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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48)화 (48/115)

48화

다섯 번은 더 불렀으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불이 꺼져있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너무 조용했다. 이 시간에 어디 외출한 건가 싶어 라라는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그 소리는 라라가 지키고 있는 문이 아닌 옆집 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머나, 혹시 그 집 주인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밤 무도회에 나가는 길인지 화려하게 꾸민 부인이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라라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옆집 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옆집에 살지만 그 댁 분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예요. 집에 없으실 때가 더 많으신 것 같던데 너무 기다리시진 마세요. 아니면 편지를 써놓고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아……. 그럴까요?”

라라가 애매한 미소를 띠자 부인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깃펜과 종이를 가지고 나왔다. 라라는 간단한 편지를 쓰고 다시 부인에게 깃펜을 돌려주었다.

“감사해요. 혹시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호호, 자니스 에일리슨이에요. 다들 자니스 부인이라 부른답니다.”

“전 라라 슈모르드라고 해요. 반가워요.”

“어머나, 슈모르드 자작가에…….”

두 사람은 간단하게 수다를 떨다가 5분도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라라는 다시 마차에 올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에 잠겼다.

‘…배도 고프고, 짐은 없고, 여기서 자면 마부가 쉴 수 없고.’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라라는 아, 하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까칠하긴 해도 설마 내쫓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곧장 대신전으로 향했다.

“아가씨, 정말 여기까지 데려다주면 됩니까?”

“응, 여기서부턴 찾아갈 수 있어.”

“자작님과 마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절대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내가 여기 왔다는 거 알려주면 안 돼.”

마부에게 당부한 후 어두워진 정원 숲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조금 무서워 라라는 뛰다시피 걸어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택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저기, 미하일? 안에 계세요?”

조심스레 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라라는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불과 침실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라라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 앞에 막 멈춰 섰을 때였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뿌연 수증기와 함께 욕실 문 사이로 걸어 나오는 미하일이 보였다. 간단한 셔츠 차림의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한번 문지르며 심드렁하게 운을 뗐다.

“데이트하러 간다더니 죽어서 돌아왔네. 미안하지만 제령은 못 해.”

“저 살아있다고요! 정말 하나같이 다 죽은 사람 취급하고. 흡.”

“농담도 못 하겠네.”

그는 울상인 라라의 얼굴이 보기 싫다는 양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라라는 훅 끼쳐온 샴푸 냄새에 한번 코를 씰룩이다가 수건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덜 말린 옅은 금발을 시원하게 쓸어 넘긴 미하일이 보였다.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보다 왜 이 밤중에 여기 오고 난리야?”

“죄송해요. 사실 저 가출했어요.”

“그래서?”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내일만…….”

“너 네가 여자라는 자각이……. 아.”

소파로 걸어가던 미하일은 뒤늦게 자신이 말하고도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슬쩍 라라를 돌아본 하늘색 눈동자에 곧 미묘한 짜증이 스몄다.

“…됐다. 때려치워, 남장.”

“…아, 저 여잔 거 알고 있었어요?”

“뭘 새삼스럽게 놀라. 드레스 입고 와서 모른 체하길 바라는 거야?”

“아, 세상에, 어머어머!”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이 꼴로 왔을까 싶었다. 여주였다면 여자인 게 밝혀지는 장면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였을 테지만, 엑스트라는 김빠질 만큼 별거 없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처음부터 알았거든. 모르는 게 바보겠지만.”

“근데 왜 이제까지 모른 척하신 거예요. 것보다 그렇게 되면…….”

라라는 탄산 빠진 밍밍한 사이다를 들이켠 사람처럼 허무한 표정을 짓다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날 찾아와 준 여자는 여주 네가 처음이야.’ 클리셰는 진즉에 파괴됐다는 소리였다. 이것을 알면 신이 한 소리 할 테지만, 다행히 지금은 잠든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앞으로도 모른 척해 주실 수 있을까요……?”

“들킨 마당에 꼭 남장 기사로 우길 필요가 있어? 뭐 맘대로 해.”

“감사해요. 그리고 아침 일찍 나갈 테니까 하루만 재워주시면 감사할 것 같은…….”

“안 돼. 못 재워줘.”

손끝으로 문을 가리키며 미하일은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그의 성격상 거실에서 대충 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매몰찬 반응에 라라는 내심 당황해 버렸다.

“거실에서 잘게요. 방해도 안 할게요. 저 코도 안 골고 조용하게 잠만 자는 성격이라…….”

“진짜 몰라서 그러냐?”

미하일이 갑자기 뒤를 돌아 라라에게 다가왔다. 인자한 교황은커녕 어디 뒷골목에서 튀어나온 불량배처럼 흉흉한 눈빛이 장난 아니게 보였다.

그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라라는 움찔대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뒤늦게 등 뒤로 문이 닿자 낭패감이 들었다.

“말로 해요!”

“뭐를?”

“말로 하시라고요!”

“그러니까 뭐를?”

