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잔잔하고 친절한 미소였다. 이에 차마 당신을 막으러 왔다고 말하지 못하고 미소로 대답한 라라는 서둘러 그녀의 옆자리를 꿰찼다.
“엘리나4한테서 여기에 계신다고 들어서요. 호호,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돌아가요.”
“좋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엘리나5는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듯이 말했다. 늘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웬일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저는 이곳 사람들을 구할 의무가 있어요.”
<마냥 가녀린 모습과는 달리 남을 구하려는 결연한 태도에 남주는 반전 매력을 느끼고 깊은 호감을 품게 되느니라. 지금 이 대사를 남주가 들어야 되는데, 하…….>
“성녀로서, 이 나라의 공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 이 입에 들어가는 빵 한 조각도 아래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간…(바른말 중략)…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줄 의무가 있는 거예요.”
“…아, 그렇군요.”
라라는 눈치를 보며 느리게 대답했다. 엘리나5가 너무 잘났다 보니 그 옆에 있는 자신은 되레 철없는 영애로 보이고 쭈그러드는 효과가 있었다. 마치 얼굴 작은 애 옆에 있으면 얼굴이 더 커 보이는 효과랄까.
“일단 소년의 어머니 몸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야겠어요.”
말을 끝낸 엘리나5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빼빼 마른 여인이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확실히 병색이 짙어 보였다.
“콜록콜록……. 누구신지……?”
“실례할게요. 저는 대신전에 소속되어 있는 보잘것없는 하급 사제랍니다. 그저 상태를 잠시 봐드려도 될까요?”
“…콜록, 귀하신 사제님께서… 콜록콜록, 그러다 옮기라도 하시면.”
“괜찮아요.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증상을……. 에취힉!”
벌써 옮은 건지 엘리나5는 크게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면서 순간적으로 눈에 힘을 준 것인지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눈에서 신성력이 멋대로 쏘아져 나갔다.
라라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뒤늦게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자 판자로 지어진 허술한 지붕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기침 중 천장을 올려다보아서 망정이었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면 지금쯤 소년의 어머니는…….
구멍을 통해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라라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소년을 부엌으로 데리고 나왔다.
“내가 주의를 끌게. 그 틈에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쳐…, 어서…….”
남은 시간은 총 3분 55초. 무사히 병든 엄마를 데리고 이곳을 탈출하라.
* * *
“교황 성하, 안에 계십니까?”
빛이 흘러내리는 예배당 단 위에 앉아 경건히 기도를 드리고 있던 미하일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평소의 성질을 억누르고 미하일은 점잖게 대답했다. 성기사는 여전히 문밖에 서서 말을 이었다.
“방금 엘리나5 성녀님께서 혼자 빈민가로 향했다는 얘기를 접하고 급히 보고합니다. 성기사 두 명이 따라간 것 같습니다만… 미리 확인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말끝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식을 접한 교황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 수 없어 더욱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갈 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민가에는 무슨 일로 간 거죠?”
“…듣기로는 역병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빈민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직접 가신 것 같습니다. 한데 역병 사건은 이미 사기극으로 밝혀진 데다 그런 위험한 곳에 가셨으니…….”
“좋은 일이네요.”
“예?”
성기사의 목소리는 물음을 띠었지만 굳게 닫힌 문 너머에 있는 교황 성하의 표정을 볼 순 없었다. 정말 저 성의 없는 반응이 끝인 걸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빡쳐있을까 봐 차마 묻지도 못하고 성기사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휴일에 그런 좋은 일을 하다니 저희 대신전의 이미지가 좋아지겠군요.”
“그렇긴 한데, 현재 성녀님의 안전이…….”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겠죠.”
“그렇긴 하지만, 가신 장소가 아무래도 빈민가이다 보니 치안 상태가…….”
“빈민가라고 해서 매일 범죄만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자애롭기 그지없는 음성이었으나 그 속에 깔린 귀찮음을 성기사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성하, 매일 범죄가 일어나는 곳은 아니지만 범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습니다. 빈민가 사람들을 직접 살피러 가신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한시 빨리 성녀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럼 찾으세요.”
“…….”
성의 좀. 김이 팍 식어서 영 수색할 기분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성기사는 약간 짜증이 나려고 했지만 애써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럼 지금 찾으러 가겠습니다……. 같이 안 가실 겁니까?”
“다녀오세요.”
“진짜 같이 안 가실 겁니까? 성녀님이 걱정되지 않으신 겁니까!”
조급함이 들끓는 목소리로 당장 그녀를 찾으라고 명하거나, 아니면 직접 찾겠다고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저가 다 답답한 기분이 치밀어 올라 성기사가 닫힌 문을 지그시 노려볼 때 문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걱정되죠.”
