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중대장은 검을 눕혀 바로 위로 치고 들어왔다. 빠르게 옆으로 피한 와론 부인이 반대쪽 주먹을 내질러 중대장의 복부를 가격했다.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돌연 중대장이 품속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빼 들고 휘둘렀다.
와론 부인은 가볍게 중대장의 손목을 쳐 꺾은 후 단검을 떨어뜨리게 했다.
“기사 되는 자가 하급 용병들이 쓸 법한 수법을 쓰다니…….”
“큭, 네놈!!”
“정정당당히 덤벼라.”
손목을 부여잡은 중대장은 다시 힘겹게 검을 추켜세운 후 그녀에게 힘껏 달려들었다. 주위에서 피를 튀기며 싸우던 기사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결투에 집중할 때였다.
“그만― 멈춰요!”
이슬처럼 투명한 목소리가 연병장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라라는 고개를 돌려 정문을 보았다. 긴 은발을 흩날리며 엘리나1이 가슴 찢어질 듯한 아련한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공은 항상 늦게 등장하는 법이니라. 지각비를 걷으면 기사단에서 단체로 햄버거 사 먹을 돈은 나오겠느니라.>
라라의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그 순간이었다. 엘리나1이 험악하게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중대장과 와론 부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해요! 저 때문에… 서로를 상처 입히는 짓은 그만두세요. 제발…….”
‘아니, 너 때문에 싸우는 거 아니니까! 쪽팔리니까 그만해!’
라라는 경악했다. 얼마나 근자감이 넘치면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일반 엑스트라의 뇌 구조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아련한 외침이 효과가 있었는지, 중대장과 와론 부인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검을 거두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엘리나1은 바닥에 주저앉아 작게 숨을 골랐다.
“아무도 다치지 않아 다행이야…….”
희미한 중얼거림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였다. 멀리서 훤칠한 키의 사내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절박한 표정의 디체스였다.
그는 전장 한가운데서 애인을 만난 것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곧 떨리는 손으로 엘리나1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대가 왜 여기에……. 혼자 이곳에 있는 겁니까?”
“디체스.”
“위험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런 무모한…….”
“저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어요.”
엘리나1이 오른손을 들어 디체스의 0.001% 정도 거칠어지고 야윈 뺨을 쓸어내렸다. 따스한 온기가 그에게 전해졌다.
“그저 당신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어요……. 용서해 줄래요?”
<이것은 위험한 전장에서나 볼 수 있는 클리셰이니. 오직 남주를 만나기 위해 여주가 무모하게 전장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오느니라. 아무리 화살이 빗발쳐도 여주는 빗속을 지나가는 모기처럼 절대 맞지 않느니라.>
라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동안 주위는 시끄러웠는데 그들은 죄다 흥이 깨진 얼굴들이었다.
“해산! 해산들 해라! 무슨 촬영하나 보다.”
“그러게 말이야. 이 한가운데서 찍으면 어떡해. 연병장 쓰지도 못하게…….”
“제길……!! 전투는 이다음으로 미룬다!”
“바라는 바다.”
중대장과 와론 부인은 검을 완전히 거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지나쳐 걸어가려 할 때 중대장이 먼저 씰룩 미소 지었다.
“와론 부인이라 했던가…….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더군.”
“너 또한 투박하지만 날렵한 검 실력이었다. 후훗.”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렇게 전투는 막을 내렸다.
“엘리나2는 왜 오지 않은 거야! 응? 말해 봐봐, 엘리나1!”
라라는 99번째로 도착한 엘리나1을 붙잡고 절박하게 물었다. 엘리나1은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이다가 옷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잔대.”
‘졸려’라고 쓴 쪽지의 글씨는 누가 봐도 졸려서 대충 휘갈겨 쓴 필체였다. 라라는 배신감에 몸을 떨다가 뒤에서 뻗어져 온 커다란 손에 어깨를 붙잡히자 크게 몸을 떨었다.
“엘리나1은 남장을 하지 않았으니 무효 처리를 해야 옳겠으나 일단 남장 기사로서 지원한다는 입단 지원서를 제출했으니 봐드리겠습니다. 총 99명. 아쉽지만 라안 경, 그대는 내 곁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
이 찰거머리 같은 단장의 품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라라는 좌절했다.
까맣게 물들어 가는 라라의 눈빛에 디체스는 흡족하다는 양 입술을 길게 끌어 올렸다. 엘리나1에게 잠시 나가달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인 그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라라를 돌아보며 팔을 뻗었다.
“이번 주 휴일에 시간 있으십니까?”
“네?”
자신을 가둔 팔에 라라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진 그림자가 위협적이었다.
“저기… 왜 제 시간을 물으시는 거죠?”
