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46)화 (46/115)

46화

“…역시나.”

“……?”

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의미에서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페아……?”

확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는 손에 라라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의 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싶더니 따스한 온기가 뺨에 닿았다. 품에 안긴 상태로 두어 번 정도 더 눈을 깜빡이다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생각보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어디 다친 곳은?”

“…페아가 어, 어떻게 여기에… 혹시 조난당하신 건?”

“구하러 왔다. 다른 이들은 어딨지?”

라라를 놓아주며 그가 나직하게 물어왔다. 라라는 황홀한 표정에서 깨어나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와 거리를 두자 곧바로 그가 긴 다리를 움직여 거리를 좁히려 했다.

“오지 마요!”

경계심이 묻어나는 날카로운 외침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당신, 정말 페아 맞아요? 그치만 이상하잖아요. 엘리나1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단장님이 그리로 간 사이에 나한테 접근했어요. 그 말인즉… 당신은 괴물?”

<오, 추리력 대박이니라.>

그는 우두커니 서서 무슨 소리냔 듯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검자줏빛 머리칼이 바람에 쓸려 흔들리는 것을 보며 라라는 천천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야자수 열매를 주워 들었다.

“본인이 정말 페아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면… 뒤돌아요.”

“알겠다. 그러니 그건 내려두는 게…….”

“어서요!”

애초에 자신을 안아준 것부터가 이상했다. 라라는 페아의 탈을 쓴 괴물을 노려보며 어서 뒤를 돌라고 재차 외쳤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다가 그녀의 뜻에 따라 뒤를 돌았다.

널찍한 등을 보인 순간, 라라는 있는 힘껏 뛰어가 야자수 열매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보통 소설이나 만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가짜라고 판단한 순간 거침없이 베어버리는 것이다.

털썩,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라라는 안도의 숨을 내뿜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괴물을 해치웠다는 생각에 손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이 틈에 어서 엘리나1과 단장님을…….’

<근데 진짜인 것 같은데……?>

‘…네?’

<보통 괴물을 해치우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대로지 않느냐?>

‘…그, 그런.’

라라는 멘붕한 채로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이라고? 정말 페아라고?

뒤늦게 라라는 털썩 무릎을 꿇고 뒤통수에 커다란 혹이 난 그를 끌어안았다. 숨을 쉬고 맥박도 안정적이었지만 도통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명탐정 코X보다 더한 의심병이었느니라.>

* * *

“…정신이 드세요?”

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카를라히가 눈을 뜨자 웬 코랄 빛깔의 동그란 물체가 보였다.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뭔지 곧바로 깨달은 그는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군…….”

“아, 아직 무리하시면 안 돼요.”

라라는 자신의 무릎에서 일어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잠들어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행복한 기분을 느낀 자신이 이상한 거겠지. 그의 입장에선 약간 소름 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무언가가 뒤에서 나를 습격한 것 같다만.”

“…그, 야생 원숭이가 야자수 열매를 던졌나 봐요.”

“하긴 이런 곳이라면 야생 원숭이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영애, 어디 다친 곳은?”

“호호……. 전 괜찮아요.”

아름다운 푸른 눈을 회피한 채 라라는 대답했다. 그는 품속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으나 나침반의 바늘은 빙빙 돌 뿐 한 곳을 가리키지 않았다.

“고장 난 거 아니에요?”

“여기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이상하군. 나침반이 안 듣는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나침반을 다시 집어넣고 그는 마법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들리나. 대답해라.”

몇 번을 더 시도했으나 치지지직 소리만 흘러나올 뿐 묵묵부답이었다. 확실히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잠시 굳은 얼굴로 서있던 라라가 뒤늦게 까먹고 있던 엘리나1과 디체스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 그보다 두 사람을 구하러 가야 돼요!”

“두 사람이나 더 있는 건가.”

“네, 디체스 공작님이랑…….”

“…아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에 실려온 비명 소리에 라라와 카를라히는 그리로 뛰어갔다. 이윽고 두 개의 커다란 고목이 자라나 있는 늪지대가 보였다. 카를라히는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인 것 같군. 아래가 질퍽거리니 조심하도록.”

혹여나 넘어질까 봐 카를라히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라라의 손을 쥐려는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그 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쳐 갔다.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넝쿨을 붙잡은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디체스가 보였다. 정확히는 타잔 흉내를 내고 있는 그가 말이다.

