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때였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검은 눈이 소리 없이 떠지며 알 수 없는 빛을 뱉어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왜 이제껏 이 생각을 안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눈물에 젖은 눈을 깜빡이는 엘리나1을 내려다보며 디체스는 음험하게 미소 지었다.
“나를 좀 도와줘야겠습니다.”
남들은 이미 출근해서 검술 훈련 중일 때, 한 시간 늦게 기사단 연병장에 들어선 라라는 오랜만에 조회에 참석했다. 영업부이긴 하지만 일단 기사이니 말이다.
뭔가 중대 발표가 있을 것처럼 분위기는 조용했는데 뒤늦게 중대장이 단상 위로 올라서고 라라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 기사단 승급 시험에서 최상점을 받은 기사들을 호명하겠다. 호명된 자는 올라오도록. 필립 경, 튤리어스 경, 에드가3 경.”
“오오오…….”
비록 엘리나3과 서로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이 있었다지만 라라는 진심을 담아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로렌스 경은 앞으로 나오도록.”
“거짓말!!”
새된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라라에게로 돌아갔다. 라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손을 휘저었으나 여전히 눈은 단상 계단을 오르는 오빠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기사단 승급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최종 4인이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들에게는 이번 달 검술 대회의 자동 출전 기회가 주어진다.”
“마! 자들은 대회 같은 데도 나가고 그라는데 니는 뭐 하노!”
라라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검 손잡이를 틀어쥐었다. 창피했다. 조회가 끝나고 영업부로 돌아와서야 손을 뗐는데 이에 마검은 방언 터진 듯 말을 쏟아 뱉었다.
“마! 원래 검술 대회 같은 곳에선 마검 같은 게 등장해야 된다 아이가!”
<맞는 말이니라. 클리셰에 따르면 주인공은 우연히 마검을 습득하고, 그것을 뽐낼 기회가 와야 되는데 그 큰 이벤트 중 하나가 검술 대회니라. 먼치킨적인 실력을 마음껏 뽐내줘야 마검도 자신감이 붙을 테지.>
신의 음성에 라라는 턱을 괴고 간만에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확실히 그런 클리셰가 필요하긴 했다.
<엘리나3에게 은근슬쩍 마검을 넘겨주는 건 어떻느냐? 엘리나3이 우연히 땅에 떨어진 마검을 습득해 그것을 검술 대회에 사용한다면 아주 완벽한 기사 여주 클리셰가 완성될 것 같은데.>
“마검이 무슨 검이에요, 식칼이면 몰라도.”
“마! 니 말 다 했나!!”
“요리 대회면 쓸 수 있게 주방에다 떨어뜨려 놓고 가겠지만 제국민 모두가 지켜보는 검술 대회라고요. 만약 엘리나3이 망신이라도 당하면…….”
“마! 니 와 그러케 내를 못 믿노!!”
엘리나3이 자신을 오해한 일에 대해서 여전히 마음이 풀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잘못되는 일을 두고 볼 순 없었다.
<저 마검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회나 뜰 줄 아는 경상도 아저씨 영혼이 깃든 칼이 아니니라. 한때 인간을 회 뜨고 다녔던 무시무시한 검사의 칼이니라.>
‘…정말요?’
<그러하다. 아무리 논클리셰의 힘이 미쳤다 한들 마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변했다 해도 바로잡는 것이 너의 역할. 그러니 신의 말에 따라 엘리나3에게 마검을 넘겨주거라.>
‘그렇지만…….’
<애당초 엘리나3의 실력이면 마검이 아니라 과도를 쥐여줘도 우승할 수 있을 것이니라.>
‘아, 하긴 주인공이니까 우승하겠네요, 클리셰대로 라면.’
<물론 남주가 참가했다면 말은 달라지느니라. 무승부 혹은 남주에게 아쉽게 패배하는 클리셰로 가야 하느니라. 그래야 여주가 남주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품고 관계의 개연성이…….>
블라블라 이어지는 뒷말은 흘려들으며 라라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은 말하기 무섭게 움직이는 그 행동력이 바람직하다며 열을 올리며 얘기했으나, 라라는 그저 복도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갈 뿐이었다.
<지금 화장실이 중요하느냐! 얼른 여주에게 마검을 우연히 넘겨주지 못할까!>
“마!! 내가 바로 마검 아이가! 니 나를 무시하나 본데……!”
“시끄러워요!”
라라는 허리춤에 걸려있던 마검을 화장실 문밖에다 세워놓고 서둘러 볼일을 보러 들어갔다. 라라가 들어가고 1분 정도가 지나자 때마침 훈련을 마친 기사들이 화장실로 몰려들었다.
다들 하나같이 세 시간을 넘게 참아온 상태였다. 그들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맨 앞에서 달려오던 엘리나3은 화장실 문 앞에 기대어 있는 검을 발견했다.
“검이 왜 여기에…….”
엘리나3이 검을 쥔 순간이었다. 중력처럼 거대한 힘이 자신의 손을 속박하려 드는 게 아닌가. 엘리나3은 손에서 검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손잡이는 손바닥 가죽에 붙은 것처럼 달라붙어 왔다.
“인간이여……. 나의 숙주가 되어라. 이 몸은 아디오사 룬 크리마오토르. 인간의 원한과 증오를 먹고 사는 마검이다.”
