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 *
“판결 내리겠습니다. 약 45시간 동안 폐하를 감금한 사실, 거기에 허위 사실을 유포해 대국민적인 사기를 치고 불안감을 조성한 죄 등 죄질이 몹시 악질적이라 판단하여 피고 디체스 에스테반에게는 실형 5개월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탕탕탕.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는 청아한 소리가 재판소 안을 울렸다. 모두가 재판 결과에 순응한 채 자리에서 일어날 때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이 내가 징역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것은 엄연히 공작인 나에 대한 모함입니다.”
피고인석의 책상을 쾅, 치고 일어난 디체스가 판사를 향해 외쳤다. 서느렇게 가라앉은 검은 눈이 저기압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소유욕에 찌든 집착 남주입니다. 원하는 자를 감금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내가 얻어야 할 것은 폐하의 온전한 육체와 영혼이지, 징역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각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어떤 이유에서든 죄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고인, 더 할 말 남았습니까?”
“크흣! 이 내가 감히 누군지 알고……. 이 제국의 개국 공신가인 에스테반 공작가의…….”
“잘 압니다.”
의사봉을 내려놓으며 판사가 안경을 한번 들었다가 놓았다. 눈가에 진 깊은 주름이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러나 법은 법입니다. 피고인, 만인의 앞에서 평등해야 할 법이 공정성을 상실한다면 그 나라는 썩을 일만 남을 겁니다.”
“그래서 공작인 이 나를 가둬놓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웃기지도 않는군!”
“뭘 기대했어요. 사면이라도 받을 줄 알았습니까? 그럼 죄를 짓지 말았어야죠. 아무리 돈이 많고 잘나가는 집안이래도 죗값은 동등하게 받아야 되는 겁니다. 공작 전하, 깜빵 들어가서 특별 대우 같은 거 일체 기대하지 마세요. 다 감시합니다.”
그렇게 말한 판사는 쌩하니 그 자리를 벗어나 재판소를 떠났다.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국 최초로 빨간 줄 그어진 공작이 탄생했다.
* * *
“정말 깜빵에 갔군요……. 이 소설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요.”
라라는 엘리나4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집착 남주는 깜빵에 들어가서 앞으로 5개월간 소설에 나오지 않을 예정인 것 같았다. 로맨스가 멀어져 간 기분이었지만 이미 9234번은 그런 기분을 느낀지라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보다 엘리나1은요?”
“5개월간 못 본다니까 상심이 큰가 봐요.”
“기운 차렸으면 좋겠네요, 호호.”
할 말이 없어 가식적인 웃음만 흘릴 때였다. 엘리나4가 돌연 진지하게 눈빛을 굳히며 라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실 라라 양에게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뭐죠?”
“엘리나5에 관한 일이에요. 엘리나5에게도 역병 사건이 모두 꾸며낸 거짓이라고 설명했는데 믿질 않아요.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신이 직접 보고서 판단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 성녀 여주는 역병에 걸린 평민들을 위해 무려 직접 봉사를 나간 것이다.
“성녀로서 책임을 느낀 건지 아무리 말려봐도 제 말은 듣지 않더군요. 그나마 엘리나5와 친하게 지내는 영애가 라라 양이잖아요. 라라 양이 말한다면 그래도 듣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호호,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문제는 엘리나5가 간 곳이 빈민가라는 거예요.”
“세상에, 너무 위험하잖아요!”
엘리나4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흉흉한 범죄란 범죄는 다 일어나는 곳이 빈민가였다. 성기사가 동행한다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나5가 걱정된다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아뇨, 빈민가 사람들이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라라는 엘리나4의 말을 정정했다.
“오… 맙소사. 당장 찾으러 가야 돼요. 그곳 사람들이 뭣 모르고 엘리나5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오, 세상에…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신성력이 생명을 치유하는 힘이라고만 알고 있는 국민이 대다수였다. 빈민가에서 위험에 빠져 그 파괴적인 눈깔빔을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아마 사상자가 나오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라라가 엘리나5를 찾는 것을 서두르자며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엘리나4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전 같이 못 갈 것 같네요.”
“네? 무슨 일이 있으신…….”
“오늘 반납 안 하면 연체라서요.”
‘…뭐야, 그게.’
정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냥 해본 소리인 줄 알았는데 엘리나4는 정말 도서관으로 가버리고 라라 혼자 빈민가로 향하는 상황이 되었다.
<현명한 여주에게 있어서 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정이니라. 솔직히 이 정도는 돼야 독서광 여주 아니겠느냐.>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그냥 책 끼워 넣는다고 인성을 빼버린 격이잖아요. 완전 인성 논란 각이잖아요!’
라라는 어떻게든 실드 쳐주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여주래도 인성 논란을 피하기 힘들 거란 결론에 다다랐다.
마차를 타고 빈민가로 향하던 라라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려하던 거리가 어느새 조촐하고 외진 거리로 변해있었다. 마을 어귀부터 진입이 힘든지 마차가 멈추자 라라는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엘리나5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라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꺄악!”
