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41)화 (41/115)

41화

디체스는 붉은 코팅이 된 산악동호회 아저씨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옷도 등산 마니아들이 즐겨 입는 스포츠 옷이었다. 그는 곧 등산 가방을 열어 오이가 담긴 밀폐 용기 통을 꺼냈다.

네모나게 썰린 오이를 각자의 손에 배분한 그가 사각하고 매력적인 하얀 이로 오이를 베어 먹었다.

“자, 출발하기 전에 셋이서 나눠 먹읍시다.”

“…저기, 이게 대체 무슨 데이트예요?”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과정, 이것을 데이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굳이 연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하 직원들과 한마음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가슴속에서 자연스레 들끓는 뜨거운 동료애! 조직 간의 끈끈한 사랑! 이것이 바로…….”

라라는 이 뒤에 이어지는 긴말을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아무튼, 라안 경이 와주어 다행입니다. 데이트에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꼭 참가하라고 했는데 두 사람 빼고 오지 않았군요. 뭐 괜찮습니다. 다들 바빠서 오지 못한 것일 테니. 듣기론 카식 경은 오늘 여동생 결혼식 때문에 못 온다고 했습니다. 벌써 열세 번째 결혼식으로 인한 불참가이지만 여동생이 열세 명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건 네가 호구라서 그런 거고.’

라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속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는데, 말이 데이트지 즉 기사단 주말 등산 친목회에 불려 나온 것이었다.

라라가 그들을 뿌리치기도 전에 거센 손아귀가 라라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탄 마차는 수도 외곽에 위치한 가까운 산으로 향했다.

“저기… 헉, 어디까지 올라가시게요.”

“앞으로 정상까지 1.5km 남았습니다. 힘내십시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상사를 노려보며 라라는 지나온 등산로를 돌아보았다. 내려가고 싶다. 자신이 왜 이 주말에 나와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나1은 디체스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볼을 붉혔다.

<정말 노벨평화상 줘야 하느니라. 저런 인성이니 여주인공 하는 것이니라.>

‘아……. 집에 가고 싶다.’

헥헥거리며 라라가 산 중반에 도착했을 때 여주와 남주는 이미 소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꽝꽝 얼려놓은 생수가 반쯤 녹아있었는데 엘리나1이 차갑지 않게 손수건에 싸서 디체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대가 줘서 그런지 물이 달군요, 엘리나1.”

“…….”

화악,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엘리나1이 오이를 사각사각 베어 먹기 시작했다. 라라는 적당히 그 근처 바위에 주저앉아 숨을 달랬는데, 듣고 싶지 않아도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합니다. 아마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너무 기대돼요.”

“엘리나1, 그대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 그런 말 마세요. 부끄러워요.”

‘…진짜 다 때려치우고 하산하고 싶다.’

라라가 허탈한 빛을 띤 눈으로 세상을 담고 있을 때 돌연 허리춤에 걸려있던 마검이 진동했다.

“마!! 지금 엄청난 기척이 느껴진다 아이가!”

“뭐, 뭐요?”

정말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여주와 남주를 보니 뜬금없지도 않았다. 사고를 몰고 오는 이들의 특성상 산에 제 발로 들어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더 신기할 테니 말이다.

비록 사무직이라지만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디체스는 일찌감치 기척을 눈치채고 검을 뽑고 있었다. 그가 심각함을 느끼고 가늘게 떠는 엘리나1을 등 뒤에 숨긴 채 사방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선택받은 자여, 정작 너를 지켜줄 등이 없구나.>

‘아니까 조용히 해주실래요.’

라라는 널찍한 나무 기둥 뒤에 숨어 혹시 몰라 핸드백 안에 든 짱돌을 슬며시 쥐었다. 마검이 왜 자신을 쥐지 않냐고 항의했지만 아무래도 실력 검증이 안 된 마검보단 짱돌이 더 든든했다.

“꾸웨에엑!”

그때 수풀 사이로 번개무늬가 등에 새겨진 노란 멧돼지가 튀어나왔다. 몬스터인지 지그재그 모양의 꼬리에서 파지직 전기가 튀어 올랐는데 디체스는 쉽사리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칫, 하고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디체스와 엘리나1이 주춤주춤 물러설 때 라라는 홀로 활짝 미소 지었다.

‘보세요, 나무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구요. 훗.’

<정신 승리 오졌느니라.>

라라가 속으로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을 외치며 웃고 있을 때였다. 노란 멧돼지가 재빠르게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자 디체스와 엘리나1이 “어, 어.” 하며 라라가 숨은 나무 뒤로 달려왔다.

“으악…, 왜 여기로 와요!”

“조직이란 하나가 죽으면 전멸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단장님이 하시는 짓이 전멸이거든요? 그보다 숨 막히니까 달라붙지 마세요……! 엘리나1, 너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매미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달라붙어 있을 때 노란 멧돼지가 방향을 틀어 나무를 향해 사납게 돌진해 왔다.

“마!! 이때다! 내를 써라, 주인!”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라라는 다짐한 듯 짱돌을 쥔 손에 힘을 가득 불어넣어 던졌다. 짱돌은 빠르게 날아가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던 노란 멧돼지의 머리에 맞았다.

“꾸웨에엑!”

노란 멧돼지가 털썩 쓰러졌다.

<신난다! 노란 멧돼지(을)를 잡았다!>

“휴우…….”