“만납시다.”
“…네? 왜 저한테요?”
“그거야 라안 경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까.”
“…엘리나1이 문밖에 있잖아요!”
라라는 손을 들어 디체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화끈한 뺨을 부여잡으며 디체스는 충격을 받은 눈으로 라라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때린 자는 그대가 412명째입니다.”
“어쩌라고요!”
“412번째로 특별하단 말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벗어나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는 라라의 손목을 붙잡은 디체스가 열렬한 눈길로 그녀의 눈, 코, 입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사내 같았다.
“이번 주 휴일, 나의 저택으로 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쪽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모든 인류를 평등하게 사랑합니다.”
“꺼져요! 이 평화의 상징 비둘기 같은!”
“데이트합시다.”
라라는 오른손을 들어 디체스의 뺨을 후려쳤다.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디체스의 모습이 마치 홍조가 떠오른 사내처럼 보였다.
“나를 연속으로 때린 자는 그대가 처음입니다.”
<오우, 처음이래지 않느냐? 레어템이니 소중히 여기도록.>
“그날 꼭 나와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으아아아아아!’
* * *
최근 들어 황실근위대에선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폐하께서 매일 침소에 들기 전 젊은 기사들 중 한 명을 은밀히 방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중년 기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방에 불려갔던 젊은 기사들 중 하나를 붙잡고 캐물었으나 젊은 기사는 말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수상쩍단 말이지…….”
“…그러게요.”
중년 기사의 말에 젊은 기사 티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불안할 수밖에. 오늘 밤 자신이 지목돼 불려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건장한 성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후계는커녕 곁에 여인조차 두지 않고 있는 황제께서 혹시 남색에 취미가 있으신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은 이미 근위대 안에서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지엄하신 옥체를 받아들이는 일은 가문 대대로 영광이겠지만 티온은 아무래도 사양하고 싶었다. 설령 폐하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한 법이었다.
“티온 경,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황제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티온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끝내 도달한 방문 앞에서 그는 자신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방 안에는 편한 차림을 하고 있는 검자줏빛 머리의 사내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티온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 예를 차렸다.
“제국의 태양이신 존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티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멀리서 봐도 빛이 나던 용안을 가까이에서 뵈니 눈이 화려함을 이기지 못하고 뱅뱅 도는 기분이었다.
“내 물음에 사실대로 답해야 할 것이다. 평소 여자관계가 어떻지?”
“…아직 동정입니다.”
“그렇군. 주변에 여자가 없다 이 말인가?”
“네.”
긴장감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순진한 청년이 취향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티온이 마른 입술만 축일 때였다. 머리 위에서 관심을 잃은 듯 심드렁한 저음이 내려왔다.
“너는 아닌가 보군.”
“…네?”
“나가봐도 좋다.”
축객령이 떨어지자 티온은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동정인 점이 마음에 안 드신 걸까. 티온은 자신이 동정이라 다행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한편 방 안에 홀로 남게 된 카를라히는 미리 조사해 두었던 근위대에 소속된 청년 기사 이름 목록을 훑어 내렸다. 티온의 이름 옆에 가위표를 치고서 서류철은 적당히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대체 누구지.’
앞으로 11명, 분명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여러 여자를 건드리고 다니는 여자관계 문란한 젊은 호위 기사가. 친한 지인을 울린 놈이 말이다.
근위대 소속 기사 전원을 상대로 한 번에 심문을 벌이고 싶어도 시간이 밤밖에 되지 않아 한 명씩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었다.
반드시 그 낯짝을 보고 말리라 카를라히는 다짐했다.
* * *
“…너 여깄었어?”
라라는 심통하게 엘리나2를 내려다보았다. 친화력 대장답게 미하일과도 그새 친해진 것인지 혼자서 놀러 온 모양이었다.
명랑한 타입의 여주가 고독하게 칩거 생활을 하는 남주를 찾아가 로맨스를 쌓는 건 클리셰이기도 하고 라라로서도 대환영이지만, 어제 자신을 바람맞혔던 터라 그 얼굴이 약간 얄미워 보였다.
“하하, 라안 경 왔어……? 어젠 미안. 너무 졸려서 도저히 못 일어나겠더라.”
“됐어. 이미 너 때문에 망했어, 엘리나2.”
미하일만 없다면 라라는 여기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힘든 훈련도 받지 않고 영업 핑계로 마음대로 바깥에서 농땡이를 부릴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였다. 그놈의 집착 소유욕 남주로부터 제발 좀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미안해, 라안.”
그래도 나름 반성을 하는지 엘리나2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차, 그보다 소식 들었어.”
개뿔, 3초 만에 반짝 고개를 든 엘리나2가 손뼉을 치며 얘기했다. 쾌활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