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팔등 너머로 섬세하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보였다. 날카로운 코와 기다란 입매, 그리고 턱선에 엘리나1은 절로 합죽이가 되었다. 잠이 든 잘생긴 얼굴을 코앞에서 촘촘히 뜯어보다가 뒤늦게 떠진 푸른 눈과 마주쳤다.
“……!”
“……!”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카를라히는 노출 하나 없는 몸을 이불로 가렸고, 엘리나1은 수줍게 볼을 물들이며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그, 그 실수인 거죠?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우린 단지 잠만 잤을 뿐이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 내게 무슨 짓을 하진 않았겠지?”
황후 자리엔 관심이 없다는 의미로 엘리나1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남자 여럿 사로잡을 만큼 사랑스럽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저 이 사실을 디체스가 알고 상처받을까 봐……. 앗, 그러니까 저희가 같이 잔 사실은 비밀로…….”
“폐하!!”
벌컥 하고 이때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엑스트라 호위 기사가 난입했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두 남녀는 화들짝 몸을 떨며 문을 돌아보았다.
“…이크,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기사가 눈치 없이 목소리를 높이자 곧바로 문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음이 몰아닥쳤다. 근위대 기사들이 구경꾼처럼 몰려든 소리였다. 서로 앞다투어 문 사이로 뛰어든 기사들이 낯선 광경에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크읏, 이런 실례를…….”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도 좀 보자. 헛, 실례했습니다……!”
“…오우, 실례.”
휘파람 소리가 작게 복도를 울리자 카를라히는 이불을 거두고서 몸을 일으켰다. 꽉 쥐었다가 놓아 잔뜩 구겨진 옷자락을 제외하고는 칼같이 깔끔한 모습이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지?”
곧바로 황제로서의 권위를 되찾은 그는 기사들의 앞에서 서슬 퍼런 눈을 내리떴다.
“모두 내 앞에서 몸을 낮춰라.”
허스키한 음성이 방 안을 점령했다. 그제야 결례를 범했음을 알아차린 기사들이 몸을 숙여 부복 자세를 취했다.
“눈 감고, 방금 휘파람을 분 기사만 조용히 손든다, 어서.”
엄청난 위압감이 기사들의 머리 위를 짓눌렀다. 그 온몸을 옥죄는 살벌한 기운은 도저히 인간이 내뿜는 것이라 볼 수 없었다. 황실 대대로 황제가 될 자의 몸엔 드래곤인지 디지몬인지의 피가 섞였다는 말은 괜한 낭설이 아닌 듯했다.
“다른 기사단이 퇴근하고도 두 시간 넘도록 계속 남아볼 것인가. 오랜만에 책상 뒤로 밀고 대청소해야 되나 이 말이다.”
“…아씨, 누구야.”
“…야, 빨리 자백해라.”
“…손 들라고, 아나…….”
웅성웅성, 또 한 번 인 소란에 엘리나1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정시에 안 마쳐주는 것도 서러운데 거기서 두 시간 넘게 벌 청소를 시키다니,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잔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자상함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너였나, 이스마일 경.”
“비밀을 지켜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기사의 억울한 외침은 곧 날아온 수많은 발길질 속에 묻혔다. 절규에 찬 기사의 비명 소리에도 카를라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자를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이 내가 직접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한 가지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사내로서의 책임을 다하십시오.”
기사의 정중한 말에 카를라히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엘리나1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카를라히의 등만 좇다가 이윽고 그가 나가자 복잡한 감정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 * *
엘리나1, 2, 3, 4, 5 공녀의 가출 사건으로 떠들썩한 사이 라라는 공작저를 나와 교황청을 찾았다.
탈주한 엘리나들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여주의 가출은 정해진 클리셰라는 신의 말을 믿고 제 몸부터 걱정하기로 했다.
엘리나1이라면 디체스를 찾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엘리나2는 정령왕이 있으니 어딜 가든 안전할 테고, 엘리나3은 기사단에 있을 테고, 엘리나4는 황궁도서관에 있을 테다. 엘리나5는 대신전에 묵는다고 했으니 그곳에 있을 테고…….
“사람을 눈앞에 두고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바로 앞에서 들려온 퉁명한 중저음에 라라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미하일에게 집중했다.
“그보다 어쩌다가 암에 걸린 거야?”
“어쩌다 보니까요.”
“치료 안 해준다.”
“…암 걸릴 만한 그럴 일이 있었어요. 발병 원인의 1위가 스트레스라는 건 미하일도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스트레스가 뭐냐고.”
라라는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더 이상 캐지 않고 치료에 집중했다. 그의 배꼽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줄기가 라라의 몸에 스며들었다.
“신성력을 쏴서 일단 몸속의 악성 종양은 제거했어.”
“휴, 정말 감사해요.”
