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57)화 (57/115)

57화

결국 디체스는 마음을 열었다.

“저번에 얘기했다시피 나의 어머니는 애증의 대상으로 아버지와 나를 두고 여러 남자와 바람을 피웠던… 생략… 나의 어머니의 친언니, 즉 나의 이모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미칠 만도 합니다. 나의 어머니의 친언니이자 즉 나의 이모는 정말이지 무심한 성격으로 나의 이종사촌이 되는 나의 어머니의 친언니이자 즉 나의 이모의 아들을 학대했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뒤로부터 나는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엘리나1은 디체스의 과거 얘기를 들어주며 힐끗 멀리 떨어진 벽을 주시했다. 벽 뒤에 얼굴을 내밀고 있던 라라가 한쪽 눈을 깜빡여 신호를 보냈다.

“정말 슬펐겠어요. 여성 편력이 생길 만해요, 디체스. 그러니까 잠깐 식당에 내려가지 않을래요? 배가 조금 출출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걸 받아들여야 나는 그대를 내게 적합한 여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포기할 경우 다음 여주에게 인수인계 확실히 해주십시오. 아무튼 이어서 말해주겠습니다.”

“네, 네에.”

정말 극한 직업 여주가 아닐 수 없었다. 라라는 엘리나1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왼쪽 눈을 찡긋해 주고는 곧바로 폐하가 갇혀있을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엘리나1이 나가면서 살짝 열어둔 것인지 방문은 열려있었다. 들어선 침실 안은 어두웠다. 라라는 방 안쪽에 쳐진 붉은 커튼을 거두었다. 그 안에는 폐하가 아닌 페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디체스 공인가?”

“아, 풀어드릴게요.”

라라는 곧바로 앉아있는 그의 뒤로 돌아가 귀마개와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눈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푸른 눈이 라라의 얼굴을 담기 무섭게 커다랗게 떠졌다.

“…라라?”

“괜찮으세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보다 전염병이 전보다 더 많이 확산됐을 텐데 위험하질 않나.”

“그 전염병은 거짓이에요.”

눈가리개를 아래로 끌어내리던 그의 손이 멈칫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페아의 뚫어져라 전해져 오는 시선에 라라는 약간 낯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덧붙였다.

“전부 디체스 공작님이 꾸며낸 말이에요.”

“그럴 리가……. 공작이 우릴 속였단 건가?”

“네, 저흰 그동안 얌전히 방 안에만 틀어박힌 채 예방 수칙이라는 그의 말에만 따랐죠. 한마디로 공작님의 소유물이 되었던 거죠.”

“대체 왜 그런 짓을…….”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일단 여기서 나가요. 엘리나4가 지금 자신이 발명한 마법 도구를 이용해서 이 사실을 수도는 물론 전국에 퍼뜨리고 있어요. 곧 도와줄 사람이 올 거예요.”

라라의 희망찬 말에 카를라히는 심각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라라가 먼저 신속하게 문 앞에 섰다.

<집착 소유욕 남주에게 감금당해 있다가 마침내 도망치는 부분이 가장 스릴 넘치느니라. 물론 얼마 안 가서 잡히지만.>

‘하긴……. 저도 수많은 집착 감금물 동인지를 봐왔지만 주인공 무사 탈출을 지향하는 동인지는 아직까진 본 적이 없어요.’

<평생 구속당하는 주인공이 불쌍하긴 해도 잡혀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우리들의 변태스러운 마음 아니겠느냐? 그 잡히는 뻔한 부분이 묘한 희열을 준달까.>

‘클리셰대로면 결국 잡힌다는 소린데 뭐 하러 긴장한 거죠? …이왕 잡히는 거 그냥 설렁설렁 갈게요.’

라라는 방금까지 활활 타올랐던 탈출 의욕을 상실하고 느릿느릿하게 문고리를 돌렸다. 문틈 새가 2cm 정도 벌어지자 그 사이로 디체스의 음영 진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벌써 눈치채고 쫓아온 것이었다.

“그보다 페아, 혹시 폐하께서 어디 계신지 알고 계세요?”

하지만 잠시 뒤를 돌아보느라 라라는 문 앞에 서있는 디체스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면전에 대고 다시 문을 닫기까지 했다.

“폐하라면 여기 있지 않나.”

“호호, 페아 말고요.”

“그러니까 폐하가 난데 대체 누구를 찾는 거지? 적국의 폐하와도 친한 건가?”

“여기서 적국이 왜 나와요……? 정말 폐하가 어디 계시는지 모르세요?”

“미안하다만, 네가 그토록 찾는 폐하는 여기 있지 않나?”

한마디도 지지 않고 토를 다는 그의 모습에 라라는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문고리에 힘을 주고 돌리자 그 사이로 디체스의 음영 진 얼굴이 또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동시에 뒤를 돌아 카를라히와 눈을 마주친 라라는 그를 보지 못했다.

“지금 말장난 칠 시간 없어요, 제발요.”

“그러니까, 여기 있지 않나?”

“아뇨, 제가 원하는 사람은 페아가 아니라 폐하인데요……!”

