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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56)화 (56/115)

56화

“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 읏.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공자님을 데리고 여길 떠나라고요!! 팥죽팥죽팥죽…이걸 백 번 들으면 당신들은 모두 죽는다고!!”

째질 것 같은 새된 목소리가 시장 바닥을 뒤흔들었다. 시녀의 주위에 있던 행인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한 행인이 “…팥죽.” 하고 작게 노래를 따라 했다. 이를 시작으로 행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도망쳐!”

“꺄악, 나도 들어버렸어!”

“아아아악!!”

“엄마!”

한 아이가 엄마를 잃고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 부딪치고 부딪치는 통에 시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알 수 없는 역병이 본격적으로 수도를 덮친 것이다.

* * *

황제 카를라히는 상석에 앉아 보고를 받았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역병에 관한 보고였다.

“수도 문을 봉쇄하고 철저한 검역 시스템을 이용해 더 이상 피해가 확산되는 일이 없도록 일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수고하는군.”

디체스는 고개를 한번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특이하게도 이번 역병은 저주와 비슷해 팥죽을 100번 이상 듣거나 혹은 말하면 죽게 된답니다. 현재까지 사망자는 총 27명으로, 진짜 죽었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가? 그 죽었다는 거 말이다.”

“네, 뉴스에서 봤습니다.”

초딩이 괴담을 친구한테 말할 때 짓는 표정처럼 굳건한 신뢰를 담은 표정이었다.

카를라히는 시름겨운 한숨을 흘리며 오른손을 들어 미간을 주물렀다. 정신을 지배하는 저주 속성이라면 확실히 골치 아팠다. 어떤 자가 이런 짓을 벌인 건진 몰라도 제국을 해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은 막아야 했다.

“신전 측에서도 이 역병을 물리칠 방법을 찾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불안해 보이는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디체스가 조용히 속삭여 왔다.

“앞으론 폐하께서도 방 밖으로 나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팥죽송을 듣게 되시면 안 되니까요.”

“알겠다. 그보다 공이 이렇게 직접 나서주니 고맙군.”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디체스가 직접 나서서 질병관리본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나서주니 카를라히로서는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약혼식은 무리일 것 같으니 공녀와의 약혼식은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상황이 나아지면 그때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대 말에 따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디체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을 막아서듯이 섰다. 뻗어진 두 손이 카를라히의 턱을 지나 귀를 덮었다.

“이번 역병은 저에게 맡기십시오.”

“…공작?”

“앞으로 이 나만 믿고, 이 내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되는 겁니다.”

바싹 귀에 가져다 댄 입술을 떼어내며 디체스가 소유욕에 찌든 눈을 은밀히 드러냈다.

* * *

전국에 외출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역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최선책이라며 공작인 디체스가 강력하게 밀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시민들은 얌전히 집에 틀어박힌 채 배식을 받아먹고 지내었다. 벌써 74명이 사망했다는 흉흉한 뉴스까지 도니 거리로 나오는 게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엘리나1과 엘리나4가 개인적으로 슈모르드 저택을 방문했다. 둘이서 조용히 찾아온 것이 라라는 왠지 수상쩍다고 생각했는데, 의심한 것이 미안할 만큼 엘리나1은 저번의 가출 소동에 대해 정직하게 사과했다.

“오해가 있었다고 들었어. …다른 엘리나들과도 얘기를 끝냈어. 다들 라라 너에게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어.”

“그날 일은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라라 양.”

엘리나4까지 합세해서 사과하니 라라도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네, 알겠어요. 엘리나1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암은 나았어?”

“깔끔하게 치료받았어.”

그 뒤로 대화는 없었다. 얕은 침묵이 깔리자 라라는 조용히 티스푼을 들어 차를 한번 휘저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와 약혼한다고 들었어. 축하해. 아, 역병 때문에 약혼식이 미뤄진 건 안타깝게 됐어.”

“고마워……. 사실 이전에 해야 될 말이 있어.”

엘리나1은 한참 동안이나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늦게 입술을 열었다.

“이번 역병 사건 말인데… 사실 전부 가짜야.”

“응? 뭐라고?”

라라의 물음에 엘리나1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곧 눈물을 글썽였다. 괴로움에서인지 말을 하지 못하고 끅끅거렸는데 그런 그녀를 대신해 옆에 앉아있던 엘리나4가 논리적인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조작된 일이에요. 뉴스에선 지금 100명 가까이 죽었다고 하는데 전부 거짓말이에요. 제가 직접 실험해서 밝혀낸 사실이에요.”

