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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36)화 (36/115)

36화

성녀인 척하고 대신 황성으로 가라니, 확실히 여주가 아니고서야 이런 스케일 큰 작전을 세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좌불안석이 따로 없는 라라와는 달리 엘리나5는 평범한 신관 차림을 하고 고요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까는 평민 기사로서 만난 거니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거예요. 슈모르드 영애로서 간다면 아무리 폐하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예요.”

“그, 그래도요…….”

“영애는 그저 제 억지에 가담한 것뿐이지 않나요?”

부드럽지만 은근한 강요가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성녀인 저의 사소한 복수라는 걸 그분도 알아차리시겠죠. 성녀인 제 작전에 말려든 힘없는 영애에게 잘못을 탓하진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뭣하면 성하께서 도와주실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미하일에게 제 얘길 들으셨나요?”

“정확히는 슈모르드 영애가 아닌 라안 경에 대해 들은 것이지만요.”

“저 혹시… 제가 여자인 걸 말하시진 않으셨죠?”

조심스레 묻는 말에 엘리나5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비밀 얘기를 해주려는 듯 목소리를 조금 작게 낮추었다.

“교황 성하께서 라안 경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몰라도 라안 경을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하신답니다.”

“네……? 성녀님은 거짓말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하시네요…….”

라라는 실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허무하게 웃어 보였다. 이에 엘리나5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제가 말한 건 비밀이에요. 분명 부끄러워하실 테니까요.”

역시 거짓말이다. 자신의 앞에서 얼마나 지랄맞게 구는데 미하일이 자신을 소중? 소중이라는 단어 뜻이 변질된 게 틀림없었다.

의심만 짙어진 채 꽁하니 앉아있는 라라에게 뒤늦게 성기사가 다가와 황실에서 사람이 왔음을 전했다. 비밀 임무 수행을 위해 특별히 보내진 근위대 기사들이었다.

“그럼 다녀와요. 그대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엘리나5는 자신으로 변장한 라라의 귓속에 작게 속삭여 주었다. 그렇게 라라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황성행 마차에 올랐다.

경운기를 탄 것도 아닌데도 라라의 몸은 달달달 떨렸다. 기사들은 성녀의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일제히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었다.

그 집요한 눈길들에 라라는 더욱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혹여 가는 도중에 들킬까 봐 심장이 쫄려 미칠 것 같았다. 여주만큼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니니 말이다.

이윽고 황성 앞에 도착한 것인지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어졌다. 라라는 흰 면사포가 바람에 날릴까 봐 면사포 끝을 쥐고 사뿐히 걸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안내된 방에 들어서서야 홀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아…,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긴장해서인지 배가 꾸르륵거렸다. 화려한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엉덩이를 뗐다가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화장실을 가야 될 정도는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화장실 위치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라라는 몸을 일으켜 안쪽에 위치한 문을 열었다. 어두운 와인색 휘장이 늘어진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바로 침실과 이어져 있단 사실에 라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저벅저벅 나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떡해!’

라라는 우왕좌왕하다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맞춰 방 중앙에 굳은 채 섰다. 문이 열리자 긴 그림자가 대리석 위로 졌다.

달빛을 맞으며 장신의 사내가 방 안에 들어섰다. 페아였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조화를 이루는 조각 같은 얼굴이 마침내 라라가 있는 방향에서 멈췄다.

“기다리게 했군.”

황홀할 정도로 낮은 저음에 라라는 치맛자락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 그런 일을 당해놓고도 그의 얼굴에 가슴이 설레고 마는 자신이었다. 라라는 그가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자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나 알고 좋아하는 걸까.

자상한 표정을 알고 있는데도 차가운 얼굴을 봤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차마 그때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 멍하니 그를 보며 서있을 때였다. 뒤늦게 라라는 그가 제 앞에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확 몰아친 긴장감에 심장이 콱콱 조여왔다. 분명 여주가 아니라서 실망할 것이다. 라라는 작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긴 다리에 의해 금세 따라잡혔다.

뻗어진 그의 손이 마침내 면사포의 끝을 쥐었다. 그가 어떤 눈으로 저를 바라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면사포가 턱을 지나 뺨을 스치고 올라가자 라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드러나고 그가 지척에 다가왔다는 게 느껴졌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라라는 슬그머니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간 크게 떠진 벽안이 겨울 바다처럼 시린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어버린 것 같았다.

잠시 그가 주춤하나 싶더니 양미간을 찌푸린 채 쥐고 있던 면사포를 허공에 놓아버렸다.

사락, 흘러내린 흰 자락의 너머로 그가 등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대로 나가버리는 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라라는 입술을 떼기도 전에 닫혀버린 방문에 눈만 느리게 깜빡거렸다.

