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주 천천히 공중에 떠오른 그가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갑자기 그의 온몸이 검은 구에 휩싸이더니 그 속에서 탈의를 하는 건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뽀얀 속살이 보였다.
“으아아아! 눈갱!!”
검은 구 근처에 있던 라라는 그만 눈을 버리고 말았다. 그건 라라뿐만이 아니라 조금 뒤에 서있던 디체스와 엘리나1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은 채 괴로워하다가 끝내 절벽 아래로 나란히 몸을 던졌다.
* * *
온통 새까만 세상이었다. 어디선가 아득히 들려오는 메아리에 라라는 잠시 잃었던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눈을 뜨는 것이 잘되지 않았다. 눈두덩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며 그 사이로 옅은 노을빛이 새어 들어왔다.
‘여기는 대체…….’
라라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기 전에 귓가를 때리는 매서운 음성이 있었다.
“어이, 오레 사마가 미에루카……!”
―어이, 이 몸이 보이는가……! (자막)
흐릿한 시야 속에 점점 더 또렷하게 한 물체의 윤곽이 잡혀갔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거멓다는 거였다.
초콜릿처럼 달콤해 보이는 구릿빛 털들이 안면을 덮고 있었다. 바위만 한 얼굴에 나부죽하고 커다란 주먹코, 손가락 두 개를 동시에 찔러 넣어도 들어갈 것 같은 넓은 콧구멍, 일단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곧이어 그의 걱정스럽게 일그러진 검은색 눈이 보였다.
라라는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떴다. 뒤늦게 자신이 그 인간 아닌 털북숭이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화들짝 놀라며 라라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그는 투박한 이빨 두 개가 튀어나온 입술을 씨익 끌어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라라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침팬지? 그런 것치곤 제대로 옷을 입고 있어.’
놀라운 것은 라라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의 옷이라는 거였다.
양쪽의 빳빳한 옷자락이 겹치도록 교차시킨 목 부분은 V자로 벌어져 있었는데 단추가 아닌 끈으로 허리를 둘러매고 있었다. 주름이 잡힌 통 넓은 바지는 짙은 먹색이었다. 구두가 아닌 발가락 모양을 따라 Y자 형태를 띤 샌들은 나무로 만든 것처럼 딱딱해 보였다.
라라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동안 맞은편에 서있던 그도 라라의 옷차림새를 훑어 내렸다.
물에 젖어있었으나 치맛자락이 여러 겹 덧대진 펑퍼짐한 양식은 하늘에서 온 자다웠다.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무녀인가……. 깊이 생각에 잠겨있던 남자가 입을 연 건 조금 뒤였다.
“오마에와 아소코 소라에서 오칫따.”
―너는 저기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의 손끝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라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굳어버렸다. 하늘이 기이한 보라색이었다. 자신은 분명 강에 빠졌을 텐데 이곳은 자신이 알던 시대가 아니었다.
~벚꽃 미남 시대~ 시공을 뛰어넘어 100% 미라클 러브의 시작이었다.
“오레노 나마에와 카케스기 토우지다. 오마에노 나마에와?”
―나의 이름은 카케스기 토우지다. 너의 이름은?
“…이름 말하는 거죠? 라라 슈모르드예요.”
전혀 생소한 언어였지만 라라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らら すもるづ? 헨나 나마에군.”
―라라 스모루즈? 이상한 이름이군.
물에 푹 젖은 생쥐 꼴의 여인에게 씨익 웃어 보인 구릿빛 털의 침팬지는 곧 그녀를 안아 들었다. 라라가 꺄악 하고 새된 소리를 질렀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내궁 쪽으로 향했다.
하얀 복사꽃이 피어난 대궐의 마당은 라라에게는 생소한 동양의 아름다움을 그득 담아내고 있었다.
어느새 라라는 아늑한 털가죽 소파에 누워있는 기분으로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젖은 채로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천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전설의 무녀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카케스기 토우지는 웅장한 긴 터널을 한번 통과한 후 잠시 멈춰 섰다. 맞물린 격자무늬의 문 앞에 웬 장신의 침팬지가 긴 창을 들고 어슬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척을 느낀 것인지 침팬지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털을 삐죽삐죽 세운 침팬지는 금수가 놓인 화려한 하오리를 윗몸에 걸치고 있었다. 경비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거만한 표정과 눈썹을 으쓱거리는 능글맞은 모습에서 라라는 그가 예사 신분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헤에― 카와이 네코 짱다네.”
―헤에― 귀여운 고양이네.
“코이츠와 코타로 히로사히다. 성격은 베츠니 와루쿠 나이.”
―이 녀석은 코타로 히로사히다. 성격은 별로 나쁘지 않아.
“하? 난―다토?!”
―하? 뭐―라고?!
발끈하며 적갈색의 털을 더욱 벌겋게 물들이는 히로사히는 확실히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나쁜 침팬지 같지는 않았다. 라라가 경계를 풀 때 히로사히의 뭉툭한 중지 끝이 라라의 뺨을 꾹꾹 찔러왔다.
“소레요리 코노코와?”
―그보다 이 아이는?
“히롯따.”
―주웠다.
“도코데서?”
―어디서?
