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너 데이트 신청 받았다면서?”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엘리나1이 말해줬어.”
“…오, 세상에.”
밖에서 듣고 있었구나. 라라는 오늘부로 인간관계 끝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엘리나2의 어깨를 쥐고 엘리나1에게 뭐 더 들은 게 없냐고 자세하게 물으려는데 옆에서 웬 까칠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네 눈엔 나는 안 들어오나 보지?”
“…아, 미안해요, 미하일.”
그러고 보니 미하일의 집에 왔는데 미하일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라라가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도 더 이상 지랄맞게 굴지 않았는데, 대신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누구랑 데이트하는데?”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닌데요……. 디체스 공작님한테 신청만 받은 거예요.”
“흐음…….”
자기가 물어봐 놓고서 미하일은 관심 없다는 듯이 무료한 표정을 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라라를 지나쳐 가며 한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그래, 좋겠네.”
“…뭐가 좋아요. 지금 전 혼란해 죽겠는데!”
“혼란하든 말든 내 알 바야?”
또 왜 저렇게 까칠한지 알 수 없었다. 라라는 그의 눈빛 속에서 짜증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질투를 할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디 가요?”
“졸려. 난 들어가서 잘 테니까 둘이서 떠들든가.”
미하일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자리를 피하는 이유가 뭔가 석연치 않다고 여길 때쯤이었다. 1, 2, 3초가 흐르고서 라라는 뒤늦게 자신이 남장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하일 입장에선 남자가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는 얘기로 들렸을 텐데,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당혹스러워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오, 오해예요. 문 좀 열어봐요!”
라라는 뒤늦게 침실 문을 두드리고 열어보려 했지만 안쪽에서 얼마나 단단히 걸어 잠근 건지 열리지가 않았다.
‘오……. 인생.’
머리를 붙잡고 라라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데이트 신청을 받은 지 불과 하루 만에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너도 차암! 고작 데이트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맘 편하게 받아들여.”
“눈치가 없니……. 그리고 너는 엘리나1의 가족이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에이,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엘리나1과 디체스 공작님, 공식적인 연인 사이인 것도 아니잖아?”
“딱 봐도 엘리나1이 공작님을 좋아하는데 나 같은 게 끼어들면…….”
“라라.”
엘리나2가 조금 화난 얼굴로 걸어와 라라의 앞에 섰다.
“나 같은 거라니…, 네가 어때서?”
“너 같은 여주는 모르겠지만 엑스트라는 여주와는 달라……. 눈에 안 띄고 이름도 대충 지어서 사람들이 기억도 못 하고… 그냥 그런 존재라고.”
“라라.”
“난 이제 가볼게. 조금 심란해.”
데이트 건도 그렇고, 미하일에게 의도치 않은 커밍아웃을 한 것도 그렇고, 정말 심란했다. 라라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거대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라라는 문밖으로 고꾸라졌다. 보이지 않는 정령왕이 잡아줘서 안전하게 주저앉았지만, 상황 자체가 뜬금없어서 보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둔한 주인을 대신해 허리춤에 걸려있던 마검이 달그락거리며 반응해 왔다.
“마! 뭔 놈의 바람이 이르케 심하노!!”
라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자 엘리나2가 주먹을 꽉 쥐고서 문가에 서있었다. 평소의 발랄한 미소는 어디 가고 비장해 보일 정도로 딱딱한 표정이었다.
곧이어 그녀 곁으로 정령왕이 돌아간 것인지 엘리나2의 은빛 머리칼이 허공에서 사락사락 흔들렸다.
“…엘리나2?”
“갈 거면 나를 쓰러뜨리고 가.”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집 간다는데…….”
라라는 그녀의 젓가락처럼 가는 두 다리를 바라보며 정말 쓰러뜨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엘리나2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너… 이런 애였어?”
“…응?”
“자존감 낮은 그런 애였냐고? 내가 아는 라라는 말이지, 언제나 밝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처음엔 이 무슨 뜬금없는 고찰인가 싶었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수긍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도 수용력이 넓고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수용을 잘하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며 편안함과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는 너는 자기 의견보다는 남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가끔은 참기보다는 자기주장을 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였어. 그런 너는 선하고 조직 간의 조화나 중재를 맡는 역할에 적성이 맞지. 내 말 틀려……? 이제까지 내가 봐온 너는 거짓이었냐고!”
“아니, 너무 잘 맞아서 소름이야……. 혹시 이거 심리 역동 검사(EPDI)니?”
왠지 엘리나2가 말한 내용을 모두 적어서 부모님께 보여드려야 될 것만 같았다. 훗날 진로를 정할 때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숨을 한번 가다듬은 엘리나2가 거세게 머리를 내저으며 외쳤다. 여주의 옳은 말 설교의 시작이었다.
