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대답을 듣기 무섭게 카를라히는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이에 라온 백작은 ‘진즉에 그렇게 좀 가지.’ 하는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엘리나5의 얘길 들었을 때와 슈모르드 영애의 얘기를 들었을 때의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대체 얼마나 큰돈을 빌려주신 겁니까?’
라온 백작이 한참 잘못짚는 동안, 카를라히는 자신의 방에 들러 옷을 갈아입었다. 체크 셔츠에 동글뱅이 안경을 쓰고 덕후로 변신한 그는 서둘러 빈민가로 향했다.
오랜만에 친한 지인님을 뵐 생각에 카를라히는 조금 들떠버렸다. 최근에 황제로서 만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덕후로서 만난 지는 꽤 되었으니 말이다.
‘만나면 존잘님 재판 소식부터 알려드려야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다만.’
어느새 위기의식도 버린 채 카를라히는 지인님을 만나기 위해 빈민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시각, 빈민가에 도착한 미하일은 골목을 누비다가 엘리나5를 만날 수 있었다.
“성녀.”
“성하? 어떻게 여길…….”
엘리나5는 자신을 찾으러 급하게 뛰어온 것 같은 미하일의 모습에 약간 가슴이 술렁였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독단적인 행동을 해서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만 했다.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차마 고통받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전 이 나라의 성녀이자…….”
“됐고, 라라는요?”
“사실 저도 그녀를 찾는 중이에요. 저와 같이 있었는데 제가 잠시 잠든 사이에 사라져 버려서…….”
“…하,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죠, 성녀?”
미세하게 인상을 쓰며 미하일이 물었다.
“아마 한 시간 정도 됐을 거예요. …졸음을 참지 못한 제 불찰이에요. 일단 둘로 나뉘어서 찾아보기로 해요.”
엘리나5의 말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라를 찾기 위해 그가 서둘러 몸을 돌릴 때였다. 들려온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보다 정말 슈모르드 양을 아끼시는군요.”
“…일단 친구니까요.”
“슈모르드 양도 성하를 가장 절친한 친구로 생각할 거예요.”
온화한 목소리가 뒤따라 붙었지만 미하일은 무시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해가 진 지 오래였다. 차라리 화장실을 빌려 쓰는 거라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어서 빨리 찾아야…….’
이토록 불안했던 적이 또 있을까. 미하일은 평소보다 무리해서 달렸다. 얼마 못 가 그는 골목의 모퉁이 벽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르락내리락 들썩이는 등에 비해 조용한 하체는 점차 움츠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미하일은 그 자리에 꿇듯이 앉았다.
“큿, 젠장……!”
조신하게 모아진 그의 허벅지 사이로 점점 둥글게 물의 얼룩이 퍼져나갔다. 미하일은 주먹을 말아 쥐고 벽을 한번 세게 쳤다. 화끈한 감각이 손등에서 퍼졌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그 깊은 모멸감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한참을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을까, 모퉁이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 아닌가 싶을 만큼 반가운 목소리였다. 미하일은 고개를 들었다.
“…어, 미하일?”
“너란 녀석은……. 하, 여기가 어딘지 알고 따라오고 난리야.”
꽤 날카로운 반응에 라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가 싶어서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슬며시 그의 하체로 시선을 내렸다.
“왜 여기 앉아계세요? 그보다… 혹시 지리신?”
“…….”
“아, 음, 미안해요. 눈치가 없었네요.”
“너란 녀석은 진짜……. 가.”
짜증스럽게 입술을 베어 물며 미하일이 고개를 다시 비스듬히 숙여버렸다.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가라고.”
“지금 여벌 옷도 없으신 거잖아요? 괜히 고집부리지 마시고 저랑 같이 가요. 이 근처에 머물 만한 마을 여관이 하나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될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루 종일 도망쳐 다녔더니 이 주변은 어느 정돈 알아요.”
‘누구로부터?’ 하고 묻는 시선에 라라는 가면서 알려주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미하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라라는 그의 옆에 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거리가 어두워서 미하일의 젖은 바지는 그렇게 티가 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라라는 미하일이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소년과 그의 어머니를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라라는 엘리나5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30분간 치료를 방해하며 지루한 인생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마침내 엘리나5를 졸게 만드는 데 성공한 라라는 무사히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를 데리고 탈출했고 말이다.
라라는 소년의 어머니를 눕힐 만할 여관을 찾았다. 작은 여관에서 소년과 어머니가 쉴 수 있게 한 후 지금은 의원을 부르기 위해 혼자 잠시 밖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미하일과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의원을 어디서 데려오나 싶었는데… 미하일이 마침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도와주실 거죠?”