이 세계의 신성력 수준에 신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전생에 의사였던 의학 천재 여주는 필요 없겠느니라. 뭐 하러 배 찢고 꿰매는 그 고생을 하냔 말이다. 존나 나도 거기서 살고 싶다.>
‘판타지라서 행복해요.’
암 치료는 무사히 끝났다. 미하일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라라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보다 지금 떠들썩하더라.”
“뭐가요?”
“폐하와 엘리나1 공녀의 약혼 때문에 말이야. 우리 신전만 골치 아프게 됐지. 이러다 성녀 임명식과 약혼식을 동시에 진행하게 생겼으니까.”
“…….”
쿵 하고 라라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누가 봐도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에 미하일은 심상찮음을 느끼고 따라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어디 다른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거야?”
“방금… 한 말 사실이에요?”
“뭐가? 폐하와 공녀의 약혼 말하는 거야?”
“아, 폐하라고요. 전 또 페아라고 하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휴, 하고 라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하일은 얜 뭐지 하는 시선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털썩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페아라는 남자는 누군데? 저번엔 공작과 데이트를 하질 않나, 바쁘네.”
“데이트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페아는 특별하다구요.”
“특별? 뭐 애인이라도 되나 보지?”
누가 들어도 삐딱한 의도가 담긴 목소리였다. 보나 마나 비꼼이겠지 싶은 라라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라거나.”
“…뭐, 뭐라구욧!”
“맞네, 좋아하는 사람.”
미하일의 입술이 씨익 위로 올라갔다, 한쪽만.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좀 숨겨보려는 노력이라도 해보지 그래? 그보다 그 남자는 알아?”
“알면 짝사랑이겠어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라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보다 오늘 신세 져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근데 그 남자가 알고 오해라도 하면 어떡하게? 나 책임 안 진다.”
“괜찮아요. …그분은 제가 어디서 자든 누구랑 있든 상관하지 않으실 텐데요 뭐…….”
“그런 남자가 대체 어디가 좋은 건데?”
미하일의 말에 라라는 괜히 욱해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제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제 마음이에욧.”
“누가 아니랬냐.”
“…아무튼 그분을 좋아하는 제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주세요.”
라라의 말에 미하일은 시시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 * *
오전 늦게 소식을 접한 디체스는 좀체 진정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업무를 내팽개치고 엘리나1을 만나러 가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런 그와 마음이 통한 건지 엘리나1이 점심시간에 그를 찾아왔다.
“소식 들었죠……?”
“당연한 걸 묻습니다. 이 나를 충동질한 것은 그대가 아닙니까.”
디체스의 손이 엘리나1의 어깨를 잡아 소파 위로 거칠게 무너뜨렸다. 몸이 뒤로 넘어가고 등 뒤로 소파 시트가 닿자 엘리나1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이 내가 화가 나있다는 걸 알면서 찾아온 게 아닙니까. 아니, 이걸 노리고 일부러 늦은 시간 황제를 찾아간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나1은 흥분한 그를 말리려 했으나 디체스는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부숴버리면 그만입니다.”
“안 돼요. 그런 생각은 옳지 못해요.”
엘리나1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디체스는 결심한 듯 손을 움직여 은밀한 소파 밑에 손을 가져갔다.
“앗……! 그건…….”
엘리나1이 가슴을 헐떡이며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얼굴과 황제의 얼굴을 본떠 만든 슈니발렌이었다.
디체스는 탁자 위에 얼굴 모양 슈니발렌 두 개를 올려놓고서 나무망치를 휘둘렀다. 망치에 맞은 얼굴 모양 슈니발렌이 점차 부서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아아, 안 돼……. 그러지 마세요!”
“이거 놓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디체스의 마음의 상처가 낫는다면 기꺼이 놓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부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파괴한다고 해서… 흐윽, 당신의 상처만 깊어질 뿐이라고요!”
가녀린 몸을 던져 엘리나1은 과자 몇 조각을 집어 먹으려는 디체스를 막았다. 뒤늦게 그의 손에서 나무망치가 허무하게 추락해 바닥에 떨어졌다.
“약혼…하는 겁니까?”
엘리나1은 눈물을 글썽이며 눈을 꼭 감았다. 투명한 눈물이 뺨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리며 빛났다.
“제길……!”
“…미안해요.”
“왜 약혼은 셋이서 할 수 없단 말입니까. 왜 항상 둘만 가능한 겁니까! 둘, 둘, 둘. 그 사이에 이 내가 끼어들 자리는 정녕 없단 말입니까.”
“…불가능할 거예요. 흐윽.”
“공작이란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정작 손에 넣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한 여자와 한 남자를 놓아줘야만 하는 디체스로서는 벌써부터 가슴이 옥죄어 오기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커플은 디체스의 입장에선 아주 좋지 못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 될, 혹은 되어야만 하는 이들이 짝을 지어 서로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날개를 꺾고 어딘가에 가둬둘 수만 있다면…, 오로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디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