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53)화 (53/115)

53화

라라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바닥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언니, 그거 들었어? 내가 어제 들은 건데, 폐하랑 엘리나1 공녀가 약혼한대.”

“그거 정말이야? 대박! 여자가 아깝다.”

“그렇지? 폐하, 걔 폭군으로 한때 유명했잖아. 인성 안 봐도 뻔하지.”

사이좋게 파자마를 입고 과자를 먹으며 떠드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사람은 은발을 대충 묶은 엘리나2였고, 그 옆의 다른 한 사람은 화려한 붉은 머리를 가진 악녀 로잘리였다.

라라가 휘둥그렇게 눈을 뜬 채 문가에 서있을 때다. 엘리나2가 홱 고개를 돌려 라라를 돌아보았다.

“오, 왔어? 어서 와서 이거 먹어!”

“너랑 나 서먹해야 되는 거 아냐……?”

“이미 다 잊어버렸어. 나 뒤끝 없다구.”

발랄하게 웃은 엘리나2가 옆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서로 이름 모르지? 소개할게! 로잘리, 이 친구는 내 친한 친구인 라안이야. 저번에 한번 봤었지?”

“아, 언니랑 그때 같이 있었던…….”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로잘리는 볼품없어 보이는 평민 기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 언니의 친한 친구라니까, 잘 지내봐요. 난 로잘리라고 해요. 오늘부로 언니와 함께 이곳에서 동거하기로 했답니다.”

“네?”

라라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의미를 담아 한껏 놀라자 엘리나2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게 집을 나왔는데 갈 데가 여기밖에 없잖아. 근데 로잘리가 미하일과 약혼한 사이니까 아무래도 로잘리 입장에선 좀 그럴 거 아냐? 그래서 로잘리도 한동안 여기서 같이 지내기로 했어.”

“이렇게 배려 안 해줘도 되는데 언니의 사려 깊은 성격은 어딜 안 간다니까.”

“얘는! 항상 입만 열면 내 칭찬이야.”

“부끄러워하는 거야? 언닌 역시 여주 아니랄까 봐 귀엽네.”

“뭐라는 거야. 악녀인 네가 더 귀여워!”

‘뭐야, 얘네…….’

그렇다. 법적 공방을 거쳐 엘리나2가 미하일과 아무 사이도 아니란 것을 밝혀낸 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로잘리는 악녀인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오는 엘리나2를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법정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지은 상태였다. 그러니 밀어낼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러, 악녀와 여주는 더없이 끈끈한 관계로 발전한 것이었다.

“라안 경.”

로잘리가 일어나더니 라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표독스럽게 라라를 내려다보던 로잘리가 앙칼지게 말했다.

“나와 언니는 저쪽 방을 함께 사용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저 방엔 얼씬조차 하지 말아요.”

“아니, 저 방은 원래 제가 묵는 방…….”

“하, 평민 기사 주제에 감히 내게 말대답을 해?!”

로잘리가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로잘리, 싸대기는 어떨 때 사용해야 된다고 했더라?”

“…정말 참을 수 없을 때.”

“아무리 악녀라고 해도 지금 사용하는 건 과잉 반응이야.”

“알겠어, 언니.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엘리나2의 말에 로잘리는 씩씩거리며 조용히 손을 내렸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로잘리는 붉은 머리를 허공에 휘날리며 라라를 지나쳐 갔다. 야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라가 이상한 표정을 하고 서있자 곧 엘리나2가 다가와 어깨를 으쓱했다.

“로잘리가 어릴 적부터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싸가지가 없어. 하지만 남 시샘하는 것치곤 착한 아이니까 네가 이해해 줘, 응?”

“…너 대단하다. 저런 애를 어떻게 길들였대?”

라라의 귓속말에 엘리나2는 자신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렇게 여주와 악녀의 위태로운 동거기가 시작되었다. 거기에 남주와 엑스트라가 낀 이상한 동거가.

“저기, 로잘리 양.”

출근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 남장을 한 라라는 아직도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로잘리를 깨웠다.

근 일주일 동안은 라라와 미하일, 엘리나2가 돌아가면서 아침을 만들었는데 그동안 로잘리는 악녀답게도 매일 아무것도 안 하고 늦게 일어나 얄밉게 처먹고 다시 들어갔다. 오늘은 로잘리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싶은 것이다.

“오늘 식사 당번은 로잘리 양이에요. 일어나세요.”

“으음……. 감히 누가 나를 깨우는…….”

눈을 감은 로잘리가 팔을 뻗어 누군가의 뺨을 후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라라는 한들한들 움직이는 로잘리의 찰진 손목 스냅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로잘리 양이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이라구욧! 눈 좀 뜨세요.”

“하, 이 천한 평민 기사가! 어딜 들어와……! 나가지 못해!”

로잘리가 벌떡 일어나 라라에게 반대 손을 마구 휘둘렀다. 그 위협적인 손짓에 라라는 후다닥 문 뒤로 숨어 발광하는 악녀를 지켜보았다.

“나보고 감히, 감히! 아침 식사를 만들라고!! 내가 시녀야 뭐야! 너, 이리 안 와?!”

