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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54)화 (54/115)

54화

엘리나2가 놀란 눈을 하고 미하일과 로잘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로잘리는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댔고, 미하일은 머리만 연거푸 쓸어 넘겼다.

“언니, 양치를 같이 한 건 정말 우연이었어! 방에서 양치를 하다가 거품을 뱉으려고 화장실에 가니까 미하일이 양치를 하고 있길래… 그래서 옆에서 같이 한 것뿐이야!”

“그래도 이 늦은 시간에 단둘이서 이를 닦았다는 게 좀 그렇잖아. 하하, 두 사람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는 거지?”

“언니… 내가 언니를 속일 리 없잖아. 자꾸 그런 식으로 의심하지 말아줘!”

“의, 의심이라니! 로잘리,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궁금해서…,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장난스러운 표정에 점차 흐릿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엘리나2가 그들 앞을 막고 서서 빈껍데기처럼 헤헤 웃을 때 미하일이 먼저 그녀를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 닦았다고.”

“하하, 미안미안……. 늦은 시간에 걸고넘어진 것 같아서.”

미약한 짜증이 섞인 그의 말에 엘리나2는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 웃어넘겨야만 했다.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함께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과민 반응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친한 동생과 그를 의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싸했다. 치약을 삼킨 것처럼 페퍼민트의 싸한 기운이 심장 주위로 퍼졌다.

“어라, 나 왜 눈이 뿌옇지…….”

엘리나2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적거렸다.

“미안해.”

“언니… 눈에 먼지 들어간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엘리나2와 로잘리는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라라는 뿔뿔이 흩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안 주무시면 대답 좀 해주세요. 지금 이 상황 보니까 엘리나2가 미하일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너무 급전개 아닌가요?’

<아마도 남주악녀단둘이 현상일 것이니라.>

‘남주악녀단둘이 현상이요?’

<그러하다. 남주와 악녀가 단둘이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술렁이는 게 여주이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이니 내버려 두어라.>

‘믿어도 되는 거죠? 아무튼 믿고 잘게요.’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든, 삼각관계 로맨스를 하든 더는 저 셋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라라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땐 몰랐다. 이날 뒤로 어떤 거지 같은 삼각관계 비스무리한 게 기다리고 있을지.

노릇노릇하게 굽는 소리와 버터 냄새가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라라는 남장을 하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연한 금발을 한 갈래로 묶어 내린 미하일이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접시 좀 가져와 줘.”

“네.”

라라는 차곡차곡 쌓인 하얀 접시를 들고 조리 중인 그의 옆으로 갔다. 그는 계란과 베이컨을 첫 번째 접시에 나란히 올려놓고는 웬일로 친절한 톤으로 말했다.

“난 베이컨 안 먹을 거니까 첫 번째 접시는 네 접시 해.”

“네.”

두 번째 접시는 그의 접시인지 계란만 하나 얹고 끝이었다. 나머지 두 접시를 들고 프라이팬 옆에 가져다 대자 미하일이 뒤집개를 내려놓았다.

“다른 녀석들 건 됐어. 일어나면 자기들이 알아서 덜어먹겠지. 네 거랑 내 것만 우선 들고 가.”

“아, 네.”

“일일이 대답할 필요 없어.”

피식하고 웃으며 미하일이 말했다.

대충 세팅해 놓은 식탁에 미하일과 마주 보고 앉아 막 아침 식사를 시작할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로잘리와 엘리나2가 걸어 나왔다.

로잘리는 미하일의 옆에 탁 소리가 나게 앉았다. 엘리나2는 눈을 비비적대며 라라 옆에 앉았다.

“뭐야? 왜 내 접시가 비어있어!”

그때 소프라노 톤의 앙칼진 음성이 식탁 위를 울렸다. 로잘리가 거칠게 일어나자 붉은 머리카락이 풍만한 가슴 위로 흔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라라를 향해 삿대질을 일삼았다.

“평민 기사, 바른대로 말해! 네가 먹었지!”

“아뇨, 로잘리 건 저기 프라이팬에 있어요. 덜어 먹으세요.”

“하, 감히 나한테 덜어 먹으라는 그딴 망발을……!”

로잘리가 흥분해서 탁자를 두 손으로 세게 내려치자 곧바로 못 들어주겠단 듯이 미하일이 일어났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내가 덜어주면 되냐?”

“그래 주신다면 너무 감사하죠, 미하일.”

로잘리는 요사스럽게 미하일의 팔에 매달려 눈웃음을 쳤다. 그런 그녀를 가볍게 떨쳐낸 미하일은 프라이팬을 들고 와 식탁 앞에 섰다.

먼저 로잘리에게 반숙을, 그다음 엘리나2에게는 완숙을 각각 덜어주고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로잘리가 포크를 대기 무섭게 계란 노른자가 톡 터지며 하트 모양으로 퍼지는 게 아닌가. 이에 놀란 것은 로잘리 당사자도, 덜어준 미하일도 아닌 엘리나2였다.

“…아.”