먼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쪽은 카를라히였다. 어느새 라라를 앞질러 그녀 앞에 선 그가 팔을 뻗어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지그시 문부터 닫았다. 디체스의 얼굴이 사라졌다. 카를라히는 조금 탐탁지 않은 기운이 섞인 짙푸른 눈으로 라라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원하는 자가 내가 아니면 누구란 소리지?”

어딘가 못마땅한 음성이었다. 라라는 잠시 볼을 붉혔다. 살짝 찌푸린 미간은 왜 이렇게 섹시하게 보이는지 새삼 그의 외모에 심정지가 올 것만 같았다.

허공에 피어난 상상 속 장미들을 급히 지워내고서 라라는 다시금 말했다.

“폐하요.”

“…….”

그는 인내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 카를라히를 지나쳐 라라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있는 디체스를 발견하기 직전에 라라 또한 답답함에 눈을 감아버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폐하가 어딨는지 말씀해 주세요. 아시는 거죠?”

“그러니까 폐하는 난데 대체 누굴 그렇게 애타게 찾는 거지?”

“네, 알아요. 페아시잖아요. 제가 찾는 사람은 페아가 아니라 폐하라구요. 말장난 칠 여유 없어요.”

“그러니까 난 폐하인데, 대체 나 말고 또 다른 폐하가 누구냔 말이다.”

카를라히도 질끈 눈을 감은 터라 문 옆에 비켜선 디체스를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 뒤를 디체스는 야차처럼 엄한 얼굴을 하고선 조용히 뒤따랐다.

“공작님이 오시기 전에 폐하를 찾아 이곳을 빠져나가야 돼요. 어서요!”

라라가 눈을 떴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페아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왔다.

“긴 얘기가 필요해 보이는군.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그 또 다른 폐하가 누구지? 생김새는?”

“사실 저도 직접 뵌 적은 없어요. 듣기로는 로맨스 소설에 적합한 남주상이라고 들었어요.”

“흐음, 나도 꽤 주위에서 남주상이라는 말을 듣는다만.”

라라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넓은 가슴팍에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사내의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서로의 얼굴에 왠지 민망해진 듯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라라의 뺨이 서서히 붉어졌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서 꽁냥꽁냥 썸을 타겠다, 이 말입니까.”

“…써, 써, 썸이라니욧!!”

바로 옆에서 들려온 말에 라라는 화들짝 놀랐다. 정확히는 갑작스러운 디체스의 등장에 놀랐다기보다는 그의 단어 선정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이지 왜 하나같이 온전한 내 소유가 되길 거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단둘이 몰래 연애가 하고 싶습니까? 두 사람 다 내 것입니다. 훨씬 이전부터 내 소유물이었…….”

“그래요! 공작님 것이에요! 소유물 할 테니까 그만 말해욧!! 진짜 아니란 말이에욧!”

“믿어도 되겠습니까.”

“네! 신체 포기 각서 쓸 테니까, 제발 좀!!”

화끈거리는 낯을 누른 채 두 발만 동동거리는 라라를 앞에 두고서 디체스는 그 자리에서 빠르게 각서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라라가 막 지장을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용납하지 못하겠군.”

침착함을 되찾은 카를라히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라라의 엄지손가락을 강하게 붙잡았다. 억지로 인주에서 떨어뜨리는 그 박력 넘치는 행위에 라라는 살며시 볼을 붉혔다. 이대로 엄지가 꺾여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의 강제적 행위에 놀란 카를라히가 먼저 화들짝 놀라며 엄지를 놓아버렸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그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 그럼 공작, 이 나와 제국 전체를 주무르기 위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 사실인가.”

카리스마로 무장한 그의 얼굴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함만이 어려있었다. 서느렇게 깔린 벽안에 디체스는 몸을 낮추었다.

“대답하라. 이 내게 잔인한 고문법을 사용하도록 만들 참인가.”

“…송구하오나 폐하, 쉽게 입을 열 거라 생각합니까. 이 제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밀하게 일을 꾸민 것인지 정녕 이해하신다면…….”

“황궁 바닥에 있는 껌 500개 떼기, 매일 밤 10시까지 황궁에 남아서 깜지 100장씩 쓰기,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2절지에 상상화 그려 오기, 통일 포스터 그려 오기, 통일 글짓기는 원고지 200장 이상 써 오기, 거기다 일주일 안까지 역사 독서 감상문 30편 써 오기.”

“죄송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디체스는 무겁게 죄를 실토했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어떻게든 그 잔혹한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듯 끝이 갈라져 있었다.

“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황제의 자리가 탐나기라도 한 건가. 최악의 경우 반역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

“자리에는 관심 없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황제라는 인간이 탐이 났을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지고, 아무도 쉽게 손댈 수 없는 황제까지 손에 넣는다면 얼마나 만족스럽겠습니까.”

차분한 흑색 눈이 순간 탐욕스럽게 빛났다.

“폐하, 그대는 죽어서도 내게 도망칠 수 없습니다.”

“…휴우.”

“뒤에서 자긴 아닌 줄 알고 안도하고 있는 라라, 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끓어오르는 뜨거운 소유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디체스가 말했다. 이 갈증을 풀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왜냐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담 공의 죄를 인정하겠나?”

“인정 못 할 것은 뭡니까.”

그리고 그 발언을 정확히 다음 날 디체스는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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