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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50)화 (50/115)

50화

눈을 감자 곧바로 잠이 쏟아졌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라라는 번쩍 눈을 떴다.

“라라! 일어나 봐!”

“…으음,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봐봐, 엘리나1이……!”

심각한 엘리나2의 표정이 보였다. 곧 눈앞에 내밀어진 편지를 라라는 잠이 덜 깨 퉁퉁 부은 눈으로 읽었다.

[사랑하는 모두에게.

이기심에 물드는 나를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어 집을 나가기로 결정했어요. 이제까지 감사했어요. 라라는 정말이지 좋은 아이예요. 내가 그 친구를 대신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 아이는 착해서 손님으로만 머무른다고 했어요. 하루만 제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제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대요. 그래서 제게 모든 걸 양보하고 떠나려고 해요.]

‘으응?’

라라는 자신이 글을 잘못 이해한 건가 싶어서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니까, 나를 대신해서 라라를 공녀로 받아들여 줘요. 한 사람 몫이 빠져나가면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할 테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모두 행복하게 살도록 해요. 그럼 모두 안녕히.]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나 완전 그거잖아. 겉으론 착하지만 알고 보면 못된 양녀!”

“…라라, 네가 어젯밤 엘리나1에게 뭐라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충격이 커.”

엘리나2는 허탈하게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래, 솔직히 널 원망할 수도 없지. 너를 이 집에 데려온 내 책임도 있으니까!”

“네가 그러면 안 되지! 그럼 안 되잖아!!”

“엘리나1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눈치채지 못한 내 잘못이 커. 난 이 집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엘리나2의 자리도 차지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리 말한 엘리나2는 무책임하게도 방을 뛰쳐나갔다. 네가 재워줄 테니까 오라며!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라라가 멍하니 눈만 깜빡거릴 때였다.

문이 열리며 진지하게 눈빛을 굳힌 엘리나3이 모습을 드러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모든 사실을 듣게 됐어.”

“엘리나3, 너는 나 믿지?”

“내 자리도 탐난다면 가져.”

시크하게 말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라라가 엘리나3을 붙잡기 위해 방을 나왔을 땐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늦게나마 허겁지겁 뛰며 복도를 돈 순간이었다.

무언가와 부딪친 순간 책과 종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와르르 주위로 쏟아진 그것들은 마법 연구 자료들이었다.

“…엘리나4? 아, 미안해요. 근데 아침부터 이것들을 어디로 가져가려고…….”

라라가 줍기 위해 몸을 숙인 순간 반대편에서 차갑게 내치는 손이 있었다.

“손대지 마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대체 왜 그래요?”

“왜 그러는지는 라라 양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저희를 너무 얕본 것 같네요.”

안경 너머로 엘리나4의 지적인 눈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손을 움직여 자료와 책들을 정리하고 다시 들었다.

“당신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세요. 저도 이 집을 나갈 거거든요. 한순간이었지만 당신을 믿다니 나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요.”

“아니, 나 손님으로 온 거라고요! 왜 하나같이 여주의 포지션을 빼앗으려는 속 까만 양녀 보듯이 보는 건데요!! 배척 너무 심하잖아……!”

“억울하다고 말해도 이미 당신의 정체를 파악한 지 오래예요.”

“그러니까 손님이라고요!! 내 정체는 손님이라고요!! 안 그래도 오늘 나갈 생각이었다고요!”

“엘리나1이나 엘리나2 같은 애들은 속을지 몰라도 상대를 잘못 본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엘리나4는 결심한 듯이 비장한 태도로 라라를 지나쳐 갔다. 라라는 한동안 굳어있다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뒤를 돌아보았다.

성스러울 만큼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엘리나5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당신이 속으로 어떤 악한 생각을 품고 있어도 전 용서하려고 해요. 설령 우리 가문을 집어삼킬 꿍꿍이를 품고 있더라도 저만은 이해할 수 있어요.”

“아니, 손님 자격으로 온 사람이 뭘 집어삼켜요…….”

“우리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제국의 평화를 수호하는 성녀라지만 정작 집안의 평화는 수호하지 못하다니 우습지 않나요? 후후.”

웃고 있지만 눈빛이 왠지 무서웠다. 언제 또 파괴적인 빔이 뿜어져 나올지 몰라 더 긴장되었다.

“저는 한동안 대신전에 몸을 맡길 생각이에요. 그동안 이곳에서 원했던 것을 이뤄보도록 해봐요. 전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아뇨! 저, 저는 바빠서 이만 나가볼게요!”

라라는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다. 이 미쳐 돌아가는 여주네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라라는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분명 대형견 남주인 크리온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슈모르드 영애.”

“아, 응. 그러게요.”

존대를 해야 할지, 편하게 말을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어 라라가 잠시 멈춰 서서 그의 표정을 살필 때였다. 크리온이 한 걸음 정도를 남기고 바짝 다가오더니 라라의 목 쪽으로 코를 가져갔다.

킁킁하고 냄새를 맡기 시작하자 라라는 왠지 모르게 숨을 참게 되었다. 혹시 이상한 냄새라도 나는 건가.