어디선가 들려온 음침한 사내의 목소리에 엘리나3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손에 시선을 주었다. 분명 검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맨 앞줄에 서있는 엘리나3이 굳은 얼굴을 하자 그 뒤에 길게 줄 서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에드가3?”
“얘 지금 위험한 거 같은데.”
“야, 야, 안에 있는 놈! 얼른 나와라!”
기사들이 화장실 문을 향해 야유를 던질 때였다. 라라가 태연하게 물 묻은 손을 털며 걸어 나왔다.
“어라? 마검이…….”
분명 문 앞에 놔두었던 마검이 사라져 있었다. 그 주위를 돌아보며 찾을 때 엘리나3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나 급했으면……. 아, 근데 나도 진짜 급하다.”
“화장실 빨리 써줘……. 우리들도 급하니까.”
“에드가3! 너만 믿는다!”
기사들은 일제히 문을 향해 말을 걸었다. 화장실에서 동떨어진 채 라라가 마검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였다. 엘리나3이 들어간 지 1분 만에 물 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에 기사들이 “믿고 있었다구!” 하고 외치며 희망 어린 얼굴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데, 화장실 문 안쪽에서 철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여는 소리가 아니었다. 또 한 번 잠그는 소리였다.
“팔이… 팔이 말을 안 들어.”
“뭐라고, 에드가3?”
한 기사의 물음에 뒤늦게 엘리나3이 힘겹게 운을 뗐다.
“…미안, 정말 미안해. 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어.”
“…안에서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이봐, 에드가3!”
“어이! 문 좀 열어보라고!”
“제길, 다들 옆으로 비켜! 들어간다!”
덩치 좋은 기사 하나가 엘리나3이 있는 화장실 문을 향해 힘껏 어깨를 들이박았다.
보통 허술한 잠금 장치로 인해 이 정도 흔들면 열려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문은 꼼짝도 안 했다. 마치 튼튼한 무언가가 걸쇠 대신에 길게 걸려있는 것처럼.
“잠깐…, 이거 안 열리는데?”
이상함을 감지한 기사가 흠칫 하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문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요…….”
비록 음성은 짧고 순간적이었으나 그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기사들은 포착할 수 있었다. 에드가3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음 또한.
“…미안해요, 다들.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화장실을 찾아가요……! 문이 열리지 않아요. 검이 멋대로 문을 막고 있어요.”
“제길, 이러면 너를 두고 갈 수가 없잖아! 곧 꺼내줄 테니까.”
“아뇨, 가요!”
“에드가3……. 잘 들어. 우린 동료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동료를 버릴 만큼… 약아빠진 놈들이 아니란 말이다!”
평소 약한 모습 따윈 보이지 않는 녀석임을 알기에 기사들은 초조하기만 했다. 곧 꺼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외치며 하나같이 문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라는 이상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사이, 엘리나3은 마검의 조종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제발, 제발… 움직여 줘.”
그녀는 손을 들어 마검에 의해 지배된 손등 위를 긁어내렸다. 얼마나 긁었는지 손등이 발개져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꿈쩍도 하지 않고 문에 걸려있던 마검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나3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검을 치우고 문을 열었다.
화장실 문을 열자 긴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바지가 젖거나 구린 냄새를 풍기는 동료들의 모습에 엘리나3은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복도 안을 가득 채운 냄새는 이것이 환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허탈하게 동료들의 넋을 잃은 표정을 담던 그녀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만 같은 표정이었으나 엘리나3은 울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마저 들끓은 분노 속에서 증발되어 독기가 되었다.
“…네가 원하던 것이 이건가, 마검…….”
두 눈은 피처럼 붉은 독기를 맺은 채 오른손에 들린 검을 노려보았다.
“넌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을… 이 장소를 처참하게 만들어 놨어. 널 용서할 것 같아!”
“나는 인간의 원한과 증오를 먹고 사는 마검……. 천 년의 봉인이 풀렸으니 이보다 더한 악행도 저지를 수 있다. 너의 가족,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말이지.”
엘리나3은 남은 왼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다시 빠져나온 손에는 예리한 단검이 들려있었다. 그녀가 저주받은 마검과 함께 제 오른 손목을 잘라내려 할 때였다. 마검이 먼저 졸아서 진동했다.
“나에게서 해방되고 싶다면 검술 대회에서 이겨라!! 이 나를 사용해서!”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강하다는 걸, 이 세계에 증명해 보인다면 순순히 떨어져 나가지!”
“진심인가?”
엘리나3은 사납게 눈을 치떠 서슬 퍼런 검날을 응시했다. 이것을 제게서 떨어뜨릴 수 있다면,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이 손을 피로 물들여서라도 해내보일 것이다.
퇴근 시간에 맞춰 라라는 교황청으로 향했다. 가출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집안에선 저를 찾지도 않는지 잠잠했다. 심지어 오빠 새끼는 훈련장에서 몇 번 눈이 마주쳤는데도 뭐 떠오르는 것도 없는지 조용했고 말이다.
‘그래도 미하일이 있어서 다행이야.’
여자인 게 밝혀졌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신에게는 비밀이라 남장을 하고 지내야 하지만 그래도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