“어, 일단 씻고 나서.”
미하일은 낮게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라라는 여관방을 새로 하나 잡고서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씻고 나오세요. 저는 그동안 갈아입으실 옷 준비해 올게요. 혹시 다른 건 필요 없어요?”
“혹시 또 샐지 모르니까…….”
“네, 오버나이트로 사 올게요.”
라라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샐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라라 또한 잘 아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뭐라 더 말을 하려다 말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섰다.
* * *
“키는 이 정도에, 머리가 코랄색인데 혹시 모르는가?”
한편, 카를라히는 빈민가를 쥐 잡듯이 뒤져 어느 작은 여관에 도착한 참이었다. 여관 주인은 곧바로 코랄빛 머리 손님을 떠올리고선 어느 방으로 카를라히를 안내해 주었다.
“방을 하루에 두 개나 잡으셨는데 아마 이 방에 계실 거예요. 마지막으로 잡은 방이 여기거든요.”
“안내 고맙군.”
카를라히는 팁을 여관 주인의 손바닥에 던져주고는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자 이미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만났구나, 지인님.’
넓은 수코(수도 코믹월드)에서 만난 것처럼 설레고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노크를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안경이 삐뚤어지진 않았나 한번 매만지고는 카를라히는 꿀꺽 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라라…….”
그녀의 이름을 막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두 눈에 들어온 광경에 카를라히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작지 않냐?”
어깨 아래까지 연한 금발을 늘어뜨린 남자가 서있었다. 거의 다 벗은 차림에 기저귀를 찬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익숙한 뒷모습의 여자는…….
“성인용 오버나이트는 안 판다고 하더라고요……. 기저귀밖에 없어서 이걸로 사 왔는데, 일단 이거라도 입고 계세요.”
라라였다. 다 큰 성인에게 기저귀를 강요하는 지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다가왔다. 카를라히는 뒤로 힘없이 주춤거리다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저건 미소년 코스프레……?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빻았잖아…….’
아무리 취존이라지만 저건 좀 그랬다. 황망히 흔들리던 눈은 곧 뒤를 돌아본 라라와 마주치고는 크게 떠졌다.
“어……. 라히?”
라라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흠칫 하고 놀란 카를라히는 미처 도망가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곧이어 그녀가 자신의 왼손을 두 손으로 붙잡자 완전히 도망칠 틈을 잃게 되었다.
그런 카를라히의 곤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라는 해맑게 뒤돌아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아, 미하일, 소개할게요. 이분은 제 친한 지인분인 라히라고 해요.”
‘딱 봐도 폐하잖아.’
미하일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안경만 쓰면 단가, 그것도 라히라는 가명은 본명에서 따온 것 같았다.
‘숨길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는 미하일의 앞에 어색하게 한 손이 내밀어져 왔다.
“초면에 반갑다능. 편하게 라히라고 부르라능.”
“죄송한데, 제가 지금 이런 차림이라서요. 인사를 나누기 전에 적어도 격식을 갖추고 싶은데 잠시 나가주시죠.”
손을 마주 잡는 대신 미하일은 짜증을 숨긴 채 대놓고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이에 두 사람 사이에 중매자처럼 서있던 라라가 미안한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옷 갈아입고 있던 중이었죠. 죄송해요. 잠시 지인분이랑 나가있을게요.”
“네가 왜 나가.”
서둘러 라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던 라라는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기저귀 하나 달랑 차고 있는 미남에게 손목을 잡히다니 상황만 보면 전혀 설레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반신만 보면 좀 설렐 만한 장면이었다.
“여기 있어.”
미하일이 머리를 기울이자 살짝 젖은 금발에서 은은한 향이 맡아졌다. 라라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있을 때 반대쪽 손목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단둘이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시 데리고 나가겠다능.”
“라히?”
단둘이 중요하게 할 얘기라는 게 뭐지, 라라는 이상하게 설레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삼각관계 현상이니라.>
‘삼각관계요?’
<그렇다. 별로 설레지 않는 장면도 삼각관계라는 키워드를 끼워 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설레게 되느니라. 사도 쓸모없을 것 같은 상품이 1+2 행사 상품이 되면 왠지 모르게 사고 싶어지는 이치와 비슷하니라.>
‘뭔가 굉장히 거지 같지만 그럴듯해요.’
평소 이성적인 감정을 털끝조차 느끼지 못한 미하일과 라히였지만 지금 순간은 조금 설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양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 서로 잡아당기고 있으니 아프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상황은 점차 오체분시를 닮아가고 있었다. 양쪽 팔에 묶인 밧줄을 두 마리의 소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듯한 고통이었다. 죄인이 되어 형벌을 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