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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44)화 (44/115)

44화

“조우―토다! 사아! 카캇테 코이!”

―바라던 바다! 자! 덤벼와 봐라!

히로사히도 마찬가지로 땅을 밟은 발에 힘껏 힘을 싣고서 달려 나갔다.

“하아아아앗!”

―하아아아앗!

“이야아앗!”

―이야아앗!

서로 다른 소리가 섞이며 그들이 만나는 지점에 눈 깜짝할 새에 한 여인이 뛰어들었다. 그들을 보호해야 된다는 야생 동물 보호 협회의 직원과 같은 사명감이 들어 그만 끼어들고 만 라라였다.

토우지와 히로사히는 반사적으로 검과 창을 거두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그 중간에 있던 바나나 껍질을 밟은 라라가 그대로 넘어져 뒷머리를 돌멩이에 찧은 것이다.

“어이, 싯카리시로!”

―어이, 정신 차려봐라!

히로사히가 가장 먼저 창을 놓고 달려와 라라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답지 않게 애절한 표정이었다. 토우지는 그 자리에서 검을 챙강 떨어뜨린 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허옇게 질린 낯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그만해……. 멸종 위기종끼리 싸우면 안 되는 거야…….”

라라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히로사히의 털이 수북한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순간 반짝하고 밤하늘의 달에서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내려왔다. 그 빛은 온전히 라라의 이마 한가운데에 닿았다. 크X링처럼 점 여섯 개가 라라의 이마에 아로새겨지더니 곧이어 그녀의 몸이 천천히 상공으로 떠올랐다.

라라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점점 높이 부유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까마득한 발밑에서 아우성치는 세 마리의 침팬지들을 돌아본 후 라라는 달의 품으로 돌아갔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며 어디선가 일본 전통 악기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면서도 꿈과 희망이 느껴지는 동양 판타지풍 여성향 게임 OP였다.

―그것은 기적의 이야기.

하얀 배경 속에 꽃잎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물에 빠진 소녀가 눈을 떴을 때.

곧이어 노랫소리에 맞춰 열 장의 꽃잎들이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전혀 다른 세계가 소녀의 눈앞에 펼쳐지는데…….

수백 장의 분홍빛 꽃잎들이 떨어지며 휘날렸다. 동시에 세상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어둠 속에 갇혀있을 때였다.

“…마!! 정신 차리라!! 마!”

“헉…, 허억.”

사정없이 고막을 때리는 외침에 라라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파란 하늘이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눈을 깜빡거리던 라라는 응?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지나치게도 생생한 파도 소리였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지평선과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이 보였다. 라라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경악스럽게 입을 벌렸다.

‘대체 어디까지 떠내려온 거야……!’

“퉤, 에퉤퉤!!”

라라는 곧추세웠던 상체를 구부려 침을 뱉어냈다. 입 안에 모래가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혀가 텁텁할 지경이었다. 한동안 컥컥거리던 라라는 다시 고개를 들어 멍하니 모래 해변을 응시했다.

분명 강에 빠졌는데 뭔 놈의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미지의 섬에 도착한 것 같았다.

‘오, 신이시여……. 자비 좀.’

<아마 논클리셰의 영향이 미친 것이니라.>

‘여기서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되는 거예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살아있는 게 어딘가 싶어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근데 여주와 남주는 살아있느냐?>

‘…혹시 모르세요?’

함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던 순간이 선명한지라 라라는 등골이 오싹하기만 했다. 설마 논클리셰로 인해 주인공들은 죽고 엑스트라인 자신 혼자 살아남았다거나.

‘으아아아아!’

라라는 속으로 괴성을 질렀다.

“일어났습니까?”

“…어, 단장님?”

정확히 등 뒤에서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 이마를 드러낸 디체스가 등산복 차림으로 서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야자수가 들려있었다.

“다행히 멀쩡하시네요. 그보다 엘리나1은요?”

“…….”

디체스는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를 불안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라라는 그를 따라 풀이 우거져 있는 숲으로 들어섰다. 앞장서서 걷던 그가 널찍한 잎을 거두자 동그란 흙더미가 나타났다.

사람 하나를 묻을 정도로 커다란 흙더미였다. 라라는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아, 엘리나1…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라라? 일어난 거야?”

어여쁜 목소리에 라라가 서둘러 모래 더미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자 머리만 내놓고 모래찜질 중인 엘리나1이 보였다. 이대로 머리까지 파묻을까. 라라는 한순간 놀란 자신의 가슴을 달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후우, 놀랬잖아, 엘리나1. 그리고 단장님도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모래찜질하면서 자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 라라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근데 두 사람 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렇게 태평하게…….”

“야자수 마시겠습니까? 아주 답니다.”

“주세요.”

라라는 근처에 오목하게 파인 나무 의자에 앉아 야자수 열매를 받았다. 동그란 구멍이 나있는 야자수에 입을 가져다 대고 흘러나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갈증이 나서 그런지 물이 아주 달았다.