갑자기 눈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다가 손등에 묻어난 눈물방울을 알아차리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차갑게 뒤돌아서 나갈 정도로 자신이 있어서 실망했던 것일까. 그도 저를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론 기대했던 건지도 몰랐다. 반가워해 주진 않아도 그래도 왜 여기 있냐고 물어봐 줄 줄 알았다. 자상하게 말을 걸어줄 줄 알았다.

‘오지 말걸…….’

라라는 왠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기어이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자 더는 막을 수 없었다.

“흐어어엉……. 허어어어엉.”

마치 넘어져서 서럽게 우는 아이 같은 울음소리는 방을 나온 그에게까지 들려왔다.

‘…왜 라라가…….’

한편, 카를라히는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당혹스러웠다. 방을 나와서도 여전히 그의 심장은 터질 만큼 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들려온 울음소리에 그는 심장이 뚝 멎는 기분을 느꼈다.

카를라히는 무작정 뒤를 돌아 나온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문밖에 선 채로 다시 들어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할지 말지 갈등해야만 했다. 그 충동이 얼마나 강한지 참아내기 위해 절로 주먹을 세게 말아 쥘 정도였다.

마침내 그는 결심한 듯 스르륵 주먹을 폈다. 카를라히의 두 발은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왜, 왜 그러느냐?! 뭔 일 있었느냐!>

자다가 깜짝 놀라 깬 것 같은 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라라는 급히 울음을 멈춰보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콧물이 흘러내리려 하자 면사포를 휴지 대신 코에 대고 팽 풀었다.

‘…이건 빨아서 돌려줘야겠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저 때문에 깨셨다면 죄송해요……. 아무 일도 아니니까 다시 주무세요. 그냥 예전에 슬펐던 기억이 나서 운 거예요.’

<하아……. 난 또, 서럽게 울길래 남자한테 차이기라도 한 줄 알았느니라.>

“…흐읍, 흐어엉어어엉!”

<왜 또 우느냐?!>

신은 다시 달래보려 애썼으나 라라의 눈물샘의 둑은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다. 라라가 펑펑 눈물을 쏟아내자 신은 실연당한 친구를 위로하듯 옆에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그 나쁜 쓰레기 녀석, 언젠가 내 눈에 띄면 벼락 맞게 해줄 테니 울지 말거라, 뚝.>

“끄허어어엉.”

<남자가 어디 세상에 하나뿐이냐? 더 좋은 엑스트라 짝을 내려줄 테니 그만 뚝 하느니라. 에구구… 이러다 밤새겠네.>

그때였다. 라라의 귓가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그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라라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주저앉아 엉엉 운 이런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일 수가 없었다.

화끈거리는 낯을 푹 숙인 채 라라가 울음을 참기 위해 끅끅거렸다. 얕은 흐느낌에 맞춰 떨리는 그녀의 어깨 위로 크고 따뜻한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왜 그렇게 슬피 우냐능.”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체크 셔츠에 익숙한 동글뱅이 안경을 쓴 라히가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는 긴 입술을 달싹거리며 당황한 티를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리기에 들어와 봤는데… 라라 너였냐능? 왜, 왜 또 우냐능?”

“흐어어엉!”

너였냐. 라라는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자 더욱 서럽게 울어 젖혔다.

라히는 울음소리가 더 커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어깨를 덮은 채 안절부절못하던 손이 기어이 올라가 부드러운 뺨에 닿았다. 긴 손가락들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기에 급급했다.

“누가 뭐 잘못했냐능? 아까 들어왔다 나갔던 그 사람 때문이냐능……?”

“…끄흐흑. 흐어엉.”

“이제 그만 울라능? 응?”

라히는 상체를 숙여 그녀를 안아주려다가 문득 든 생각에 뻗었던 팔을 거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실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탓이다.

생애 처음으로 사귄 지인인 만큼 라히는 이 관계를 소중히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앞에 몸 낮추고 앉아서는 그녀가 눈물을 그치길 기다렸다.

‘차이기라도 한 건가.’

단시간만에 눈이 부을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고 있으니 아무래도 실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안쓰러워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서인지 그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속이 타들어 갔다.

라히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라라가 마지막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서 기어들어 갈 듯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그분은… 저 같은 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데… 바보 같아요……. 흐으윽.”

정말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자 라히는 어떻게 위로의 말을 꺼내야 될지 몰랐다. 새삼스럽게도 충격을 받았다는 게 옳았다.

충격이 점차 가시자 라히는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황제로서 방에 들어오기 전 그녀는 이미 실연을 당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자신은 눈치도 없이 그 사실을 알아차려 주지 못하고 벗어나는 데 급급해 버렸었으니 말이다. 실연당한 지인을 혼자 내버려 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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