아니었어요. 성하를 이곳까지 불러내기 위해 성녀인 저를 이용한 것뿐이죠. 그리고 성하가 혼자 있는 틈을 타 이런 참혹한 짓을…….”
엘리나5는 고개를 숙였다. 말하기가 고역인지 입술 끝이 슬그머니 떨렸다.
“성인용 기저귀와 작은 바지를 입혔어요.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한 채 성하는 이 자리에 쓰러져 계셨고요. 그나마… 제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었지만 만일 이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였다면 아마 저희 대신전에 상당한 타격이 갔을 거예요.”
“그런……. 대체 누가!”
분위기는 다들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진지하게 흘러갔다. 미하일은 이제 자포자기 상태로 이어지는 엘리나5의 말을 경청했다.
“명백한 신성 모독입니다. 저희 대신전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어느 세력의 악랄한 음모인 게 틀림없어요.”
“……!!”
“이런 비열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답니다. 성녀로서 전쟁을 선포하는 바예요.”
‘미쳤네.’
미하일이 담담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동안 라라와 카를라히의 추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라라는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라히를 따돌리기 위해 여관 뒷문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그러나 포기하기는커녕 그가 비슷한 속도로 추격해 오자 왠지 더 빨리 달아나야 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길가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마침내 그를 따돌렸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빠르게 쫓아오는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프로처럼 안정적인 자세로 자전거를 모는 그자는 다름 아닌 라히였다.
휘날리는 보랏빛 머리칼에 잠시 시선을 주다가 라라는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강에 그대로 자전거를 버리고 강에 뛰어들었다. 이제 됐겠지 싶은 순간 뒤에서 물살을 가르며 쫓아오는 라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라는 놀라 더 빠르게 헤엄쳤다. 강의 맞은편에 닿은 라라는 지면으로 올라와 힘차게 달렸다. 이젠 더 이상 따라오지 않겠지 싶었으나 어김없이 찰박찰박하고 젖은 발이 지면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헉, 허억…….”
얼마 안 가 라라의 체력이 바닥이 났다. 그건 카를라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들거리는 팔을 간신히 뻗어 라라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는 데 성공했다. 한 발자국을 남기고 두 사람은 멈춰 섰다.
“잠깐만……. 내가 잘못했다능. 헉, 헉. 사과할 시간이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능.”
한 시간 동안의 철인 삼종 경기 끝에 붙잡은 그녀의 손목은 정말이지 간절하게만 느껴졌다.
카를라히는 다리가 다 후들거려서 라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만 본다면 프러포즈의 한 장면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미안하다능. 후우, 후. 손목은 바로 치료하러 가자능.”
“헉헉, 후아……. 괜찮아요. 그 정도로… 후, 심하지는 않으니까요.”
“잠깐,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면 왜 이제까지 도망친 거냐능?”
“라히가 쫓아오니까… 헉헉, 무심결에요.”
그렇다. 둘 다 생쇼를 한 것이다. 라라마저 주저앉아 버리자 정말 상황은 우스워졌다.
“우리 이제까지 뭐 한 거냐능?”
“그러게요.”
푹 젖은 서로의 꼴을 바라보다가 두 사람은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를라히는 벗어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셔츠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코랄색 머리칼이 어지러이 달라붙은 하얀 뺨에 손을 가져갔다. 무심코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어주다가 뒤늦게 서로가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
“그… 그, 유리 님 동인지 재판 소식 들었냐능?”
“세상에! 재판하신다고요? 당장 사러 가야죠. 첫 동인지 내셨을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라히도 사러 갈 거죠?”
“당연한 소릴. 지금까지 단 한 권도 빠짐없이 사러 갔었다능. 구할 수 없는 한정 판매 동인지들도 다 가지고 있으니 보고 싶으면 말만 하라능.”
“아, 역시 지인님! 사랑해요.”
안경 너머에 있는 벽안이 크게 떠졌다.
“음, 라히?”
갑자기 조용해진 라히가 이상해 라라가 옆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매끄러운 안경알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코끝에 코가 닿았다. 이번엔 라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취!”
“…….”
재채기 때문이었다. 안면을 담뿍 적신 천연 아밀라아제 미스트에 카를라히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떨떠름하게 고개를 뒤로 물렸다. 라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붙잡고 젖은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아, 죄송해요. 근데 뭐 하려고 하신 거예요?”
“…그 눈 색이 예쁜 것 같아서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다능, …아마도.”
사실상 카를라히도 자신이 뭘 하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멍하니 손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따라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이, 일단 돌아가서 몸을 말려야 될 것 같다능.”
카를라히는 먼저 일어나 오른손을 내밀었다. 라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헤엄을 치고 젖은 채로 자전거에 올라 한참을 달렸다. 다시 제자리에 자전거를 돌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젖은 옷은 다 마르다 못해 땀까지 날 정도였다. 밤이 늦어서야 여관으로 돌아왔으나 미하일은 먼저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나!”
여관을 나서려는데 한 아이가 뛰쳐나와 라라를 불렀다. 빈민가의 그 소년이었다. 설마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나온 것일까.
라라는 흐뭇한 기분에 소년에게 다가서면서도 한편으론 엑스트라인 자신이 여주 대신에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때였다.
“힛, 힛힛.”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던 아이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정확히 ‘10,000,000’ 숫자가 도금이 된 제국 수표였다.
“…그 돈은?”
“성녀님이 주셨어요. 바쁜 일이 생겨서 돌아가야 될 것 같다면서 대신 이 돈으로 어머니를 치료하라고 하셨어요. 앞으론 오지랖 떨 거면 돈으로 주라고요!”
귀찮게 여기까지 오게 만들고 말이야…, 하고 중얼거린 소년이 땅에 침을 뱉고 등을 돌렸다. 소년의 뒷모습이 점차 작아지더니 얼마 안 가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