히스테릭적으로 베개를 집어 던진 로잘리가 흉흉한 눈으로 라라를 노려보았다. 그때 로잘리 옆에서 자고 있던 엘리나2가 입술을 웅얼거리며 말했다.

“…로잘리, 나 아침으론 토스트가 좋아아.”

“알겠어, 언니. 내가 최고로 맛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할게.”

“응……. 고마워어. 졸려어어.”

“더 자, 언니.”

이중인격에 가까운 행동 변화에 겁을 집어먹은 라라는 슬그머니 방문을 닫고 나갔다.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들이켜고 있는 미하일이 보였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쟤들 언제 나간대.”

“모르겠어요……. 것보다 남주가 제삼자처럼 있어도 돼요? 저 두 사람 엄청 사이 좋아 보이는데요.”

“될 대로 되라고 해. 난 남주니 여주니 그런 건 관심 없으니까.”

역시 세계 중심인 주인공은 뭐가 달라도 다른지 엄청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두 여인 사이에는 미하일이 있어야만 했다. 미하일을 두고 싸워야 할 텐데 주인공들이 제각각 따로 놀고 있으니 이래선 엑스트라만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라라는 한숨을 포옥 내쉬다가 근처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헙 숨을 삼켰다. 풍만한 몸매를 감추지 않은 채 로잘리가 우아하고도 신경질적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라라를 한번 야리다가 주방으로 홱 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래도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려는 모양이었다. 제발 독만 타지 않기를 빌 때 주방에서 소프라노의 앙칼진 음성이 잇따라 들려왔다.

“감히… 감히, 식빵 주제에!”

“감히… 당근 주제에!”

“감히, 달걀 주제에!”

“감히 햄 주제에!”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라라가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가자 식재료들을 썰고 있는 로잘리가 보였다. 그녀는 칼로 썰지 않았다. 수년간 다져온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무려 싸대기로 식재료들을 부수고 있었다.

‘…오, 세상에.’

저것에 맞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할 때 마침내 로잘리가 달궈진 프라이팬에 버터를 갖다 댔다.

“어때? 고통스럽니? 이 정도론 어림없지! 네년의 피부가 녹아 없어질 때까지 이어갈 줄 알아!”

버터를 녹이는 게 아니라 마치 인두로 피부를 지지는 것만 같았다. 잔혹한 버터 고문에 라라는 다시 조용히 미하일의 옆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로잘리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접시 두 개만 예쁘게 세팅하고는 나머지 건 내팽개치듯이 내려놓더니 바로 엘리나2를 깨우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나머지 접시가 라라와 미하일의 것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고 말이다.

미하일은 한쪽 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곧이어 엘리나2와 로잘리가 방에서 나왔는데 그는 몇 번 입을 오물거리다가 토스트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맛없어.”

그러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로잘리는 가만히 서서 미하일이 들어간 방을 노려보았다. 하얗게 질린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얼마 안 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호……. 입맛에 맞지 않았다니 유감이네요. 다음번에는 맛있는 요리를 해드리죠, 미하일.”

‘분명 독약 탄다에 한 표…….’

라라는 당분간 로잘리가 주는 음식은 먹지 말라고 따로 미하일에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관찰한 지 10일째. 악녀와 여주는 사소한 다툼도 없이 절친한 자매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가만히 지켜만 본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이간질하려고 노력했었다.

가령.

“여기 널어놓은 내 옷이 없잖아! 평민 기사! 네가 훔쳤지……!”

“그거 아까 엘리나2가 입고 나가던데요?”

“뭐어어! 언니도 참, 그 옷에 메야 예쁜 가방도 빌려줄 수 있는데.”

라거나.

“여기 숨겨둔 내 과자가 없어졌잖아! 누가 처먹었어! 평민 기사, 너지!!”

“그거 아까 엘리나2가 먹던데요?”

“뭐어어! 언니도 참, 먹고 싶으면 더 줄 수도 있는데.”

정도의 이간질이었다.

이 정도면 친자매도 대판 싸우기 마련일 텐데 두 사람의 견고한 신뢰 관계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이간질이란 이간질은 총동원해 보았으나 모두 김빠지는 결과만 불러오니 라라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니들 다 언제 나가는데?”

늦은 저녁 돌아온 미하일이 문에 기대어 삐딱하게 물어왔다. 라라는 엘리나2와 로잘리와 함께 거실에 사이좋게 앉아서 과자를 주워 먹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오셨어요?”

“환장하겠네. 가족이야, 뭐야.”

“좋잖아요, 조용한 것보다는.”

라라가 어서 와서 먹으라며 미하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미하일은 시큰둥한 표정을 했지만 결국 손을 뻗어 과자 몇 개를 주워 먹었다.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밤이 되었다. 꿈나라에서 허우적대던 중 라라는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음성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이상하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오해라니까.”

세 사람이 밤중에 모여서 저렇게 신나게 떠들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싶어 라라는 방문을 열었다. 거실 한복판에 서있는 여주와 남주와 악녀가 보였다.

“그렇지만, 어째서 두 사람이 같이 욕실에서 나오는 건데? 혹시 사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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