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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38)화 (38/115)

38화

중대장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머, 어쩜! 근육이 살아있는 것 같을까!”

“비결이 뭐예요. 어머나, 귀여워라.”

“꿈틀거리는 것 좀 봐요. 이건 남겨놔야 해.”

근육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거나 쓰다듬는 행위에 중대장은 살면서 처음으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 미친놈들은 대체 뭐지. 셀카봉만 있다면 근육과 셀카라도 찍을 기세였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다들 엎드려 뻗쳐워어엇―!!”

“어마나, 얘! 이것 좀 봐봐.”

“어머, 이게 뭐예요. 세상에.”

“이게 다 근육으로 이뤄졌다지 뭐니.”

“어머, 저도 가지고 싶어요.”

“한번 만져 봐봐. 아주 괜찮아.”

37명의 남장 기사들이 서로 중대장의 팔뚝을 만지기 위해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한 폭의 지옥도가 따로 없었는데, 중대장은 살기 위해 남장 기사들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헉헉, 하고 구석에 붙어 숨을 몰아쉬는 동안에도 소름은 가시지 않았다.

그 우람한 덩치답지 않게 안색이 퍼렇게 질려있던 그때였다. 중대장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오호호, 천만에요.”

“아녜요.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고마운걸요. 저는 비록 영업부원이라 같이 훈련은 받지 않겠지만 힘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찾아와주세요, 호호.”

라라가 96번째 영애와 다정하게 인사말을 나눈 후 97번째 영애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뒤에서부터 섬뜩한 살기가 라라를 덮쳐왔다.

“라안……. 혹시 너냐, 이 신입 놈들을 데려온 게!!”

“히익…….”

라라는 정면으로 날아온 거대한 주먹에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다행히 코에 닿기 직전 주먹이 멈췄으나 훅 끼쳐온 바람에 정신이 아찔하기만 했다.

실신하기 일보 직전의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있는 라라의 얼굴에도 아랑곳 않고 중대장은 뿌드득 이를 갈며 험악한 얼굴을 들이댔다.

“감히… 신성한 연병장을 기생오라비들이 웃고 떠드는 사교장으로 만들어?!”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쩌렁쩌렁한 외침에 라라는 귀가 다 얼얼했다. 귀청과 함께 혼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자식아!! 너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들을!! 어!! 신입 기사로 데려오고 난리냐!!”

“…저, 저분들이 왜요……?”

“네놈 눈엔 저 팔뚝들이 안 보이냐!! 저게 어딜 봐서 검을 잡아본 팔들이야?!! 하나같이 비실비실해 보여서는… X발, 어이가 없어서! 참나!!”

적나라한 욕설에 라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좀 진정하시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라라의 왼뺨에 걸쭉한 침이 튀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이 라라를 스쳐 지나간 순간 싸늘한 기운이 대지에 퍼져나갔다.

“……?!!”

온몸을 속박하는 살기에 중대장이 흠칫하고 턱을 떨었다. 설마 자신이 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쪼렙의 몸속에 숨겨진 무언가 엄청나고 대단한 힘을 깨운 게 아닐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연병장을 감돌고, 라라의 몸에서 한층 더 짙게 살기가 퍼져 나오려던 그때였다.

“거기까지 하시죠.”

중대장의 굵다란 팔뚝을 붙잡은 손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레이스 장갑을 낀 와론 부인의 손이었다.

“와론 부인?”

율비타 영애가 놀라 그녀를 부르자 와론 부인은 상냥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중대장은 갑작스럽게 제 왼팔을 꺾으려 드는 손을 저지하려 했으나 어떻게 된 건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떨쳐내려 해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 아야야.”

엄살처럼 작은 신음 소리가 중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순간 연병장 안이 고요해졌다.

중대장은 뒤늦게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곧바로 다른 손을 들어 그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뻗어져 와 그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이게 지금…, 날 막아?”

“오호호, 한 남자의 아내로서 조용히 살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요.”

섬뜩한 힘이 느껴졌다. 중대장이 잡힌 손을 빼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몸이 하늘을 향해 붕 떠올랐다. 등과 뒷머리가 땅바닥을 강타하자 그 충격에 중대장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커헉!”

저만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보고도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중대장이 신입 기사에게 나가떨어지다니, 쉽사리 믿어질 리 없었다.

“저도 실력이 많이 녹슬었네요, 호호호.”

와론 부인은 한 손을 우아하게 쳐들고 웃었다. 이에 몇몇 기사들이 움찔하다가 곧 반발심에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건방지다! 감히 신입 주제에 중대장님을 건드리다니!!”

“옳소……! 선배로서 네놈을 혼쭐내 주마!”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하는 바다!”

