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디체스는 자전거 헬멧 두 개를 라라와 카를라히를 향해 동시에 던졌다. 두 사람은 슬며시 손을 놓고 3인용 자전거에 올라탔다. 라라는 중간에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3인용 자전거가 무인도에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생각이었다. 사실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동안 서핑 보드부터 해서 서핑복, 통기타 등등 많은 이상한 것들을 어디선가 구해 오긴 했었다.
‘아, 설마.’
<이제 기억났느냐? 클리셰 보상 제도이니라. 디체스가 클리셰 같은 짓을 해서 보상으로 얻은 물건들이니라.>
‘아……. 그런 게 있었죠, 참.’
순간 디체스의 배에 마법 주머니가 달려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라라는 머쓱하게 생각을 접었다.
“헛, 둘, 헛, 둘.”
동시에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는 구조인지라 세 사람은 약간 상체를 숙인 채 구호에 맞춰 다리를 움직였다.
3인승 자전거는 고르지 않은 길 위를 달렸다. 이러다 바퀴가 나가지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다행히 산악용 자전거인지 튼튼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여주 구하러 간다는 자각이 있는 거예욧?”
까칠하게 쏘아붙인 말에 뜨끔했는지 디체스가 늦추려던 발을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언덕을 지나 약간 가파르게 깎인 내리막길에 진입했다.
“모두 꽉 잡으십시오!”
맨 앞에서 핸들을 담당하고 있는 디체스가 그리 외치며 페달을 세게 밟았다. 3인승 자전거는 빠르게 아래로 굴러갔는데 점점 가속도가 붙자 정말 사람 하나 날려 보내도 될 것 같았다.
라라는 이대로 그에게 핸들을 맡겨도 되나 불안해서 슬쩍 디체스의 왼팔 너머로 머리를 내밀었다. 경사진 비탈길 끝에 튀어나와 있는 굵직한 뿌리가 보였다.
“브레이크! 그리고 핸들도 꺾어요!!”
“나만 믿으십시오!”
디체스는 걱정 말라며 핸들을 꽉 쥐었고 앞바퀴가 장렬하게 뿌리를 들이받은 순간 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꺄악!!”
라라는 경악스럽게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그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카를라히의 머리를 지나 완전히 땅에 박힌 몸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탄 자전거는 계속 앞으로 굴러가 수풀로 향했는데, 그 수풀 너머에 거대한 폭포가 숨겨져 있는지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어서!”
다급한 외침과 함께 라라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다부진 팔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몸이 잠시 허공에 붕 떠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몸이 자전거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단 것은 알 수 있었다.
3초 정도가 지나자 폭포 아래로 자전거가 굴러떨어져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라라는 비뚤어진 헬멧을 바로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감싸준 탓에 자신은 다친 곳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저를 보호하느라 팔이 부러진 것 같은 페아였다.
“괘, 괜찮으세요?! 어… 어떡해.”
한 팔을 붙잡은 채 힘겹게 신음을 삼키는 그를 내려다보며 라라는 손도 대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하필이면 오른팔이었다. 설마 평생 검을 잡지 못한다거나……. 그런 생각이 미치자 괜히 다 저 때문인 것 같고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라라는 입술을 울먹였다. 곧이어 추락한 눈물이 오른쪽 팔꿈치를 쥔 그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아… 미안해요, 정말……. 페아. 어떡해요.”
“괜찮으니 울지 마라.”
“…그치만요, 저 때문에… 페아의 오른팔이…….”
카를라히의 입술이 휘어 올라갔다. 곧 밀려온 고통 때문인지 입술 끝이 일그러졌지만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미소인 것은 확실했다.
그는 곧 왼손을 들어 투명한 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발간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만져주었다.
두 남녀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을 때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디체스가 거꾸로 땅에 처박혀 있었다. 마치 먹고 남은 파인애플 윗부분을 화단에 심어두었더니 무럭무럭 자란 모양과 비슷해 보였다.
뒤늦게 라라는 페아를 부축하고서 디체스에게 다가갔다.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는 그는 확실히 목에 문제가 있어 보였지만 그건 라라로서 알 바가 아니었다.
“아, 적당히 괜찮아 보이시네요.”
“차별 반응은 좋지 못합니다.”
“누구 때문에 사고가 났는데요.”
조용히 노려보는 라라의 눈을 피해 디체스는 서둘러 먼저 길을 재촉했다.
“그보다 공작.”
“왜 그러십니까, 폐하.”
“지금 찾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싶어서 말이다. 엘리나2 공녀라 했던가.”
“엘리나2 공녀도 곧 제 것이 되겠지만, 지금 찾고 있는 이는 엘리나1입니다. 옷을 갈아입겠다고 간 뒤로 비명 소리와 함께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카를라히는 미간에 옅은 주름을 새겨 넣으며 디체스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엘리나1 공녀의 제보 덕분이다.”