“그건 오마에가 시라나이도 된다.”
―그건 니가 몰라도 된다.
카케스기 토우지는 과한 관심을 갖지 말라며 미리 선을 그었다. 이에 히로사히는 시시하다며 손을 거두고선 한 걸음 물러섰다.
토우지는 미닫이로 된 문을 열고서 다다미 위에 라라를 내려두었다. 하녀를 불러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을 서둘러 준비하라고 명령한 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선 히로사히가 떠나가지 않고 하녀에게 치근거리고 있었다. 여성 편력이 심한 녀석이기는 하나 믿을 만한 자였다.
토우지가 히로사히에게 다가가자 히로사히는 하녀를 아쉬운 듯 놓아주고서 토우지 쪽으로 고갤 돌렸다. 뛰어난 무장답게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이었다. 토우지는 그를 보며 잠시 말없이 침묵을 지키다 문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었다.
“히로사히, 이 온나를 타노무.”
―히로사히, 이 여자를 부탁한다.
“오마에와 도코에 가려고.”
―너는 어디에 가려고.
“…이모토오 찾아와야지.”
―…여동생을 찾아와야지.
“센소우를 벌일 츠모리카.”
―전쟁을 벌일 생각인 거냐.
몸을 돌려 가려는 토우지의 어깨를 붙잡아 세운 히로사히는 답지 않게 무거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히로사히는 알았다, 토우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홍색 털의 왕녀, 카케스기 츠우미의 납치 사건으로 안 그래도 날이 설 대로 선 성내 분위기였다. 그녀의 오라비이자 이 성의 주인인 카케스기 토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쟁을 각오하고서라도 하나뿐인 여동생을 돌려받겠다는 의지로 활활 타올랐다.
히로사히는 멀어져 가는 토우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문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기 무섭게 털이 하나도 자라나지 않은 새하얀 등이 보였다.
드레스를 반쯤 탈의하고 있던 라라는 화들짝 놀라며 속옷 차림의 몸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자신을 향해 잔뜩 경계심을 세우고 있는 라라를 보며 히로사히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손나니 경계하지 않아도, 그 몸엔 칸신조차 나이카라.”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그 몸엔 관심조차 없으니까.
풍성하고 윤기 있는, 심지 굵은 털일수록 아름다운 미인으로서 취급되는 이 나라에서 아무래도 눈앞의 여자는 꽤 돌연변이처럼 생겼다. 갓 태어난 아기 침팬지처럼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후시기다네. 혼또니 털이 나이노카? 오마에 닝겐이 맞긴 하냐?”
―신기하네. 정말 털이 없는 거야? 너 인간이 맞긴 하냐?
“제가 인간인데요…….”
그쪽이 침팬지이시고, 라고 말하려 했으나 라라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외계인이 봤을 때 자신도 외계인인 것을, 누가 외계인인지 가리는 이런 논쟁은 무의미했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해야 되는 것이다.
“소레요리―”
―그보다도―
구부정하게 서있던 히로사히가 상체를 폈다. 그러곤 침팬지답지 않게 두 발로 성큼성큼 걸어와 라라의 턱을 붙잡았다.
라라는 동굴처럼 깊고 커다란 콧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살짝 목을 움츠렸다. 이에 히로사히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흥미롭다는 양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이마쯤에서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붉은 털이 그의 잔뜩 찌푸려진 콧등에 안착했다.
“…토우지가 난데 키미오 거두어들인 건지 와카루 키가스루.”
―…토우지가 어째서 너를 거두어들인 건지 알 것 같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니모 아니야. 소레요리, 씻는 걸 도와줄 테니까 벗는 게 어때?”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씻는 걸 도와줄 테니까 벗는 게 어때?
“무, 뭐라는 거예요! 이 침팬지가!”
라라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정색했다. 그 모습이 나름 귀여워 보인 건지 히로사히가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모시로이군. 너 같은 여자는 하지메테다.”
―흥미롭군.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다.
“……!”
“와타시노 온나가 돼라.”
―나의 여자가 돼라.
히로사히가 라라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두 사람의 거리가 확 좁아졌다. 라라는 당혹스러워서 잠시 굳어있다가 성추행 침팬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거 놔요!” 하고 격렬하게 외치며 솜방망이를 휘둘렀다.
그의 털 수북한 팔등을 온 힘을 다해 퍽퍽 내리치던 순간,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창호지를 덧댄 문 위로 무릎을 꿇고 부복한 침팬지의 형상이 드러났다.
“히로사히 사마! 적국에서 장군이 토챠쿠했습니다.”
―히로사히 님! 적국에서 장군이 도착했습니다.
“도코에 있냐!”
―어디에 있냐!
“바깥데스!”
―밖입니다!
그답지 않게 흥분한 표정의 히로사히는 콧구멍을 크게 벌렁거리며 긴 창을 들고 뛰쳐나갔다. 라라는 제발 밀렵꾼이 온 거였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그러다 문밖에서 부복한 자세로 앉아있던 자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털이 한쪽만 길게 내려와 왼쪽 눈을 덮고 있는 침팬지였다.
독보적인 머리스타일에 라라가 눈길을 줄 때 그가 스윽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