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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49)화 (49/115)

49화

적당히 넓지도 좁지도 않은 1인실에 책상 하나 달랑 있는 방이었다. 그 안에 홀로 앉아 서류 뒷면에 낙서를 하고 있던 라라를 발견한 엘리나2가 방긋 웃었다.

“라라! 가출했다며!”

“호호,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집에 오는 게 어때?”

“그래도 돼?”

“그럼! 나와 같은 방을 써도 좋고, 옆방을 내줄 수도 있고. 가자.”

“아니, 나 아직 퇴근 시간 안 됐는데…….”

엘리나2에게 붙잡혀 라라는 밖으로 끌려 나갔다.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검을 배우고 있던 엘리나1과 그녀를 가르치고 있던 엘리나3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에게 어설프게 인사해 준 라라는 마차에 올랐다.

엘리나1은 후들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엘리나3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거대한 공작저의 지붕 위로 노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소 이 시간대라면 방 안에 앉아 수를 놓고 있을 텐데 최근 들어 변한 자신의 모습이 새롭기만 했다. 이번 일로 깨닫게 된 걸지도 몰랐다. 항상 그에게 지킴 받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디체스와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린 날, 엘리나1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변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만약 자신이 좀 더 강했더라면 그런 눈갱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두 분 다 목욕이 필요해 보이시네요. 안제, 얼른 목욕물을 데우렴.”

언제나 한결같이 부지런한 시녀장 앞에서 엘리나1은 한번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그녀를 지나 먼저 방 안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어머나, 잘 맞는구나.”

“…이렇게 하실 필욘 없으신데, 저기 공작 부인.”

자신의 방 안에서 들려오는 화기애애한 목소리에 엘리나1은 걸음을 멈췄다. 시녀장을 돌아보자 그녀는 그제야 생각난 듯 엘리나1에게 설명했다.

“엘리나2 아가씨가 슈모르드 영애를 가문에 데려오셨는데 입을 옷이 없어서 지금 마님께서 찾아주시고 계세요. 예전에 아가씨께서 입으셨던 옷들 중에 맞는 옷으로요.”

“아, 그렇구나.”

엘리나1은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거실 한가운데에 나란히 서있는 어머니와 라라가 보였다. 자신이 2년 전에 즐겨 입었던 옷을 입고 있는 라라가 말이다.

“엘리나1 왔니?”

“네, 어머니.”

“요즘 엘리나3과 함께 밖에서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피곤해 보이는구나. 쉬엄쉬엄하렴. 얘 라라야, 비켜주자꾸나.”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라라를 데리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엘리나1은 뒤늦게 목욕물을 준비했다는 시녀의 말에 욕실로 향했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저택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 안은 간만에 훈기가 돌았다.

바빠서 식사 자리에 자주 못 나오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자리에 앉아계셨고, 그 양옆으로 엘리나2, 3, 4, 5가 차례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2년 전에 치수가 맞지 않아 입지 못했던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는 라라도.

“라라, 눈치 보지 말고 많이 먹으렴.”

“호호홋. 감사합니다, 부인.”

“잘 먹는 모습이 복스럽구나.”

“감사해요, 공작님.”

라라는 밝아 보였다. 엘리나1은 조용히 자리에 착석해 자신의 접시에 소시지를 덜기 위해 집게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뻗어진 손이 먼저 집게를 낚아채 갔다. 라라였다.

눈이 마주치자 라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미안. 엘리나1, 먼저 집어갈래?”

“아냐, 괜찮아.”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엘리나1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라라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집게는 소시지들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불고기맛 소시지를 집었다. 엘리나1은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사라진 듯한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왜 하필 불고기맛이야?’

화들짝, 엘리나1은 몸을 떨었다.

‘아,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아니야, 라라가 일부러 그랬을 리도 없고, 오해였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나1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른 맛 소시지를 접시에 덜어 잘게 썬 엘리나1은 소시지의 맛을 음미했다. 사르르 녹을 만큼 맛있었다.

“라라, 이거 너 먹어.”

엘리나2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리나1은 소시지를 씹던 입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포크로 완두콩을 콕 집어 라라의 접시로 옮기는 엘리나2가 보였다.

단순히 자기가 먹기 싫어서 라라를 이용해 편식하는 것뿐이었으나, 엘리나1이 보기엔 달리 보였다.

‘…어느새 콩 한 쪽도 나눠 먹을 만큼 사이가 좋아진 거야?’

자신에게는 한 번도 저렇게 다정하게 콩을 건네준 적도 없는데, 라라는 당연하게 그 호의를 누리고 있었다.

“내 콩도 먹어.”

“내 콩도 먹어요.”

“내 콩도 먹어줘요.”

엘리나3, 4, 5가 따라서 라라의 접시에다 완두콩을 버렸다. 모두가 라라를 사랑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박탈감에 엘리나1이 고개를 푹 숙일 때였다.

“어디 속이 좋지 않은 거니?”

“이만 올라가 보는 게 어떠니?”

