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에드가3, 가자고!”
“예!”
엘리나3은 베테랑 기사와 함께 몸을 숙여 구를 향해 뛰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크어억!”
돌연 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기둥에 베테랑 기사가 옆구리를 데이고 넘어졌다. 엘리나3이 급히 그에게로 뛰어가려 하자 베테랑 기사가 크게 외쳤다.
“오지 마!”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다. 네 몸 안전을 우선시해!”
그 비장한 충고에 엘리나3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불투명한 재질의 동그란 구속에 엘리나2와 연한 금발의 남자가 함께 갇혀있었다.
‘아니, 갇혀있는 건가…….’
애당초 이 힘은 어딘가 익숙했다. 평소 엘리나2가 정령왕들을 소환해 사용했던 힘들과 흡사해 보였다.
‘…폭주 상태인 건가.’
역시 여주답게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단번에 상황 파악을 끝낸 엘리나3이었다. 그녀는 눈을 굴려 주위를 확인하고는 검 손잡이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이 몸의 힘이 필요한가.”
“…마검.”
“나를 잡아라. 그러면 힘을 빌려주지.”
“널 사용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이대로 두면 저 둘은 다칠지도 모르는데도 말인가?”
“……!”
엘리나3은 손가락을 떨었다. 마검 손잡이에 닿은 부분이 어쩐지 살아있는 것처럼 진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소중한 사람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마검인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지.”
“안다. 나도 한때는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마검의 말에 엘리나3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나를 사용해라, 인간. 힘을 빌려주지.”
그때였다. 구 안에 앉아있던 엘리나2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전조에 엘리나3은 마지못해 손바닥 안에 검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알겠어.”
엘리나3은 고개를 들어 엘리나2를 응시했다. 구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다짐이 은빛 눈동자 속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곧바로 검을 추켜세우고 구를 향해 달려가려 할 때 마검이 다급하지만 다급하지 않은 척 서둘러 말을 붙였다.
“이봐, 아직 아냐! 그… 힘을 사용하려면 잠깐 시간이 필요하다.”
“분노 게이지 같은 건가.”
“그래! 그거! 그러니까 좀만 기다려라. 내가 곧 엄청난 힘을 모아서 어! 아주 이것들을 끝장을 내버릴 테니까. 아뵤~!”
4, 50대 아저씨 특유의 허세가 담긴 말투였다. 엘리나3은 조용히 검을 세운 채 기다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모아질 때까지 말이다.
한 30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구 안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상체를 흔들거리던 엘리나2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어정쩡한 자세로 선 채 안절부절못하더니 곧 미하일에게 말을 건넸다.
“잠깐 나 화장실 좀.”
서둘러 구 밖으로 뛰쳐나온 엘리나2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언제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엘리나3과 그녀 뒤에서 대기를 타고 있던 기사 셋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물을 내리는 소리에 맞춰 형성되어 있던 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미하일을 완전히 놓아주었다. 엘리나2 스스로 정신적 압박에서 풀려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엘리나3은 자신의 손에 들린 마검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검, 네 짓인가?”
“…어? 아, 그래……! 마, 내가 했다 아이가.”
졸다가 깬 목소리였지만 라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이 몸, 엑카튜르스 파올스 올라비오스카 님이 한 것이다! 마검의 무서움을 알았겠지,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이름이 바뀐 것 같은데, 아무튼.”
기사들은 안도한 얼굴로 하나둘 엘리나3의 곁으로 다가와 뭔지는 몰라도 잘했다며 어깨동무를 하거나 등을 툭툭 쳐주었다.
“에드가3 경, 공로를 인정하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게 아니라…….”
“아니, 겸손한 태도는 버리게. 그대가 우리와 이자들을 구한 거야.”
아, 엘리나3은 마검을 쥔 손에 더 힘을 꽉 불어넣었다. 지켜보였다, 이 자신이.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이 손으로 지켜내 보였다.
단전에서부터 뜨겁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느꼈지만 엘리나3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입술 끝을 끌어 올릴 뿐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문밖에서 지켜보던 라라는 서둘러 뒤를 돌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자기 방만큼이나 안전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7장 역병의 정석
야심한 밤이었다. 어둠에 파묻힌 숲을 달리는 한 여자가 있었다. 평소 공작이 사냥터로 이용하는 곳이라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곳이었다.
망토를 두른 여자는 시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에젠타 공작가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공작가의 시녀임이 틀림없었으나 단정해야 할 여자의 행색은 지저분했다. 풀어 헤쳐진 머리는 산발이었고 그중 잔가지에 걸린 몇 올의 머리카락은 끊어져 있었다.
“으애앵……. 으아아아앙!”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적막한 숲속을 울렸다. 다름 아닌 시녀의 품에 안겨있는 갓난아이였다.
“지금 시간에 배고프실 리가 없을 텐데…….”