여덟 명의 기사들이 금방이라도 덤벼들듯이 흉흉한 눈빛을 했으나 와론 부인은 여유로웠다. 끼고 있던 레이스 장갑을 벗은 그녀가 허리춤에 장식용처럼 걸고 있던 검을 쓰다듬듯이 만졌다.

“철없던 열일곱 살 때 사교계에 지루함을 느끼던 저는 가출을 감행했었죠. 귀족 영애로서 사는 것이 너무나도 갑갑했기 때문이랍니다. 자유롭고 강해지고 싶었죠. 모험을 원했던 저는 용병단에 들어갔었고, 그곳에서 5년간 훈련을 받았답니다.”

“……?!”

“비록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많이 녹슬었을 테지만, 이 몸은 기억한답니다.”

불끈 하고 왼손 약지에 껴있던 반지가 살에 파묻혀졌다. 그것은 살이 아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힘줄이 불거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덤벼보시죠.”

늠름하게 검을 빼든 그 모습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놀란 듯 눈을 키우고 있던 율비타 영애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용병들의 전설로 불리시던 대장님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율비타 영애?”

“사실 저도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억지로 정략혼을 맺으려 하자 가출을 감행했었답니다. 그리고 용병단에 몸을 담가 강해지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지요. 정말이지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설마.”

“그리고 저희들에게 그 길을 열어주신 게 초대 여대장인 당신이었죠.”

씨익 하고 웃으며 율비타 영애가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왼쪽 어깨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도끼 문양에 와론 부인은 크게 눈을 떴다.

“저것들이 뭐 하는 거야!! 당장 때려눕혀!!”

중대장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철컥, 하고 기사들이 검을 세우고 율비타 영애와 와론 부인에게 달려든 순간이었다.

챙! 챙! 하고 쇳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 근처에 있던 15명의 영애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기사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들은 율비타 영애가 했던 것처럼 왼쪽 팔소매를 걷어 보였다. 선명한 도끼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남장 기사 15명의 공격에 기사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나머지 20명의 실력 있는 기사들이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은색의 무언가가 날아 들어왔다.

그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차를 저을 때 쓰는 작은 티스푼이었다.

“저희들은 비록 도끼파는 아니었지만 한때 여도적으로 활동했었습니다.”

“슈린 영애는 귀여워 보여도 사실 여도적의 두목이셨죠.”

하늘하늘하고 아담한 체구의 영애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다섯 손가락 사이에 티스푼을 끼고 있었다. 무슨 어쌔신들이 사용하는 수리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이것들이……! 뭣들 해!! 공격하지 않…….”

“입만 살아서는.”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던 중대장은 갑자기 목에 닿는 차가운 쇠 감촉에 입을 닫았다.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온 것인지 한 영애가 잼을 발라 먹는 나이프를 그의 목에 들이밀었다.

“…저는 암살 길드에서 암살 기술을 배웠었어요. 물론 제거 대상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만나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답니다.”

“…네, 네놈들, 하나같이 남장을 한 여자였냐!!”

“단순한 남장 여자가 아니다. 우리들은…….”

영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오오오오, 하고 기사단의 연병장을 장악할 만큼 거대한 살기가 퍼져 올랐다. 돗자리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던 남장 여자들은 어느새 어둡게 표정을 바꾼 채 각자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엄청난 실력자들이었다.

<뭔 놈의 숨겨진 실력자들이 98명이나 되느냐!! 클리셰 비상사태니라. 선택받은 자여! 어떻게든 해보거라!>

‘…아.’

그러나 가장 쇼크받은 것은 라라였다. 이 상황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같은 엑스트라라고 여겼던 영애들은 다 하나같이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 같았다. 그녀들의 자서전으로 98개의 로판을 찍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 아아…….”

라라는 주저앉아 흙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혹시 자신에게도 무언가 숨겨져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 자신에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라라의 주위에선 스케일 큰 난장판이 벌어졌는데, 100명의 현직 기사와 98명의 신입 남장 기사들의 대전투였다.

“크흑!”

“으아아악!”

챙, 채앵. 요란한 쇳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부상자들이 하나둘 생겨났으나 살기를 떠올린 실력자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무기가 오가는 그 사이에 쭈그려 앉아 라라는 손가락만 쪽쪽 빨았다. 다행히 아무도 라라는 건드리지 않았다.

“틈을 주지 말고 몰아붙여라!! 상대는 그래 봤자 여자다!!”

“우리들의 두목을 엄호하라! 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자!”

“네!! 이야아아앗!”

“우아아아악!”

선두에 서서 달리던 와론 부인이 세 명의 기사들을 간단하게 제압할 때 반대편에선 남장 기사 다섯 명이 기사들의 검에 부상을 입었다. 검 끝은 점차 피로 물들어 갔다.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와론 부인의 앞에 중대장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콰앙, 거칠게 맞대어진 두 사람의 검에서 불똥이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네놈 제법이잖아.”

“너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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