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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45)화 (45/115)

45화

문을 열면 바다가 펼쳐진 이런 집을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옆에 야자수 나무가 자라나 있고, 그 뒤로는 맑은 샘물이 흐르고, 매일 아침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는 이곳은 돈으로 사려고 해도 살 수 없을 테다.

<아, 그러고 보니까… 출간 소식 들었느냐?>

‘…뭐가요?’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뭔데요! 말해요! 설마… 『마법소녀 릴리카 정발본』은 아니죠?’

불안한 예감이 라라의 심장을 관통했다. 왠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신이 입술을 씨익 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라라는 맨발로 오두막을 뛰쳐나왔다. 한가롭게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는 엘리나1과 디체스를 향해 서서 목이 나갈 정도로 크게 외쳤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당장이요!!”

“무슨 일입니까?”

서핑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디체스와 엘리나1이 서둘러 라라에게 달려왔다.

엘리나1이 어서 얘기해 보라며 손을 잡고 눈을 맞춰오자 라라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발본 발매 때문에 나가야 된다고 한다면 백퍼 까일 게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탈출을 하려면 이 둘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 이 섬에 위험한 괴물이 있어요!”

자기가 말하고도 라라는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무슨 위험한 괴물이 있다는 겁니까?”

“저, 정말이에요! 딱 봐도 위험하게 생겼다고요.”

믿어달라고 빌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라라의 눈에 심하게 몸을 덜덜 떠는 엘리나1이 보였다. 방금 물에서 나와 추위를 느끼는 건가 싶을 때 엘리나1이 파랗게 질린 입술로 운을 뗐다.

“사실… 여러분께 말해야 된다고… 줄곧 생각했는데… 즐거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니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디체스가 엘리나1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에 더 흠칫하고 놀란 엘리나1이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눈을 굴렸다.

라라는 약간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등에 닿은 바람에 왠지 오싹해서 뒤를 돌아보자 방금 자신이 나왔던 숲이 보였다. 원래 숲이 저렇게 어두웠던가. 슬쩍 엘리나1의 옆에 붙으며 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엘리나1……?”

“…나, 나도 봤었어, 라라.”

엘리나1이 콰악 라라의 팔을 붙잡으며 미친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흰자에 얼룩진 공포심이 라라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괴물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어.”

어디선가 불어온 싸느란 바람에 세 사람은 굳어버렸다.

“일단 흩어지지 말고 여기 모여있는 게 좋겠습니다.”

디체스의 진지한 목소리에 라라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혼자 저 숲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엘리나1이 젖은 서핑복이 찝찝한 양 디체스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하지만… 저희 옷을 갈아입어야 되잖아요. 옷만 갈아입고 가요? 네?”

“그냥 그 옷 입으면 좀 어때서! 어차피 바다 건너가야 되는데!”

라라가 버럭 외쳤다. 오싹한 공포 BGM이 섬 전체에 흐르는 것처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굳이 옷 갈아입겠다고 숲에 들어가야 속이 후련하겠나 싶었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은 항상 쓸데없는 데서 민폐를 끼쳐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느니라. 근데 맨날 주인공은 살고, 주인공 빼고 나머지 애들은 다 죽느니라.>

‘불길하게 그런 말 하지 마요!’

<클리셰가 벌어질 경우에 대비해 미리 얘기하는 것이니라. 자꾸 로판에서 호러물로 흘러가지 않느냐?>

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상쾌하게만 들리던 새의 지저귐은 어디 가고 까마귀의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라라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해는 붉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숲에 들어갔다가 해가 완전히 지기라도 하면 백퍼 무슨 일이 벌어지기 딱 좋을 것이다.

“괜히 섣부르게 숲에 들어갔다가 진짜 괴물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옷 갈아입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안이한 생각이 공포물의 시작이 된다고! 엘리나1, 제발 내 말 들어줘, 응?”

이상하게도 엘리나1은 완고하게 굴었다. 클리셰대로 가겠다는 건가. 라라는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엘리나1의 말대로 옷 갈아입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괴물이 습격해 오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나와 엘리나1은 따로 숲에 들어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라안,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혼자 떨어진 엑스트라가 제일 먼저 죽느니라.>

“…그, 그럼 나도 갈래요!”

라라는 우거지상으로 외치며 주인공들의 뒤를 바짝 따랐다. 깜깜해지기 시작하는 으슥한 숲속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긴 해도 혼자인 것보다는 다 같이 있는 게 나을 테다.

바스락,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에도 라라는 심장이 조이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평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은 나무 사이라든가, 나무 위라든가, 나무 뒤를 자꾸만 살피게 되었다.

심장이 콩알만 해진 자신과는 달리 역시 주인공들은 겁도 없는지 성큼성큼 걸었다. 마침내 갈림길이 나오자 엘리나1과 디체스는 멈춰 서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오두막이 정반대 편인 걸 고려한다면 여기서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각자 옷을 갈아입고 여기서 만나도록 합시다.”