<왜 그러느냐!>
‘바닥에 개똥이……! 더러워. 이 길은 도저히 못 지나가겠어요!’
<개똥 하나 가지고 호들갑은. 이래서 엑스트라 귀족 영애는 안 되는 것이니라.>
‘여길 어떻게 지나가요!’
길바닥에 흔히 널린 개똥 하나를 보고 펄쩍펄쩍 뛰는 라라에게 신이 한심하다는 양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였다. 타다다닥, 하고 골목 뒤에서 돌연 인기척이 들려왔다. 라라가 그곳을 돌아보자 벽 뒤에 숨어있던 꾀죄죄한 소년이 황급히 반대편으로 달아나 버렸다.
<저 애다! 저 애를 쫓아가거라!>
‘쟤가 누군지 알고요……?’
<빈민가의 소년은 항상 새로운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느니라. 사건의 중심에는 여주가 있으니, 저 아이를 따라가면 여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니라.>
나름 논리적인 말이었다. 라라는 소년의 뒤를 쫓았다. 조그만 게 얼마나 날쌘지 여러 번 소년을 놓칠 뻔했는데 다행히 마을 뒤편의 작은 공터까지 쫓아가는 데 성공했다.
어디로 숨은 건지 알 수 없어 공터 안을 두리번거릴 때다. 허름한 벽 뒤에 삐져나온 화사한 은발 머리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리나5를 찾았다는 감격에 라라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몸을 낮춘 엘리나5의 앞에는 어린 소녀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소녀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설마 벌써 신성력을 쓴 건가. 라라가 두려움에 주춤거릴 때 소녀가 등 뒤에서 형편없이 망가진 인형을 꺼내 보였다.
“인형… 망가져 버렸어요. 아끼는 인형이에요. …이것도 고쳐줄 수 있어요?”
소녀가 내미는 인형을 건네받은 엘리나5는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곧 고쳐줄게.”
“와아.”
울상이던 얼굴을 활짝 편 소녀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엘리나5는 인형을 들고 눈 초점을 인형의 망가진 얼굴에 맞추었다. 조금 힘을 주자 새하얀 신성력이 강렬한 섬광과 함께 그녀의 눈에서 터져 나왔다.
“위험ㅎ…….”
라라는 경악한 얼굴을 하다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일자로 뻗어져 나간 신성력이 인형은 물론 그 뒤에 있는 벽까지 부수고 지나갔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엘리나5와 소녀가 서있는 게 보였다. 엘리나5는 인형을 쥐고 있던 손을 한번 펼쳐 보였다. 까만 재가 바람에 쓸려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 고쳐주고 싶었는데 힘 조절에 실패해 버렸어……. 너의 소중한 인형을 망가뜨려서 정말 미안.”
“으, 으아아앙!”
면목 없어 하는 엘리나5를 앞에 두고 소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인형을 잃어서 나온 서러운 울음이 아닌,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였다. 살려달라는 절규에 가까운 울음은 얼마 안 가 뚝 그쳐졌다.
“으허엉… 허억!”
소녀가 가슴을 부여잡더니 곧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게거품을 무는 소녀를 끌어안고서 엘리나5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역시 역병의 발병…….”
‘아니, 누가 봐도 너 때문이잖아.’
라라는 그 장면을 조금 떨어진 채 지켜보며 생각했다.
뒤늦게 소녀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이 뛰어와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엘리나5는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역병이 이미 몸속에 깊이 퍼진 것 같아요. 일단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곧 뒤따라갈게요.” 하고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엄마는 그저 고개만 절실하게 끄덕이며 소녀를 업고 집으로 달려갔다.
사건의 진실을 소녀의 어머니에게 알리기 위해 라라가 뒤따르려던 순간이었다. 공터 구석에 숨어있던 소년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더니 엘리나5에게 다가갔다.
혹시 소녀의 복수를 하려는 걸까, 라라는 소년이 상당히 용맹하고 비범한 영웅적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라라의 예상과는 달리 빈민가 소년은 충실하게 엑스트라로서의 위치를 지켰다.
“그 힘… 신성력이죠? 맞죠? 누나는 성녀예요?”
“응, 그렇단다. 왜 그러니, 꼬마야?”
“…흐읍, 우리 엄마…가 아파요. 부탁이에요. 제발 엄마를 고쳐주세요.”
‘신성력이면 다 좋은 거냐고!’
그걸 보고도 엄마를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다니. 너무 클리셰에 충실한 나머지 소설의 위험 수위가 터무니없을 만큼 높아진 기분이 들었다.
저러다 사람 하나 잡는 게 아닌가, 라라가 불안한 예감에 몸을 떨 때 엘리나5가 소년을 앞장세운 채 걷기 시작했다.
라라는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판자촌의 허름한 집이었다. 소년은 집 대문을 열고서 슬픈 얼굴로 엘리나5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방 안에 계세요.”
“먼저 들어가 볼게.”
“아, 안 돼! 엘리나5……!”
막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엘리나5가 살짝 놀란 듯 눈을 키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슈모르드 양?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