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와타시오 그렇게 뚫어져라 미나이데 쿠다사이.”
―…나를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마십시오.
“아, 죄송해요. 그… 눈 때문에 본 게 아니라…….”
“큿, 됐습니다. …다레모 와타시오 이카이 시테 나이카라. 모 익숙해졌으니카라.”
―큿, 됐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젠 익숙해졌으니깐.
그의 왼쪽 눈에는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그는 어릴 적 히스테릭적인 어머니를 연민하면서도 사랑했지만 결국 어머니가 ‘너의 그 동정하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며 휘두른 도자기 조각에 맞아 상처가 남게 되었고, 외할머니는 손자인 그가 찾아오면 쌀쌀맞게 등을 돌려버렸고, 외할아버지는 그를 동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쓸모없는 녀석이라며 뒤에서 혀를 찼다.
고조할아버지는 그 여자의 아들이라며 배척했고, 고조할머니는 돌아가셔서 아무 말씀 없으셨고, 친할아버지는 난 너를 손자로 인정할 수 없다며 분노하셨고, 친할머니는 그에게 암살자를 보내었고, 배다른 이복형들은 그를 애꾸눈이라고 꾸준히 놀려 왔으며… 너무 길어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편, 궁의 바깥으로 나온 히로사히는 말을 몰고 온 두 장수를 만날 수 있었다.
드높은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도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 두 장수는 적국의 명장들로, 한 명은 노쇠했고 다른 한 명은 젊었다. 닮은 얼굴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들은 부자지간이었다.
“오겡끼데쓰까. 히사시부리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오랜만입니다.
노장수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히로사히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며 형식적인 말을 전한 뒤 눈앞에 있는 말에 손을 가져갔다.
가지런히 잘 정리가 된 갈기와 검은 윤기가 흐르는 짧은 털이 훌륭한 품종의 명마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히로사히가 탐난다는 눈길로 명마의 콧등을 쓸어 만지자 곧바로 노장수가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얏빠리 이 나라 국민들은 무지데스네! 하야쿠 들어가 키미노 주군에게 전하십시오. 왕녀, 카케스기 츠우미를 돌려받고 싶다면 데스네.”
―역시 이 나라 국민들은 무지하군요! 서둘러 들어가서 그대의 주군에게 전하십시오. 왕녀, 카케스기 츠우미를 돌려받고 싶다면 말이죠.
“호오, 소―데스카? 저도 키미에 대해 키잇따 오보에가 있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저도 당신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히로사히는 자신의 신경을 거스른 적국의 명장 앞에서도 나른하게 턱만 문질렀다.
“오만방자스기테 예의를 차릴 줄 시라나이. 딱 아노 코토바에 어울리데스.”
―오만방자하여 예의를 차릴 줄 모른다, 딱 그 말에 어울리는군요.
“키이사마!! 이마 난또……!”
―이 자식!! 방금 뭐라고……!
잠시 도발적인 눈으로 거만하게 장군의 몸을 훑어 내리던 히로사히가 씨익 입술을 휘었다.
“농담데스. 너무 흥분스기룬게 아니데스?”
―농담입니다. 너무 흥분한 게 아닙니까?
히로사히는 먼 길을 달려왔을 그들을 서둘러 궁 안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성대한 잔치가 성안에서 베풀어졌다.
이 성의 하녀라는 침팬지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어 오는 것을 막을 새도 없이 라라는 그녀들에게 붙잡혀 목욕 시중과 옷시중을 받았다. 젖은 드레스는 말려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녀들은 이곳 의복을 라라의 몸에 갖다 대며 무엇이 나은지 서로 의논하다가 붉은 비단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혔다. 허리를 두른 희한한 금색 띠를 깔끔하게 등 뒤에서 정리한 후 겨드랑이 부분에도 주름이 지지 않도록 살살 펴 정리해 주었다.
기모노라고 하는 다른 세계의 옷으로 갈아입은 라라는 곧바로 머리를 틀어 올리게 되었다. 앞머리를 뭉툭하게 말고 그 속에 여섯 개의 금비녀를 찔러 넣었다.
옆머리도 수사자의 갈기처럼 늠름하게 말아놓더니 뒷머리를 금 밧줄과 비단을 동원해 여러 번 묶고 거기에 또 비녀를 수십 개씩 찔러 넣었다. 고개를 들면 머리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머리 장식이 무거웠다.
곧바로 그녀들의 안내를 받아 라라는 성내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넓은 다다미 바닥이 펼쳐지고 그 끝에 술상을 펴고 앉아있는 세 명의 침팬지가 보였다. 라라가 한 발을 디디기 무섭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장수가 홱 머리를 돌렸다.
“코치 킷떼 사케오 따라보아라. 하야꾸!”
―이리 와서 술을 따라보아라. 어서!
잔뜩 술에 절어있는 장군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라라에게 손짓했다. 이에 상석에 앉아있던 카케스기 토우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털에 묻혀서 찌푸린 건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그의 검은 눈자위로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라라, 기모노가 키레이다. 여기 스와레.”
―라라, 기모노가 아름답군. 여기 앉아라.