“……!”
“……!”
라라와 디체스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엘리나1 공녀라면 지금쯤 공작가에서 너희 둘의 생존 여부를 두고 마음 졸이고 있을 테지. 아마도 환각을 보게 하는 독버섯이라도 먹은 모양이군.”
그렇다. 엘리나1은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이곳까지 떠내려오지 않았다.
카를라히가 그들을 찾으러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다와 강 중간 지점에 떠있던 엘리나1을 기적적으로 구출해 낸 덕분이었다. 즉, 라라와 디체스가 섬에 있는 동안 엘리나1은 카를라히와 함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 그, 그런…….”
라라는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독버섯으로 인한 환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라라는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무려 11일간 같이 있었다고요…….’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던 땡땡이는 대체 누구……? 라는 반전이니라.>
공포물 클리셰의 끝을 본 기분이었다.
배는 늦은 밤 무사히 제국의 항구에 닿았다.
라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가문에 도착했다. 그동안 걱정했을 부모님에게 얼굴을 비추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라라는 자작 부부의 침실부터 찾았다. 하지만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 다들 어디 가신 거지……?’
익숙한 복도를 걷던 라라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잡혔다. 쇠와 쇠를 부딪치는 듯한 맑은 소리,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쨍한 노랫소리가 뒤섞인 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걷던 라라는 그것이 2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자신의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방에 들어서자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니, 방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천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방구석에는 금으로 번쩍이는 불상이 놓여있었다. 촛불 하나 켜진 어두운 방 안은 온통 빨강과 초록, 노랑, 파랑의 현란한 색의 천들이 다채롭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 방 중앙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어머니, 아버지? 대체 이게 다 무슨?”
“에그머니나!”
자작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슈모르드 자작은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발에 쥐가 난 것인지 바르르 몸을 떨다가 뒤로 넘어졌다. 라라가 부모님을 부르며 다가설 때였다.
벽 끝에 차려져 있는 상이 보였다. 혼례라도 치르듯 화려한 옷을 입은 짚 인형 두 개와 자신의 초상화, 그리고 모르는 남자의 초상화가 차례대로 놓여있었는데, 뒤늦게 그 아래에 휘갈긴 채 적혀있는 붉은 글자가 보였다.
영혼 정략혼. 분명 그렇게 쓰여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저승에서 돌아올 만큼 신랑이 마음에 안 든 거니? 그러면 다른 잘생긴 영혼으로…….”
“말짱히 살아있는 사람한테 영혼 정략혼이라니요!”
라라는 상을 뒤엎으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렸다. 그제야 자작 부부는 놀라워하며 살아있는 딸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오……. 우리는 네가 살아 돌아올 줄 알았단다.”
“거짓말 마세요! 영혼 정략혼까지 치르셨으면서!”
“너무 상심 마렴……. 우리는 그저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깐.”
“됐어요!! 다신 절 찾지 마세요!”
자작 부부의 품을 뿌리치고선 라라는 방문을 뛰쳐나왔다. 순간 옆방에서 나오던 오빠와 맞닥뜨리게 됐는데, 오빠는 자신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왁! 미친, 깜짝이야.”
댕! 그르르, 하고 스파게티를 싹싹 비운 양은 냄비가 바닥에 떨어진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오빠는 냄비를 주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귀신 보듯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크게 떠져있던 눈이 점점 원래 크기로 돌아오며 아련한 눈빛을 드러냈다. 마치 꿈에서 찾아 헤맸던 상대를 마침내 해후한 사람처럼.
“너… 라라.”
“…오빠.”
로렌스가 라라의 손목을 힘껏 붙잡았다. 이토록 간절하게, 세게 붙잡은 적은 처음이었다.
“로또 번호 뭐냐. 레알.”
“X발.”
라라는 손을 휘둘러 로렌스의 뺨을 갈기고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곧바로 뒤에서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야, 라라 슈모르드!! 로또 번호 알려주고 가라고!!”
“나가 뒤져!!”
6장 악녀의 정석
라라는 어두운 밤거리를 달리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대로 수도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어디 갈 곳은 없고, 그저 수도만 뱅뱅 돌고 있었다. 하지만 말도 체력적으로 힘들 테니 어디 가서 쉴 필요가 있었다.
‘엘리나들을 찾아갈까…….’
한 명이라면 몰라도 가족 단위다 보니 이 늦은 밤 찾아가기엔 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가에 모든 이들을 깨울 순 없었다.
‘휴…….’
아는 지인 목록을 훑다가 라라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마부! 저기 거리로 들어가 줘!”
마차는 방향을 틀어 고급 주택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로 진입했다. 멈춘 마차에서 내린 라라는 빠르게 라히의 집으로 향했다. 역시 민폐가 아닐까 싶어 주저하다가 용기 내 문을 두드렸다.
“라히? 안에 계세요? 저 라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