“근데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야! 난 라라 너를 단 한 번도 엑스트라 따위로 생각해 본 적 없어!”
“따위라니…, 지금 네 말이 더 심한 거 알고 있니……?”
“너 자신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면 마음이 좀 편해? 그런 식으로 친구 마음에 상처를 주면 마음이 편하냐고!!”
“아니, 네가 주고 있다고!”
라라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라라,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엘리나2는 반보 물러서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만 본다면 라라가 엘리나2를 배신이라도 한 줄 알 것이다.
그리고 라라를 놓지 못한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떼는 그녀는 마치 한때 정다운 친구였던 배신자를 ‘우린 친구잖아.’라는 말로 돌려놓으려고 애쓰는 여주 같기도 했다.
“너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순 없는 거야? 말해!”
“…아니, 사랑하고 있어. 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 자신을 아끼는 것뿐이지.”
“라라, 나는 말이야. 비록 친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네가 좋았어. 너의 그런 점이 좋았다고!!”
“그런 점이 뭔데…….”
“그런데 너는 아니라고 부정하잖아? 내 말 틀려!”
“끝까지 그런 점이 뭔지 안 알려주네……? 너, 나 칭찬하려다가 실패한 거지? 그런 거지!”
라라와 엘리나2 사이에서 한바탕 말다툼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신이 불쑥 라라의 머릿속에 난입했다.
<네가 아무리 반박해도 여주 미만의 조연들은 말싸움에서 다 지는 게 클리셰이니라. 그러니 이길 생각 하지 말거라. 인생 덜 피곤하게 사는 팁이니라.>
라라는 이것이 운명 앞에 순응하라는 계시처럼 느껴졌다. 처음에 박박 우기던 엑스트라도 결국엔 여주의 몇 마디에 영원불변한 진리를 깨우친 사람처럼 사람이 달라지고 마는 클리셰인 것이다.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을 사랑한단 거야……!”
역시 여주였다. 무슨 한마디를 해도 스님이 쓴 책에서 감명 깊은 대목을 베껴온 것처럼 울림이 있었다.
“…난 말이야, 네가, 네가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어.”
끝내 엘리나2가 입술 끝을 울먹이더니 눈물을 터뜨렸다.
“마! 왜 울고 지랄이노! 사과를 해야지! 넘어진 건 얀데 네가 왜 처울고 지랄이냐고! 마!!”
“좀 조용히 해요.”
제 편을 들어줘서 고맙긴 한데 도움은 안 되는 마검이었다. 다음부터는 떼어놓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라라는 엘리나2의 앞에 다가가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래, 네 말이 백번 천번 맞아…….”
“…라라! 내 진심이 닿은 거구나. 기뻐.”
“그래, 그냥 그렇다고 생각해.”
피곤했다. 라라가 대충 달래주고 가려 할 때 엘리나2가 라라의 소매를 붙잡았다.
“데이트에 갈 거지?”
“왜 말이 그렇게 이어지는 건데……?”
“엑스트라도 남주와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줘. 난 말이야, 네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 출생 신분 따윈 제쳐버려! 넌 할 수 있어! 너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
엘리나2는 친구의 손을 꽉 붙잡고는 애써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하얀 뺨을 가로질렀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눈물이 진주처럼 아름다웠다.
엘리나2는 생각했다. 그저 친구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뭔가 여주의 아름다운 마음과 의리가 돋보이는 명장면을 연출한 것 같지만, 엑스트라 라라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뭐 어쩌라는 거지.
데이트 당일, 라라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다만 직접 데이트 장소에 나가서 거절하느냐, 아니면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서 무시하느냐로 고민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를 만나러 나갔다가 엘리나1이 보기라도 하면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테다. 아니, 이미 오해한 것 같았다. 몇 번을 공작가에 찾아가 엘리나1과 만나려 했지만 만나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자신은 최악의 X년 엑스트라로 기억될지 몰랐다. 남주는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녀도 ‘사실 그의 진심은 줄곧 여주만을 향해있었다.’라는 결론만 내면 뭐든 다 용서되는 분위기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씹기에는 상대가 공작이야.’
그동안 거절하는 내용의 편지를 안 보내본 것은 아니었다. 한 통 보낼 때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스팸 편지가 100통씩 와서 공포 분위기만 조성됐을 뿐이었다.
결국 라라는 가문의 안위를 생각해 약속 장소로 나갔다. 혹시라도 강제로 붙잡을 것을 염려해 마검을 허리춤에 걸고 핸드백 안에는 묵직한 짱돌을 챙겨 넣었다.
그렇게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디체스가 먼저 나와있었는데, 그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선 캡을 쓰고 등산 가방을 짊어지고 있는 엘리나1이었다.
“…엘리나1이 왜…, 그보다 두 사람 옷차림이…….”
“날씨가 좋지 않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데이트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