궁지에 몰린 쥐처럼 라라는 동그랗게 눈을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의 손이 다가왔다.

여주들만 당한다는 벽 치기인 것일까? 다가오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라라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미하일은 한심스럽단 듯이 동그란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무슨 생각 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나가라는 이유는 네가 못 잘 거라서야. 내가 밤마다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서.”

역시 그는 츤데레였던 모양이었다.

“…후, 비켜. 화장실 가게.”

“천천히 갈고 오세요.”

라라는 그가 화장실로 들어설 수 있게 완전히 비켜섰다. 그러다 아랫배가 슬슬 아픈 것 같아 급히 거실의 달력을 확인했다. 벌써 예정일이었다.

화장실에서 요실금용 기저귀를 갈고 나온 미하일에게 다가가 라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오버나이트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저도 그날인 것 같아서.”

“써.”

“고마워요.”

황급히 오버나이트를 건네받고 라라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고가 따로 없었다.

조용히 물을 내리고 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는 미하일이 보였다. 라라는 그의 옆에 사뿐히 앉으며 말을 건넸다.

“미하일도 누워서 잘 때는 오버나이트를 써야 되죠?”

“그 방법밖에 없잖아. 뒤척이거나 할 때도 옆으로 샐까 봐 신경 쓰이고.”

“맞아요! 엉덩이가 축축해서 눕는 것도 찝찝하고, 그나마 봄이라서 다행이지 여름이면…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오버나이트 경우에는 다른 것보다 흡수율이 높은 대신 두꺼워서 더하지. 따지고 보면 밀폐 공간이나 다름없잖아. 위생상 좋지도 않고 냄새도 더 심하고 불쾌해서 자주 씻어야 하지.”

거기까지 말한 미하일이 힐긋 라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자들도 귀찮겠어.”

“미하일에 비하면요……. 미하일은 태어날 때부터 매일 그래 왔잖아요. 생각해 보면 많이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이런 불편함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하나 정돈 있으니까 괜찮네.”

늘 까칠하고 솔직하지 못한 그일 텐데, 오늘은 생각보다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 * *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새벽이었다.

밤새 비워져 있던 저택에 한 사내가 찾아왔다. 검자줏빛 머리를 누르는 모자와 소용돌이무늬가 그려진 두꺼운 안경을 쓴 그는 평범한 덕후로 위장한 황제 카를라히였다.

카를라히는 깁스를 한 오른쪽 팔을 대신해 왼손으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철컥, 하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연 순간이었다. 문틈 사이에 껴있던 쪽지가 팔랑거리며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광고지인가 싶어 지나치려 할 때 그의 시선에 작은 글씨가 들어왔다. 분명 ‘라라’라고 적혀있었다. 서둘러 쪽지를 줍자 짧은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라히에게.

저 라라예요. 갑작스럽게 미안해요. 오늘 가출했는데 혹시 재워주실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는데 안 계시네요.ㅠㅠ 기다리다가 가요. ―라라가]

‘가출?’

카를라히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제저녁까지는 자신과 함께 제국 항구로 들어왔으니 아마 밤에 가출한 모양이었다. 그는 곧바로 쪽지를 쥐고 거리로 나왔다.

설마 이 근처에서 노숙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치안이 괜찮은 주택가라 다행이라지만, 밤새 다른 거리를 떠돌았다면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일단 슈모르드 가문에 돌아왔는지 알아봐야겠군…….’

만일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한시 빨리 그녀를 찾아야 했다. 카를라히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라라가 실종됐다고?”

“그래, 아까 황제 폐하께 직접 들은 것이니 확실할 거야.”

엘리나2는 더 자세히 말해보라며 엘리나4의 어깨를 붙잡고 재촉했다.

엘리나4의 얘기는 대략 이러했다. 오늘도 황궁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던 중 엘리나4는 황제를 만났다. 대뜸 슈모르드 영애에 관해 물어보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어보았고, 그렇게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실피드!”

친구의 실종 소식에 엘리나2는 곧바로 정령왕을 불러냈다.

“라라를 찾아줘. 자세한 건 묻지 말고 지금 당장!”

강한 바람에 의해 창문이 벌컥 열렸다. 엘리나4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 엘리나2는 정신 사납게 방 안을 뱅뱅 맴돌았다.

뒤늦게 정령왕이 라라의 행방을 알아 왔는지 엘리나2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 출근했구나. 하긴 남장했으니까 못 찾을 만도 했겠다. 엘리나3이랑 같이 있다고. 응. 그래, 고마워.”

“어떻게 됐어? 라라 양은 찾았대?”

“어, 기사단에 남장하고 출근했다나 봐. 후, 그것도 모르고 걱정했네. 라라 우리 집에 데리고 와도 되려나? 아, 그냥 데리고 올래. 나 갔다 올게!”

무데뽀 기질답게 엘리나2는 창문을 뛰어넘어 가문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마차를 타고 황실기사단에 도착한 그녀는 냅다 훈련장을 가로질러 라라가 있는 영업부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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