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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37)화 (37/115)

37화

“미안하다능. 내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 건데.”

“…라히가 제게 뭘… 잘못했어요. 다 제가 바보 같은…….”

“아니라능. 널 찬 그 자식 잘못이지 넌 아무 잘못 없다능.”

“…흡, 아니에요. 그분은 아무 잘못 없어요. 따지고 보면 저 혼자 쌩쇼하는 거고 그분은 제가 좋아하는지도 모르는걸요…….”

“답답하긴, 이렇게 울어놓고도 그 자식 편들고 싶냐능?”

조금 화난 듯한 어조에 라라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에 라히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반반한 얼굴만 믿고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는 새끼만큼 형편없는 새끼도 없다능. 네 잘못 없다능…….”

“흐으읍…….”

진심을 담은 위로였으나 그녀의 울음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라라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려 하자 라히는 당혹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라라의 두 손이 뻗어져 왔다. 그의 가슴팍을 밀어낼 듯이 힘껏 닿은 손이 그대로 세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라라는 그대로 단단한 품에 얼굴을 묻고 끅끅 울어대었다. 늘 오빠에게 안겨 울었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 것이었다.

한편 라히는 뒤로 밀려나면서 아예 주저앉아 버렸는데, 누가 봐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긴 다리 사이에 앉은 라라를 품에 끌어안은 듯한 자세가 되어버리자 뭘 어떻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정지한 상태로 몇 분이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방 안을 지배하고 있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라히는 딱딱하게 고개를 내려 제 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체크무늬 셔츠 중앙을 축축하게 적신 채 잘도 색색거리며 잠든 라라가 보였다.

“…하아.”

라히는 한숨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잠시 거추장스러운 동글뱅이 안경을 벗고 카를라히로 돌아온 그는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동그란 정수리에 얹었다. 불편한 자세로 버티고 있던 탓에 손이 조금 저렸으나 개의치 않고 뒷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이러니 가고 싶어도 못 가겠군그래.’

코랄색 머리칼은 엉킴 없이 부드럽게 그의 손끝에서 흘러내렸다. 카를라히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라라는 부드러운 베개에 뺨을 비볐다. 오늘따라 감촉과 냄새가 평소보다 좋았다. 시녀들이 신경 쓴 모양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길지?’

베개가 발을 걸칠 정도로 이렇게 길었던가. 이상함을 깨닫고 눈을 뜬 순간, 라라는 숨을 내쉬려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매끄러워 보일 정도로 새하얀 베개보, 평면적이긴 하나 이목구비가 짙은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로브신사가 프린트된 다키마쿠라였다.

왜 다키마쿠라가 자신의 침대에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자신의 침대가 맞긴 한 걸까. 라라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로브신사 벽지와 로브신사 피규어가 진열된 서랍, 온통 로브신사로 도배된 방 풍경이 보였다. 아침 햇살에 새하얗게 물든 방을 둘러보며 라라가 멍하니 입을 벌릴 때였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많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도.

“일어났냐능?”

“…라히?”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선 체크무늬 셔츠의 남자를 바라보며 라라는 느릿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 숙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단 생각에 황급히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어,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긴 소매의 성녀복은 노출은커녕 단정함 그 자체였지만 라히는 그녀가 부끄러워하자 괜히 따라 머쓱해져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방 한편에 걸린 로브신사 포스터를 응시하며 그는 대답했다.

“어젯밤 기억 안 나냐능?”

“어젯밤이라면……. 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면 미안하다능. 그런데 원래 그렇게 아무 데서나 잘 잠드는 성격이냐능?”

“아녜요!”

자신을 뭐로 보냐며 라라가 이불자락을 꾹 말아 쥐며 외쳤다. 물론 자신이 소리칠 만큼 당당한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아는지라 목소리는 금방 기어들어 갔다.

“어제는 그… 품이 뭔가 아늑해서……. 어릴 적에 곧잘 오빠 품에서 잠들곤 했거든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뺨을 조용히 긁적이다가 라라는 그를 힐끔 훔쳐봤다. 그의 입술은 긴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나와서 아침 식사 하라능.”

“어? 또 직접 준비하신 거예요?”

먼저 방문을 나선 그를 따라잡으며 라라가 물었다. 라히는 대답 대신에 조용히 웃기만 했다.

도착한 식탁 앞에 앉으며 라라는 작게 감탄했다. 간단한 야채 샐러드와 샌드위치, 구운 소시지와 과일 몇 종류가 놓인 식탁 위 구성이 제법 풍성해 보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하시네요. 전 아침잠이 많아서……. 본받아야겠어요.”

“본받을 것까지야. 그냥 먼저 일어난 사람이 하는 거지 뭐 있겠냐능.”

“저번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라히에겐 늘 식사 대접을 받는 것 같아요. 나중에 한번 밥 사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어젯밤엔 왜 황성에 계셨어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라히는 포크와 나이프를 쥐다 말고 뜨끔해 검지 끝을 떨었다.