“뭐 하는 거니……? 호호.”

슬며시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크리온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어깨와 배, 다리, 발목까지 틈틈이 냄새를 스캔한 크리온이 일어나더니 대뜸 라라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검사?”

라라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신사답게 라라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도착한 곳은 공작가의 주치의가 머무르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라는 놀라운 검사 결과를 듣게 되는데.

“암입니다.”

“아, 그럴 줄 알았어요.”

* * *

출입이 통제된 황궁 중심부. 검푸른 로브를 펄럭이며 한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는 적당한 객실을 찾아 들어가 등에 업고 있던 여인을 침대에 내려두었다.

낮은 조명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은색 머리칼이 침대 위에 고아하게 흐트러졌다. 제국의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인 꽃이라 불리는 엘리나1이었다.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내는 이 제국의 태양이자 빅뱅의 태양과 헷갈리면 큰일 나는 황제 카를라히였다.

약 한 시간 전 그는 리니엇 공작 가문에 남몰래 방문했었다. 라라가 이곳에 있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갈 생각으로 저택에 침입하려 할 때 저택 뒷문을 빠져나오는 웬 수상쩍은 여인과 맞닥뜨리게 되었었다.

로브로 꽁꽁 모습을 가린 채 어디론가 바삐 달리는 여인을 카를라히는 가뿐히 따라잡았다. 그녀는 라라가 아니었다. 엘리나1이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 거지?’

‘폐하? …그게, 저를 못 본 체해 주실 순 없을까요?’

‘미안하지만 거절하지. 밤늦게 혼자 다니면 위험하질 않나. 방까지 바래다주지.’

‘아뇨, 그럴 필요 없으세요. 철없는 소리로 들릴진 모르겠지만 사실 집을 나왔어요. 들어갈 수 없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대로 거리를 떠돌 작정은 아니겠지? 묵을 곳은?’

‘…….’

‘무턱대고 나왔다 이건가. 일단 황궁으로 가는 게 좋겠군.’

‘…아, 존귀하신 분께 신세를 질 수는.’

‘한 가지만 더 묻지. 슈모르드 영애는 이곳에 있나?’

자신의 말에 엘리나1 공녀는 눈을 크게 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회피하듯 아래로 깔린 은빛 눈동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라라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

‘글쎄?’

‘라라라면 지금쯤 아마 자고 있을 거예요. 저를 위로해 주느라 늦게 방으로 돌아갔거든요. 정말 좋은 친구죠.’

아침이면 사라지고 말 안개처럼 희미하게 웃어 보인 엘리나1은 잠자코 자신을 따라왔다. 마차에 타고 함께 황궁으로 오는 동안 창틀에 기대어 잠든 그녀를 업고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다.

‘슬슬 돌아가 보도록…….’

집무실을 지키고 있을 호위를 생각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도 작은 힘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엘리나1 공녀?”

“…우음.”

잠결에 붙잡은 것인지 그녀의 두 눈은 가지런히 감겨있었다. 카를라히가 서둘러 손을 풀고 나가기 위해 작은 주먹을 쥐자 곧바로 다른 손이 뻗어져 나와 손등을 덥석 움켜쥐었다.

“엘리나1 공녀!”

“음냐…….”

‘정녕 잠든 상태란 말인가.’

무슨 힘이 이렇게 악착같은지 마치 절벽에 매달린 사람 같았다. 다른 팔은 깁스 중이라 힘을 쓰는 게 힘들었다.

그 상태로 한 시간이 흘렀다. 카를라히는 그녀의 두 손을 떼어내려다 그만 전신의 온 힘이 빠지고 말았다.

털썩하고 순순히 침대 시트에 앉자 곧바로 엘리나1이 몸을 뒤척이며 카를라히의 옷자락을 반대편으로 홱 잡아당겼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그의 건장한 몸뚱이가 힘없이 엘리나1의 몸 위로 허물어졌다.

누가 봐도 덮치는 자세가 형성되었다. 카를라히는 자신의 입술에 닿는 색색거리는 따스한 숨결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어쩐지 점차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엘리나1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짓누르는 피로감과 수마에 카를라히는 최후의 발악처럼 눈을 떴으나 얼마 못 가 새파란 벽안이 파르르 감겼다. 불가항력적인 졸음이었다.

‘…나의 순결은 릴리카 짱에게 바치기로 맹세했건만.’

꾸벅꾸벅, 엘리나1의 이마에 박치기를 하던 카를라히가 얼마 못 가 자세를 바꿨다. 그는 마치 책상에 엎드린 듯한 자세로 엘리나1의 얼굴 위에 한쪽 팔을 대고 잠들었다.

‘이렇게 다른 여자와… 첫날밤을 보내서는 안 대애…….’

엘리나1은 눈을 떴다. 얼굴 축소 경락 마사지를 받은 것처럼 어쩐지 얼굴이 많이 아팠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검보라색 실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제 몸 위를 점령한 묵직한 무게를 알아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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