“네. 혹시 기다리다가 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걸로 알고 구하러 가요.”

대놓고 플래그를 세우는 엘리나1의 말에 라라는 슬며시 디체스의 쪽에 붙어 섰다.

“라라……? 남자분이 옷 갈아입는데 따라갈 거야?”

“호호…,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단장님을 지킬게.”

“…그냥 나랑 같이 가자.”

“아니야, 사양할게.”

라라는 정중하게 선을 그었다. 너를 따라가면 무슨 일이 생길 게 뻔한데 미쳤다고 따라가겠니, 하는 눈빛을 건네며 말이다.

“라안 경의 의견이 정 그러하다면 이렇게 갈라서도록 합시다. 엘리나1, 괜찮겠습니까?”

“아, 디체스만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

금방이라도 뭔 일이 있을 것처럼 엘리나1의 미소가 흐릿하게 번졌다. 분명 엘리나1 쪽으로 괴물이 갈 것이다. 그녀는 주인공이니 어찌 됐든 살아남겠지만 말이다.

홀로 왼쪽 길로 들어선 엘리나1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자 라라와 디체스도 뒤늦게 발걸음을 뗐다.

“해가 지면 위험하니 오늘은 해변에서 다 같이 노숙을 하고 날이 밝으면 이곳에 버려진 배가 있나 한번 둘러봐야겠습니다.”

‘상식적으로 무인도에 배가 있겠냐…….’

나무를 잘라서 직접 뗏목을 만들 생각은 죽어도 안 하는 것 같았다. 탈출할 의지가 있긴 한 걸까. 다행히 오두막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고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디체스가 오두막 안에서 서핑복을 탈의하는 동안 라라는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다 갈아입으셨어요?”

“…….”

“단장님? 안에 계신 거 맞죠?”

5분이 훌쩍 지나도록 안에서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라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안에 괴물이 있었다거나. 라라는 이대로 도망칠지, 아니면 슬쩍 문을 열어 그의 생사를 확인할지 고민했다.

결국 양심을 어기지 못하고 라라는 문을 열어보기에 이르렀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두운 오두막 안에는 진녹색머리를 가진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단장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것은 밀실 살인 사건……?>

“…으으, 라안 경입니까?”

그때 정신을 차린 것인지 디체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서핑복을 벗는데 잘 안 벗겨져서 누워서 벗다가 그만 졸았습니다.”

“위기의식을 좀 가지라고요!”

“급할수록 돌아서 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닥쳐요. 잠깐… 저희가 이러는 동안 엘리나1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라라가 흠칫하고 문밖을 내다본 순간이었다. 꺄아아악, 하고 어두운 숲을 뒤흔들 만큼 처절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라라는 슬그머니 디체스의 뒤로 숨었다.

“…엘리나1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대는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공포 영화도 안 봤냐!! 흩어지면 디진다고!!’

라라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체스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오두막을 뛰쳐나갔다. 얼마나 빠른지 붙잡을 수도 없었다.

<무슨 소리가 나면 꼭 가보는 애들이 있는데, 그런 애들이 가장 먼저 죽는 클리셰니라. 물론 그 애가 주인공일 경우 반대로 혼자 남겨진 애가 죽느니라.>

“아, 저도 갈게요! 아, 간다고요!”

급하게 디체스를 따라잡기 위해 뛰었으나 얼마 못 가 숲 한가운데서 그를 놓치고 말았다. 뿌리를 드러내 놓은 채 죽은 나무들과 질퍽한 진흙, 어디선가 들려오는 으스스한 바람 소리. 홀로 남게 된 이 상황에 라라의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다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라라는 몸을 크게 떨었다. 나뭇잎이 거세게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이렇게 공포스러울 수가 없었다. 몸집이 큰 무언가가 제 뒤쪽에 와있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본 순간 죽느니라.>

“…아, 어쩌지……. 목에 담이 와서 고개가 안 돌아가지네……. 호호호.”

라라는 계속 앞만 보고 빨리 걷기 시작했다. 레이디 축지법을 사용해 2.5배속의 걸음을 구사했다. 동시에 파바바박, 하고 이상한 발소리가 먼 뒤에서부터 따라붙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지만 라라는 개의치 않는 듯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리이이익 …휘리리리.”

<겁 안 나는 척 허세 부리는 애들이 가장 먼저 죽느니라.>

“…으허어허엉, 엄마아아!”

라라는 달렸다. 무언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나무들을 지나쳐 한참을 달리자 바위가 띄엄띄엄 놓인 해변이 보였다. 라라는 바위를 기어오르다 바위 사이로 섬에 정착되어 있는 배 한 척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큰 배였다.

‘뭐야, 진짜로 버려진 배가 있잖아……?’

무슨 말하는 대로도 아니고 말이다.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릴 때 덥석 하고 어깨가 잡혔다. 라라는 등줄기를 꿰뚫는 소름에 그 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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