순간 세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로잘리는 급히 엘리나2의 표정을 살피며 우연일 뿐이라 해명했지만, 엘리나2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는 양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미안, 나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이만 들어가 볼게. 하하, 다들 식사해.”

“언니! 내 말 좀 들어봐!”

황급히 엘리나2를 붙잡기 위해 로잘리가 손을 뻗었다. 이에 놀란 엘리나2가 뿌리치기 위해 손을 휘둘렀는데 그 손은 로잘리의 왼뺨에 정통으로 날아 들어갔다. 쫘악, 하는 찰진 소리가 주방 안을 뒤흔들었다.

“이봐, 엘리나2. 너무 심하잖아.”

이때 끼어든 자가 있었으니 미하일이었다. 그는 눈치 없는 남주의 정석대로 여주와 악녀 사이에 끼어들어 악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계란 노른자가 하트 모양으로 터진 게 뭐 어때서. 이게 싸대기를 때릴 이유가 되냐? 어젯밤부터 답답하게 혼자 오해해서 꽁해있지 말고 대체 뭐가 문젠지 말해.”

“…그게, 그게 미안해!”

엘리나2는 따귀를 날린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서는 두렵다는 눈을 하고는 움찔움찔 뒤로 물러섰다. 이에 감정이 동화된 정령왕의 힘이 폭주한 것인지 그녀의 주위로 사나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들의 눈치를 보다 이제 막 한입 먹으려던 라라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 접시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아다니는 접시와 계란프라이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갈라지는 바닥 위로 불과 물이 뒤섞인 바람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다… 다 내 잘못이야…….”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집 안 풍경에 엘리나2는 무거운 자책감을 숨기지 않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주위로 점차 파괴적인 정령왕들의 힘이 뭉쳐져 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엘리나2는 그 속에서 웅크린 채 까맣게 타들어 간 눈을 했다. 평소의 웃음기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미하일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단 듯이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자신의 집이, 부서지고 있었다.

“저 미친 게 $#%@!”

라라는 그가 저렇게 심한 욕을 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하긴 어느 인간이라도 자기 집이 이 꼴이 된다면 화가 날 만했다. 그 집이 아직 대출을 덜 갚은 집이라면 더더욱.

“안 되겠어. 말려야겠어.”

허리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미하일이 성큼 앞으로 향했다. 그때 로잘리가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아챘다.

“위험해요! 그러다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넌 저 녀석의 친한 동생이 아니었냐? 말려야 될 거 아니야.”

“그, 그렇긴 하지만 지금 언니는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집을 버리자고? 주택 보험 안 들어놨다고! 제길!”

집을 구하기 위해 미하일은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반투명한 구를 향해 뛰어들었다. 로맨스 따윈 버린 존나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미하일!”

다리에 힘이 풀린 로잘리가 자리에 주저앉아 그의 이름을 외쳤다. 처절함이 뒤섞인 비명이 바람을 타고 라라에게 닿았다. 라라는 신고 포지션을 맡은 목격자1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껏 그 자리에서 도망쳐 달렸다.

한참을 달려 숲을 벗어나자 대신전의 서측 출입문이 나타났다. 라라는 대신전 안에서 모든 연락망을 담당하는 통신부로 찾아 들어갔다. 깔끔한 정복을 갖춘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라라를 맞이했다.

“사랑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황실기사단이요! 당장 걸어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이 마법으로 만들어진 통신기에 빠르게 좌표를 입력했다. 평화로운 수신음이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 쪽에서 받은 건지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전과 정성을 다하는 황실기사단입니다.

“여보세요. 지금 큰일 났어요! 엘리나2가 폭주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디시라고요?

“아, 그게 여기가 수도 대신전이고요. 대신전 숲속에 있는 작은 저택에서 지금 사고가 발생했는데요.”

―네, 사고 접수를 위해 무슨 사고인지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게 엘리나2가 폭주를 했는데요. 지금 교황님이 말리기 위해서 엘리나2에게 접근했구요.”

―엘리나2가 혹시 왜 폭주를 했는지 아시는 것 있으신가요?

“그게, 악녀의 계란프라이가 반숙이었는데 하필 노른자가 하트 모양으로 터져……. 푸흝흐흐릅.”

심각한 분위기에 비해 이유가 거지 같아서 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터지고 말았다. 책상에 얼굴을 박고 웃음을 참기 위해 끅끅대다가 뒤늦게 마저 상황 설명을 끝낼 수 있었다.

―신속한 진압을 위해 지금 바로 기사들을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예, 예, 얼른 와주세요.”

후, 하고 라라는 일단락 위기를 넘긴 것 같아 안심했다.

폭주한 여주의 곁에는 남주도 있고 악녀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애초에 세 사람은 소설 속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으니 죽거나 크게 다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라는 건물 안에서 직원이 내준 차를 마저 마셨다. 어차피 엑스트라인 자신은 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라라는 지금쯤이면 기사들이 도착했겠지 싶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숲을 지나 미하일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은 문 앞에서 대기 중인 엘리나3과 세 명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동시에 강한 바람이 안쪽에서 불어와 그들 중 두 명을 다시 문밖으로 튕겨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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