난감해하는 것도 잠시, 시녀는 누가 들을세라 멈춰 서서 능숙한 손길로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뚝, 착하죠? 공자님, 울지 마세요.”
토닥토닥 두들기는 따스한 손길에 아기는 울음을 그쳤다. 아직 배냇머리지만 붉디붉은 적발은 에젠타 공작의 핏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공자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자 시녀는 숨 고를 틈도 없이 달렸다.
정신을 반쯤 놓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숲을 헤쳐 나간 끝에 숲의 끝자락에 간신히 도달할 수 있었다. 울타리의 구석을 더듬는 손은 신속했다. 약간의 틈이 만져지자 거침없이 그 부분을 발로 밀어냈다.
미리 구멍 난 부분에 판자를 대논 것이었는지 곧 성인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 나타났다. 역시 시종 아이에게 들었던 대로였다. 시녀는 울타리 끝부분에 난 구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 한참을 더 달렸다.
길은 수도 외곽의 마을로 이어졌다. 달리는 중에 발목을 접질려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나 시녀는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안해. 마리, 제인느, 카산드라. 너희는 내 영원한 친구지만 난 살고 싶었어…….’
거친 숨을 내쉬며 시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어둠을 몰아내고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새벽하늘은 희망적이었지만 시녀의 마음은 좌절로 가득 차올랐다. 고개를 푹 꺾자 자신의 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의 모습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마님……. 하지만 차마 공자님을 죽게 만들 순 없었어요.’
사태가 진정된다면 그때 공자님을 데리고 다시 돌아가리라. 설령 그것이 제 명을 단축하는 일이 되더라도, 시녀는 이미 굳게 다짐한 일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비장하기까지 했다.
터덜터덜 마을로 들어선 시녀는 결국 얼마 가지 못해 골목 귀퉁이에 주저앉았다. 아기를 보호하듯 꼭 끌어안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시녀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음에 정신이 들었다. 호객 행위라도 하는지 시끌벅적한 외침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웅…….”
“공자님, 깨셨어요?”
언제 일어난 건지 어린 공자는 눈을 뜬 채 입술만 웅얼거렸다. 배가 고픈지 손가락을 자꾸 입에 가져가자 시녀는 어떻게든 일어나야만 했다.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활기를 띤 시장이 보였다.
골목 모퉁이에서 빠져나온 시녀는 시장 한복판으로 자연스레 몸을 숨겼다. 그리고 아기에게 먹일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때 웬 지나가는 행인이 어깨를 부딪쳐 왔다. 시녀는 중심을 잃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발목을 한 번 더 접질린 탓에 발목의 고통이 한층 더 심해졌다.
“이보시오! 괜찮소?”
“여기 아기 안 보여요? 조심 좀 하세요.”
“미안하게 됐소, 처자. 아기는 어디 안 다쳤는감?”
“어딜 만져요? 죽…….”
“까칠하게 굴지 말고 어디 좀 봐요. 이래 봬도 내가 이곳에서 의원 일을 하는 사람인데…….”
“죽……. 어떡해, 옮아버렸어.”
시녀의 얼굴이 빠르게 흙빛으로 굳어갔다. 심각하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여자의 모습에 행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여인에게 다가섰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더 이상 제게 다가오지 마요!”
“처자, 대체 그게 무슨?”
“죽… 팥… 죽… 아니에요. 전 이미 가망이 없어요…….그러니, 도와주세요. 제발 저한테서 이분을 멀리 데리고 가주세요. 이분은 에젠타 공작 가문의 장자이신, 하나뿐인 공자님이세요. 이 붉은 머리칼과 등에 난 여덟 개의 점이 공자님이라는 걸 증명해 줄 거예요.”
“무, 뭐라 했소, 지금? 공작가의 장자라니…….”
쓰러질 사람처럼 행인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으나 시녀는 강경했다. 아기를 제 품에서 떨어뜨린 후 강제로 행인의 품에 안겼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멀리 데려가 줘요, 가문 사람들 몰래… 잠시 데리고 나온 거란 말예요.”
“이 사람이 큰일 날 짓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곳은 이미……. 그곳으로 공자님을 돌려보낼 순 없어요. 그러니 절 믿고 가주세요. 편지는 써두었답니다.”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겠소? 지금이라도 추격대가 쫓아올 텐데. 지금이라도 돌려보내는 것이…….”
행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 돼요! 절대 공작 가문으로 돌려보내선 안 돼요! 제 말 명심해요. 마님도, 주인님도, 제 친구들도 모두가 전염되었으니까…….”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임을 밝힌 시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행인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라고, 공자님만은 어떻게든 살려내야 했다.
“심각해요……. 죽, 내가 살다가… 팥죽, 이런 일을 겪게 되다니 팥죽… 팥죽.”
시녀는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괴로움에 가슴을 붙잡고 헐떡이다가 끝내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토했다.
“팥죽… 팥죽팥죽팥죽…….”
“처자, 대체 뭐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