억지로 먹지 말고 올라가서 쉬라는 어머니의 다정한 배려가 왠지 차갑게 들려왔다. 엘리나1은 나오려는 눈물을 꾹 눌러 참은 채 몸을 일으켰다.

사실 라라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왠지 질투하는 저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다들. 내가, 내가 너무 못나서.”

“……?”

라라는 완두콩 테러에 속으로 분노하고 있다가 맞은편에서 들려온 기운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엘리나1이 부서질 것처럼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곧 등을 돌리고서 이곳을 빠져나갔다.

‘…뭐지? 엘리나1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양녀 클리셰니라. 새로 들어온 양녀는 항상 사랑받고 정작 여주는 가족들에게 소외당하게 되면서 점차 마음이 병들어 가고, 양녀와 비교되면서 자존감도 낮아지고, 거기다 사랑하는 남자까지 양녀에게 뺏기면 금상첨화.>

‘뭐가 금상첨화예요!’

<마지막에 이르러선 탈주 닌자가 되어 저택을 뛰쳐나가거나 자살 시도를 하는 등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느니라.>

‘뭐가 거침없는 행보예요!’

<아무튼 클리셰대로 잘 흘러가고 있느니라.>

‘이러면 제가 완전 밉상이잖아요!’

<순진하고 착한 여주를 빛내기 위해선 가끔 주위 엑스트라들이 밉상으로 보일 필요가 있단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클리셰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참아야 하느니라.>

‘…흐음.’

라라는 마지못해 수긍했지만 아무래도 남은 한 자리에 계속 시선이 갔다.

* * *

“폐하, 슈모르드 영애를 찾았습니다. 현재 리니엇 공작가문에 있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수고했다.”

카를라히는 정무를 보고 있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며 대답했다. 외출용 로브를 집어 들고 나가려는 모습에 호위 기사가 뒤따르려 하자 카를라히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사적인 용무다. 나 혼자 다녀올 테니 이곳을 지키고 있도록.”

“하오나…….”

뒷말을 이으려다 호위 기사는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보였다. 차갑게 스쳐 지나가는 푸른 눈이 답지 않게 성급한 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보고를 받은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카를라히는 검푸른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잘 시간이 되자 라라는 슬며시 손님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엘리나1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그녀 주위에 있으면 별것도 아닌 일도 과장돼서 오해로 불거진다지만 그래도 마음 약하고 심성 착한 여주였다.

‘좀 성가신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건 정정하지 않은 채 라라는 엘리나1의 방문을 두드렸다.

“엘리나1, 혹시 자?”

“으응. 아니, 들어와.”

문이 열리며 파자마 차림을 한 아름다운 은발 머리의 여인이 나타났다. 뭔 놈의 생얼도 빛이 나는지 라라는 연예인 옆에 선 일반인처럼 급쪼그라들었다.

엘리나1은 평소처럼 제게 상냥했으나 확실히 표정에서 티가 났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저기 엘리나1, 나 어차피 며칠 머무르는 손님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구. 괜히 내가 무슨 여기 양녀로 들어온 것처럼 신경 쓰는 게 아닌가 싶어서……. 호호.”

먼저 말문을 열며 라라는 엘리나1의 눈치를 살폈다. 곧 엘리나1의 어깨가 가냘플 만큼 얕게 떨리더니 그녀가 고개를 숙여 눈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악! 이러면 내가 울린 것 같잖아.’

다행히 훌쩍이는 소리는 얼마 가지 않았다.

“라라, 너는 정말 착하고 나와는 달라……. 그래서 가족들도 나보단 너에게 더 관심을 가지는 걸 거야.”

“아니, 그냥 손님이니까 잘해주는 게 아닐까.”

“나 왜 이렇게 못날까……. 네가 되고 싶었어. 완두콩을 양보받고, 불고기맛 소시지를 먹고, 내가 입지 못하는 옷을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보면서…….”

“그건 진짜 정신적으로 상담받아야 되지 않을까, 헙.”

태클을 걸 부분이 너무 많아서 라라는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억지로 클리셰를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이라지만 진짜 과대망상증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잖아. 넌 눈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얼굴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코도 높지도 낮지도 않으니까. 라라 너와 비교되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저 이런 내가 싫어. 너를 질투하고 마니까.”

“아니, 어느 부분에서 네가 초라해지는데? 어느 누가 들어도 나만 초라해지는 부분이잖아!”

“난… 태어날 때부터 눈도 사슴 눈망울처럼 크고, 얼굴도 조막만 하고, 콧대도 높았어. 아무리 네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잖아…….”

‘C발.’

괜히 온 것 같았다. 여기서 뛰쳐나갔다가 또 어떤 식으로 오해가 번져 희대의 악녀로 몰릴지 몰랐다. 라라는 전신의 모든 인내심을 쥐어짜 내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후, 그래……. 울지 마. 근데 나는 하루만 네가 되어보고 싶어.”

“그런 말, 처음 들어봤어. 고마워, 라라. 흐으윽.”

엘리나1은 라라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20분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객실로 돌아온 라라는 침대 위에 뻗었다.

‘에휴, 내일부터는 미하일에게 신세 지든가 해야지. 아니면 라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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