라라가 안도하려는 그때였다. 뒤에서 파바바밧 하는 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수풀 너머로 노란 멧돼지가 떼거지로 나타났다.

<올, 주머니몬 GO 성지?>

신의 한가로운 음성을 들으며 라라는 경악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뛰어요!!”

라라는 주인공들과 함께 살기 위해 달렸다. 이쯤 되면 남주가 멈춰 서서 자신이 상대할 테니 먼저 가라며 몬스터들을 막아줄 만도 할 텐데 제가 제일 앞장서서 달리고 있었다.

앞에서 달릴 거면 제대로 가든가, 디체스의 앞에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다행히 절벽 아래에는 긴 강이 흐르고 있었다. 뛰어내리기엔 높이가 꽤 후덜덜했는데 갑자기 그가 라라와 엘리나1의 손목을 붙잡았다.

“숨 참으십시오.”

“지, 지금 뭐 하시려고요! 뛰어내리는 거면 저 죽어도 싫어요!!”

미친 듯이 거부하는 라라에 비해 엘리나1은 순순히 눈을 꼭 감고 그의 품에 기대었다. 차라리 둘이서 떨어지면 떨어졌지 나는 못 한다. 저 까마득한 강에 맨몸으로 뛰어들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죽어도 여기서 죽을 테니까 이 손 놔요!!”

“미쳤습니까?”

“미친 건 단장님이라고요! 여기서 뛰어내리면 여주와 남주는 어떻게든 살지 몰라도 전 아니라구요!”

논클리셰가 침범하지 않았다는 조건하에 말이다. 라라는 줄 없는 번지 점프 체험을 했다가는 그대로 심장 마비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노란 멧돼지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지만 차라리 몸통 박치기를 당할지언정 뛰어내리긴 죽어도 싫었다.

“…답답하긴, 어서 내게 몸을 맡기십시오. 자!”

“둘이서 뛰어내려요! 전 싫으니까!!”

완고한 거절을 표하며 라라는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내부 갈등에 노란 멧돼지들은 잘됐단 듯이 거칠게 콧김을 뿜으며 라라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꺄아악! 어서 짱돌을 구해야…….”

“마!! 내 있다 안 카나!”

“라라, 위험해! 누가 좀 도와줘요―!”

엘리나1의 절박한 외침이 울린 순간이었다. 라라의 주변에 강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갑자기 그녀 앞에 널찍한 등이 나타났다.

사납게 일렁이던 흑발이 잔잔하게 가라앉고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피처럼 새빨간 눈이 엘리나1에게 향해졌다.

“…아, 당신은 설마 남주……?”

마왕 남주 페레우스의 등장에 엘리나1은 놀란 눈을 깜빡였다. 여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어디선가 남주가 등장하는 클리셰가 성립된 것이다. 비록 서로가 잘 모르는 사이여도.

“아…, 저 혹시 죄송한데… 남주 중 한 분이시죠?”

“아, 네, 네……. 여주이신 거죠? 처음 뵙겠습니다.”

“그럼 혹시 좀 도와주시겠어요? 초면에 죄송해요.”

“…아, 도움이요? 아하, 네. 물론이죠.”

어색한 기류도 잠시, 페레우스는 다시 정면을 돌아보았다. 심상치 않은 등장에 놀란 노란 멧돼지들이 잠시 움찔거리다가 한 놈이 달리자 곧 우르르 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둠의 힘이여, 모두 내게 깃들라. 세상의 모든 어둠은 나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며 형이며 누나이며 동생이며 삼촌이며 외삼촌이며 외숙모이며…….”

숲에 깔린 어스름한 기운들이 서서히 그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느런 바람에 천천히 나부끼는 검은색 머리칼이 노란 멧돼지들로 하여금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증조할머니이며 증조할아버지이며 증조할머니의 동생이며 증조할머니의 언니이며 증조할머니의 어머니이며 증조할머니의…….”

‘아니, 해도 해도 너무 길잖아! 것보다 멧돼지들이 기다려 주고 있어?!’

<변신 중에는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클리셰이니라.>

클리셰가 작용해서 다행이라고 라라는 생각했다. 이때를 틈타 공격했다면 아마 완승을 했을 텐데 적을 배려하다니 어쩌면 인간보다 나은 몬스터들이었다.

그동안에도 개미가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모여든 어둠의 아우라가 페레우스의 발끝을 휘감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변신 신의 시작이었다.

“고조할머니의 할아버지인 최초의 마왕 크라노스뮬쿠스리오디온파라마엘렉스아리토할라니우스베레모인에게 물려받은 어둠의 힘을 깨우나니, 이어져 있는 내 모든 혈족들의 힘을 빌리노라…….”

페레우스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가느다란 실 같은 어둠의 힘이 천천히 그의 새끼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약지, 중지, 검지, 엄지를 지나 손바닥을 덮었다. 아직 왼손이었다.

“고조할아버지의 할머니인 최초의 여마왕 피렐레아코노방구미와고란노스폰사노데쿄데쿠리시마스에게 물려받은 어둠의 힘을 깨우나니, 이어져 있는 내 모든 혈족들의 힘을 빌리노라…….”

이제야 오른손의 차례였다. 가느다란 실 같은 어둠의 힘이 천천히 그의 새끼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약지, 중지, 검지, 엄지를 지나 손바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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