“어서 여기를 탈출할 방법을…….”

“한 잔 더 하는 게 어떻습니까.”

“주세요.”

그렇게 다섯 번 정도 반복했을까, 라라는 포만감을 느꼈다. 적당히 따스한 햇살, 소금기를 담은 시원한 바닷바람, 나른한 기분에 휩싸이자 더더욱 일어나기가 싫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고 휴양지에 온 것처럼 나른하게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라라는 잠깐 졸았는데 눈을 떠보니 하늘은 이미 노을이 져가고 있었다.

물배를 채워서인지 배가 금방 꺼져버렸다. 꼬르륵대는 배를 부여잡은 채 라라는 모래찜질을 즐기고 있는 두 남녀에게 다가갔다.

“슬슬 배가 고픈데… 저희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왜 먹을 게 없습니까.”

모래를 부수고 일어난 디체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활짝 두 팔을 벌렸다.

“이 모든 것이 식량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생선이 먹고 싶으면 바다로, 고기가 먹고 싶으면 숲속으로, 과일이 먹고 싶으면 저기 나무로, 싱싱한 야채를 맛보고 싶다면 저기 지천에 널려있지 않습니까?”

“저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애초에 여기 무인도가 맞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고, 잠을 잘 데도…….”

“백번 말하는 것보단 한번 보여주는 게 더 낫겠군요. 따라오십시오.”

디체스는 몸에 묻은 모래를 털고 성큼성큼 바닷가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를 쫓던 라라는 갑자기 푸른 바다에 뛰어드는 그의 모습에 경악했다. 철썩이는 파도를 맞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이 위험하기 짝이 없었는데 얼마 안 가 디체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꺄악! 사람 살려!”

바다에 빠진 것일 테다. 라라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를 때 디체스가 수면 위로 나타났다. 팔뚝만 한 물고기를 두 손에 붙잡은 채 말이다.

“받으십시오!”

힘차게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자신에게 힘껏 던지자 라라는 기겁하며 옆으로 피했다. 동시에 허리춤에 걸려있던 마검이 물 만난 고기처럼 철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 제법 싱싱하네! 손질은 내한테 맡기라! 내가 누고? 바다낚시 동호회 경력만 21년 차 아이가! 생선 손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다 아이가.”

“믿어도 돼요?”

“마! 속고만 살았나!!”

하긴 과일도 잘 깎았었다. 라라는 마검을 대충 바닷물에 씻고서 갓 잡은 물고기 비늘에 가져다 댔다. 차마 해체되는 과정을 볼 수 없어서 최대한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말이다.

샤사사삭, 하고 마검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디체스는 커다란 야자수 잎을 따 와 마검 옆에 가져다 대었다.

한 2분 정도가 흘렀을까, 그의 낮은 감탄사에 라라는 슬쩍 물고기에게 시선을 줬다. 뼈와 살이 완전 분리된 물고기는 횟집에서 팔 것 같은 모양새로 변해있었다.

“내장은, 마! 버리지 말고 잘 모아뒀다가 매운탕을 끓여먹으면… 캬아, 마!! 소주랑 같이 묵는 기다!”

마검이 이렇게까지 흥분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마검의 진심 어린 조언을 흘려들으며 라라는 하얀 살점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갓 잡아서 그런지 입 안에 퍼지는 풍미가 남달랐다.

“…어머, 이거… 진짜 맛있어요.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아요.”

“엘리나1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여기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그렇게 잠시 자리를 벗어난 디체스는 5분 뒤 통기타를 메고 엘리나1과 돌아왔다. 세 사람은 회를 중간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왕년에 통기타를 좀 다뤘는지 디체스의 연주 실력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초록 언덕에~ 가방을 메고~ 노란빛 태양 축제를 여는…….”

“초록 언덕에~ 가방을 메고~ 노란빛 태양 축제를 여는…….”

“초록 언덕에~ 가방을 메고~ 노란빛 태양 축제를 여는…….”

해가 저문 후에도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와하하하 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느라 바빴다.

* * *

이곳에 떠내려 온 지 11일째, 라라는 굳이 탈출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는데, 사생활 보호와 비를 막을 용도의 개인 오두막이 생겼다는 것과 개인 욕실로 쓸 수 있는 세 개의 바위 샘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곳이 바로 지상 낙원이 아닌가 싶었다. 라라뿐 아니라 모두가 만족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불만을 품은 자라고는 이 세계의 창조주뿐이었다.

<너희 탈출 안 하느냐……? 뭔 놈의 정글의 원칙도 아니고, 심각함을 조성해 보려고 노력을 해보란 말이다!>

‘그치만 굳이 여길 나갈 필요가 없잖아요.’

<없긴 왜 없느냐! 이대로 가다간 로판이 아니라 무인도 버라이어티가 된단 말이다!>

‘그거참 재밌겠네요, 호호.’

야자수 열매를 쪽쪽 빨며 라라는 한가롭게 오두막에 앉아 집 앞 경치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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