“그런…….”

“팥죽을 백 번 말하고 들었어요. 아니, 천 번은 더 들은 것 같네요. 하지만 제 몸엔 아무런 이상도 없죠. 제가 여기 존재해 있는 게 바로 팥죽송이 가짜 역병이라는 것의 증거예요.”

“너에겐 꼭 고백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디체스… 그 사람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떨떠름한 반응을 내놓자 엘리나1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자신과 폐하의 약혼 소식에 반쯤 미쳐버린 디체스가 거짓 역병 사건을 꾸며내 모두를 그의 소유하에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사실일 수가…….”

“최초 유포자라고 소문이 난 공작가의 시녀는 사실 디체스가 고용한 전문 배우야. 시녀가 데리고 나온 그 공자라는 아기도 아역 배우고. 애초에 그런 이름의 공작 가문은 없어.”

“그걸 왜 우리가 몰랐단 말이야?”

<그거야 주인공 미만은 잡이니까 그러하다. 주인공이 계획한 일은 아무리 허술해도 엑스트라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느니라. 주인공보다 똑똑하고 잘난 엑스트라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

“…그런, 그런 유치한 작전에 우리가 놀아났다니…….”

라라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전율에 가까웠다.

“라라 양,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팥죽을 백 번 불러보세요.”

“그러다 돌연사하기라도 하면…….”

“절 믿고 해봐요.”

“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

눈을 꼭 감고 라라는 팥죽을 빠르게 백 번까지 채웠다. 심장이 쿵쿵 뛰고 발끝이 저릿했지만 심하게 긴장한 것치고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엘리나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 * *

불이 꺼진 화려한 침실 안. 수도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 앞에 앉아있는 자가 있었으니, 제국의 공작인 디체스 에스테반이었다.

“1,587,612명이 모두 얌전히 방 안에 갇혀있는 모습, 보기 좋군요.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습니다.”

모든 제국민이 제 손아귀에 들어오다니, 얼마나 흥분된단 말인가. 디체스는 와인을 한번 들이켠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실 안쪽에 쳐진 붉은 커튼을 거두었다. 침대 위에는 카를라히가 눈가리개와 귀마개를 하고 앉아있었다.

“…공작? 공작인가?”

“네. 접니다, 폐하.”

“…아무리 병에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자네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을 찾는 아이처럼 희미한 목소리에 반응해 꿈틀대는 황제를 디체스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곧 그가 카를라히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귀마개로 막힌 귀에다 입술을 가져다 대고 은밀한 제안을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이 내게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잘 들리지 않는군.”

“아아, 송구하지만 폐하, 전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발버둥 쳐보십시오, 이 좁은 침대 위에서.”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침실문 밖으로 나왔다. 문에 자물쇠를 채우려는 순간, 디체스의 앞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만하세요…….”

“이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다니. 엘리나1, 지금 이 나를 도발하는 겁니까?”

“미안해요. 하지만 도저히 방에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엘리나1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팔을 강하게 쥔 디체스가 그녀를 곧장 복도로 끌고 나왔다.

“자꾸 그러면 당신만 하루 종일 감시할 줄 아십시오. 어서 돌아가십시오. 아니면 내 방에 가둬버릴 겁니다.”

“…그래 주세요.”

“뭐라고 했습니까?”

“가둬주세요. 절, 저만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엘리나1은 디체스의 옷자락을 꽉 그러쥐고는 눈물이 그득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만으로는 부족한가요?”

“…….”

“저만 집착해 줄 순 없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까지 집착하는 건 이제 그만둬 주세요.”

“당신은 나를 이해 못 합니다, 절대.”

디체스는 매정하리만치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뺨을 붙잡고 엘리나1은 다시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얘기해 주세요. 듣고 싶어요. 당신의 어린 시절…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변하게 만든 건지.”

프로파일러가 아닌가 싶을 만큼 차분하고 전문적인 대응이었다. 그 태도에 디체스는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엘리나1, 그대는 어째서… 나의 신분도 재력도 명예도 보지 않고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는 겁니까. 나의 모든 걸 받아주려 하는 겁니까.”

“얼굴 봐요.”

“아하.”

디체스는 작게 감탄했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는 유형의 여자는 142명 정도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엘리나1은 특별했다.

이제까지 만난 다른 여자들이 모두 가볍게 노는 정도의 여자였다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그런 유형의 여자였다. 남주의 까다로운 내부 심사에 통과한 엘리나1은 그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듯 맑은 눈으로 디체스를 온전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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