“그럼… 같이 가자니까요.”
누가 들어도 어금니를 사리문 목소리였다. 하지만 미하일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한 대답을 내놓았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돌아오겠죠.”
“…네, 알겠습니다. 성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렇게 대화는 종료되었다. 성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등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무슨 슈모르드 리리인가 라라인가 하는 영애도 거기로 갔다고 했었던가…….”
일거리가 하나 더 늘었음에 중얼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던 그때,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렸다. 성기사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시냐고 묻기도 전에 미하일의 조금 조급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다시 말해보세요. 누구라고요?”
“…네?”
아깐 안 간다더니 변덕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성기사는 표정을 간신히 가다듬고는 기계적인 톤으로 대답했다.
“슈모르드 로로인가 라라인가 하는 영애도 빈민가에 갔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보고하세요, 슈모르드 라라가 확실한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설렁설렁 대답하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단번에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성기사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자세하게 보고를 이었다.
성기사는 생각했다. 성하께서 그 영애에게 얼마나 큰 거액을 빌려줬으면 이렇게 초조해하실까 하고 말이다.
* * *
“폐하, 급히 전해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보좌관 라온 백작의 말에 정무를 보고 있던 카를라히는 손을 멈췄다. 어디 해보란 뜻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자 곧바로 라온 백작이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현재 엘리나5 공녀님께서 빈민촌에 계시다는 정보입니다. 역병으로부터 빈민가의 사람들을 돕겠다고 혼자 가신 모양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군.”
“……?”
“……?”
“……?”
알 수 없는 물음표가 그들 사이를 오갔다. 카를라히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서 책상 아래로 소심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물론 표정은 오만하기 그지없게 스윽 한쪽 눈썹을 치올렸다.
“왜 그러지? 좋은 일을 한 게 아닌가?”
“그렇긴 한데… 걱정은 안 드시는 겁니까.”
“아, 걱정.”
살짝 벌어지려는 입술을 큼큼 소리를 내며 다문 카를라히가 뒤늦게 허스키한 중저음으로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걱정이 들지. …그녀 혼자 간 건가?”
이제야 진지한 표정을 지어본다 한들 영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기사 둘이 호위로 따라간 모양입니다만, 아무래도 위험할 겁니다. 빈민가이지 않습니까?”
“여자 혼자 간 거면 몰라도 그래도 호위 기사가 둘이나 따라갔으니 약간 안심이 되는군. 그래도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닐 테니 조금은 걱정이다.”
뭔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라온 백작은 당장 일어나지 않는 폐하를 약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엘리나1과 현재 약혼 얘기가 오간다 할지라도 엘리나5와도 한때 나름 요상한 기류가 흐르지 않았던가. 애당초 곧 있으면 정식 약혼녀가 될 엘리나1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자매를 안전하게 데려올 의무가 있었다.
“걱정되는군.”
“네.”
“물론 지금쯤 대신전 측에서 먼저 움직였을 것 같군. 아니면 그녀의 공작 가문에서 병사들을 보냈을 테지. 물론 나도 당장 가서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고 싶군그래.”
입으로만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황제에게 라온 백작은 직접 가보라고 슬며시 눈치를 주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뒷짐을 지고서 서서히 노을이 져가고 있는 창문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지금쯤 퇴근 시간대라 마차가 많이 막힐 텐데 걱정이군.”
‘…대체 뭘 걱정하시는 겁니까.’
라온 백작의 어이없는 감정을 알기나 하는지 카를라히는 또 한 번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걱정이군. 요새 미세 먼지가 심하다고 하던데.”
‘아까부터 자꾸 뭘 걱정하고 앉았습니까…….’
결국 참다못한 라온 백작이 먼저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걱정이 되시는 게 아닙니까. 남은 업무는 제게 맡기시고 직접 가보시는 게…….”
“그, 황실 수색대만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경의 생각은 어떻지?”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어떻게든 밖에 안 나가려고 뻐기는 황제를 라온 백작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보았다.
하루 종일 죽어라 일만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거기다 아까 일하면서 주워 먹은 간식 몇 개로 배가 차서 카를라히는 조금 나른한 상태였다. 한마디로 남주로서 여주가 걱정은 되는데 나가긴 귀찮은 거였다.
“폐하께서 그러하시다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황실 수색대를 지금 당장 빈민가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슈모르드 자작 영애도 그곳에 있다고 하니 이왕이면 같이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따로 수색조를 파견…….”
“…그녀가 왜 거기 있다는 거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카를라히가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자 라온 백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입질이 여기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대답하라. 그게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만…….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