“말 안 했던가……? 황성에서 일한다능.”

“무슨 일이요?”

“그 서기관이라능.”

“서기관이면 황제 폐하와 자주 뵙기도 하나요?”

“뭐… 가끔씩 뵙는다능.”

한 손을 들어 안경테만 만지작거리던 라히가 틈을 타 빠르게 화두를 돌렸다.

“그보다 라라 너는 어제 왜 거기에 있었냐능? 그 옷은 어디서 구했고?”

“아……. 이거요? 성녀님 옷이에요. 사실 어제 성녀님 대신해서 온 거였어요. 분명 제가 와서 실망하신 거겠죠, 페아…….”

“아니라능! 전혀 아니라능. 폐하가 널 보고 실망했을 리 없지 않냐능. 아마 당황했던 게 아닐까 싶다능.”

뒤늦게 아차 싶은 라히가 급히 라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호호, 역시 전 라히밖에 없어요. 고마워요. 그렇게 얘기해 주시니까 기운이 나요. 그보다 페아를 알고 계시네요? 하긴 같은 황성에서 일하시니까…….”

흐음 하고 혼자 생각에 잠긴 라라의 모습에 라히는 턱을 괴고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능?”

“네? 뭔데요?”

“…아직도 좋아하고 있냐능? 그 사람?”

라라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이 아프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아직까지는.

“미련하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아직까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물론 슬슬 접어야겠죠, 이 마음도…….”

“혹시 괜찮다면, 내게만 누군지 말해줄 수 있냐능?”

그 진지한 물음에 라라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내의 이름이 페아라는 것을 밝힐까 했으나, 라히도 페아를 알고 있다고 하니 그냥 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예 안 말해주면 선 긋는다고 서운해할지도 몰랐다. 라라는 이름 대신 모호하게 힌트를 주기로 했다.

“아마… 황실근위대 소속 기사님이실 거예요, 그분.”

황제 남주가 가는 곳마다 있으며, 황성 출입도 자유롭고, 성녀에게도 하대할 정도면 제법 높은 신분인 것 같았다. 황실근위대의 단장쯤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었으나 라라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라히도 침묵을 지켰다. 황실근위대 소속, 그 정보를 그는 머릿속에 조용히 새겨 넣었다.

* * *

“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이리 소란을 떠는 겁니까. 자, 이 내게만 털어놔 보십시오, 그대의 그 작은 입술로.”

디체스는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기사의 턱을 붙잡고 속삭였다. 야릇한 숨결이 귀에 닿자 기사는 몸을 흠칫 떨며 디체스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헛, 지금 연병장으로 나가보십시오. 신입 기사들의 상태가 하나같이…….”

“드디어 오늘이군요, 이 나의 품으로 작은 아기 새 100마리가 날아 들어오는 날이.”

“……?”

기사는 이상한 눈으로 디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체스는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섰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연병장에 눈길을 준 그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나의 새장에. 더 이상 날지 못하게 그 날개를 부러뜨려…….”

‘또 시작인가.’

해괴한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기사는 조용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기사는 기사단 건물에서 나와 연병장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부터 황실기사단의 연병장은 시끌벅적했다. 갈색 고수머리 가발을 눌러쓰고 나타난 98명의 남장 여인들로 인해서 말이다.

“혹시 와론 부인 아니세요? 반가워요.”

“어머, 율비타 영애도 초대받았나 보죠?”

“다른 영애분들도 많네요. 황실기사단에 온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는 거 있죠?”

“그러게요. 전 화장기 없는 얼굴로 이 자리에 서있단 게 너무나도 신기해요.”

“호호호, 가발이 약간 삐뚤어졌어요. 이렇게 하면 좀 더 자연스러운 헤어를 연출할 수 있을 거예요.”

“어머나 감사해요, 셀레나 영애.”

수도 사교장 안에서 이미 형성된 인맥이다 보니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 찬 연병장의 모습에 기사들은 ‘이게 뭔 일이래?’ 하는 괴상한 눈빛을 한 채 가장자리로 물러나 있었다.

남장 기사인 98명의 여인은 자신들이 남장을 했다는 자각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들떠서 수다를 떨기 바빴다. 몇몇 귀족 영애들과 부인들은 연병장 한가운데에 돗자리를 깔고 우아한 다과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보다 못한 군기반장 중대장이 묵직한 목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전원 차렷―!! 열중쉬엇―!! 신성한 연병장에서 꺄르륵꺄르륵 아주 신이 났구만!! 이 신입 놈들이 죄다 군기가 빠져서는!!”

“어머나~ 이 근육 좀 봐.”

한 부인이 중대장의 튼실한 팔뚝에 손을 얹으며 감탄했다. 돗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던 영애들이 따라 일어나 중대장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남장 여자들에게 포위된 그는 코끝으로 밀려오는 옅은 향수 내에 코를 벌름거렸다.

‘어째 사내놈들치곤 좋은 향이 나는……. 헛. 내가 무슨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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