디체스는 시계추처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라라와 카를라히 앞에 뛰어내렸다. 안정적인 착지였다.

“폐하.”

“공작,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거지?”

“정글에 오면 꼭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라라가 페아를 앞질러 나가 디체스와 마주 보고 섰다.

“지금 위급 상황이라는 자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욧!”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여주가 위험에 처해있을지 모를 상황에 타잔 놀이나 하고 있는 남주라니, 한때 로설을 즐겨 읽었던 라라로서는 도저히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까 비명 소리 들린 후로 벌써 40분이나 지났다고요! 지금쯤 혼자서 벌벌 떨고 있을 텐데……! 단장님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렇게 한가하게 딴짓이나 하고 계셔도 돼요!”

“아…….”

디체스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그는 잊고 있었던 인생의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흠칫 뒤로 물러서다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이 내가 무슨 짓을……!”

“땡땡이를 치셨죠.”

“구하러 가야겠습니다, 그녀를. 지금쯤 홀로 두려움에 차있을 터, 한시 빨리 서둘러야…….”

“지금 가도 너무 늦었다고 욕먹을 것 같은데요.”

교통 체증 때문이라고 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디체스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봐 주고 있을 때 머릿속에서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도 저렇게 여주를 걱정하고 뛰어가는 모습이 제법 남주 같지 않느냐.>

‘아니, 저 사람 남주 맞고요. 당연히 저래야 되는데, 앗! 또 딴짓하잖아요!’

얼마나 갔을까. 고목 아래에 자란 버섯을 구경하고 있는 디체스가 보였다. 그는 이리 와보란 듯이 손을 까딱거렸는데 라라가 다가가자 심각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거 자연산 송이버섯 같은데, 돌아갈 때를 대비해 채집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주가 위흠흐드그 믈흤을튼드요.”

“아…….”

디체스의 검은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축축한 흙을 세게 그러쥐고선 믿기지 않는단 듯이 머리를 떨었다.

“이 내가 무슨 짓을……!”

“아까 들었어요! 이제 좀 출발하세요. 45분이라고요!”

라라의 재촉에 디체스는 몸을 일으켜 다시 달렸다. 그 뒤에서 라라는 코치처럼 그가 옳은 방향으로 잘 뛰고 있나 감시했다. 한 5분 정도 뛰었을까, 숨이 찬지 디체스가 멈춰 서서 라라를 돌아보았다.

“3인용 자전거를 타고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방치되어 있는 자전거가 없는지 한번 숲 안을 뒤져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게 무인도에 있을 리 없잖아요, 상식적으로.”

사이좋게 3인용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여주를 구하러 가는 남주라니, 뭔가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

“애초에 엘리나1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요? 돌아가 줬으면 하고 바랄걸요!”

“…믿지 않습니다.”

디체스는 마치 여주와 남주 사이를 이간질하려 드는 못된 엑스트라를 보듯이 라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선 희미하게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엘리나1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대가 아무리 그 앙증맞은 입을 놀려도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내가 3인용 자전거를 타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네가 타고 싶은 거잖아!!’

라라는 작작 하란 의미에서 디체스의 팔을 붙잡았으나 디체스는 그런 그녀를 제게서 차갑게 떨어뜨리고는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망했다. 라라가 그리 생각할 때 어깨를 덮는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허망하게 디체스의 등을 좇던 눈으로 살짝 옆을 돌아보자 페아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공작의 뒤를 쫓지.”

“…아,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 섬에서 자전거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그를 저대로 놔둬도 괜찮겠나? 이대론 혼자 길을 잃을 게 뻔할 텐데.”

“제가 따라가서 말리면 돼요. 페아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호호.”

라라는 괜찮다고 손까지 저어 보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허공에 휘저어지는 라라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럼 같이 찾으러 가지.”

“……?”

뜨거운 손이 포개지자 라라는 놀라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이윽고 그가 등을 지고 먼저 나아가자 라라는 그의 손에 잡힌 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디체스를 따라잡으려면 달리는 게 옳겠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어서 달리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페아도 나랑 같은 이유인 걸까.’

천천히 걷는 이유는 단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함일 텐데도 라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야 서로 잡고 있는 손이 너무 뜨거웠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따르르르릉, 소리를 내며 기다란 3인용 자전거가 수풀을 뚫고 나타났다. 자전거 헬멧을 착용한 공작 디체스였다.

‘진짜 있어?!!’

“뭐 합니까, 모두 내 뒤에 타질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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