카게스기 토우지는 라라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라라는 버선을 신은 두 발로 사뿐사뿐 다가가 그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미 충분히 무르익은 술자리에 어색하게 끼어 제 손에 들린 도자기 술잔만 내려다보았다. 분홍빛 벚꽃이 수줍게 띄워져 있었다.
“사케가 입맛에 맞지 나이카?”
―술이 입맛에 맞지 않느냐?
“아니에요, 맛있어요.”
고개를 들어 살며시 웃은 라라가 홀짝이며 술을 들이켰다. 노장군은 그제야 몽롱하게 취해있던 눈을 크게 떴다. 왕의 여자를 건드려 버린 것이다.
“고멘나사이. 오레노 실례를 도카 용서시테쿠다사이.”
―죄송합니다. 저의 실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시츠레이다. 그쪽 나라에선 사과를 안나 후우니 스루노카?”
―실례다. 그쪽 나라에선 사과를 그런 식으로 하는가?
토우지가 곧바로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지적하자 노장군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무거워져 갔다. 노장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나 전혀 반성의 기미라곤 없었다.
이미 충분히 기분이 상한 라라였지만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감정에 휘둘려 경거망동할 순 없었다. 몸을 일으킨 라라는 이곳 예법에 맞게 기모노의 앞섶을 누르며 살짝 고갤 숙였다.
“술에 취해 머리가 어지럽네요. 전 이만 나가볼게요.”
굳이 불편한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토우지가 붙잡기도 전에 나가버린 라라는 그대로 하녀도 없이 성안의 마당으로 나왔다. 길을 잃어버려 우연히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마당 위에는 한 그루의 거대한 벚꽃나무가 있었다. 새하얀 벚꽃이 마구 흩날리는 그 아래 한 인영이 움직이고 있었다.
“헛!”
기다란 창을 360도로 휘두른 후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장신의 몸이 곧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원을 그리며 자세를 취했다. 다시 허공을 향해 창을 겨누고서 다리를 차올리는 그는 다름 아닌 붉은 털의 침팬지 히로사히였다.
“허엇―!”
창槍무를 추는 그의 모습에 라라는 순간 마음이 홀렸다.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자가 98% 일치한다더니, 정말 그 정확하고도 민첩한 움직임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처음 동물원에 놀러 와 침팬지와 조련사의 공연을 본 기분이었다. 라라는 놀라움과 감탄에 차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휘두른 창의 잔영을 따라 벚꽃이 쏟아지고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색소가 붉은 긴 털들이 밤바람에 잔잔히 흩날렸다.
그때였다. 손바닥에 난 털 때문에 안 미끄러질 줄 알았는데 그의 손에서 순간 창이 벗어났다. 허공에 힘껏 내질러진 상태로 창은 그의 손을 떠나 먼발치에서 걸어오고 있던 어느 사내에게로 향했다.
라라는 날아가는 창을 따라 고개를 돌린 후 그대로 굳었다. 그 방향에는 한쪽 털만 길게 길러 눈을 덮은 푸른 털의 침팬지가 책을 읽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문자를 읽을 줄 안다는 사실보다도 침팬지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요!”
힘껏 외친 그 소리에 그는 흠칫 고개를 들어 날아오는 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혀 창을 피한 그는 창이 지나가 등 뒤에 있는 기둥에 박힌 것을 본 후에야 다시 상체를 세웠다. 천천히 나부끼는 긴 푸른 털들 위로 달빛이 어렸다.
그의 오른쪽 눈에도 투명하고 환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한 눈망울이었다. 이제껏 그녀를 경계하던 그였지만 그는 단번에 경계심을 허물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시테, 도시테 쓸모나이 소리만 들어온 와타시오 구한 것 데스카?”
―…어째서, 어째서 쓸모없단 소리만 들어온 이 나를 구한 것입니까?
라라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놀랐다. 그의 눈동자에 맺혀있는 그것은 눈물이었다. 침팬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기에 라라는 이번에도 감탄에 차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키미와 나제 보잘 것 나이 와타시오…….”
―…당신은 어째서 보잘것없는 이 나를…….
“그야 그린벨트 안에서는 야생 동물 보호를 우선시해야 되니까요…….”
자신을 향한 희미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는 그녀에게 다가서다 말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제게 살아있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준 여인은, 이렇게 따스하게 손을 건넨 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손나, 손나 하나시 하지메테 들어봅니다. 오카상께도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그런, 그런 얘기는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어머니께도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곧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럼 어머니도 만날 수 있을 거고.”
울고 있는 그를 앞에 두고 라라가 안쓰러워 침팬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줄 때였다.
챙챙,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당 위를 울렸다. 멀리서 대결하는 토우지와 히로사히가 시야에 들어오자 라라는 그대로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잠깐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어버렸다. 침팬지도 인간과 같다. 인간처럼 웃고 슬퍼하고 화를 낼 줄 알았다.
“히로사히……! 소로소로 결차쿠오 짓자!”
―히로사히……! 이제 슬슬 결착을 짓자!
토우지가 사나운 기세를 드러내며 힘껏 지면을 박차 히로사히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