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성기사들이 지키고 서있는 신전 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북적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보다도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이게 다 성녀를 한번 만나기 위해서라니……. 역시 여자 주인공은 다르구나.’
감탄하며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라라는 다시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고선 움직였다. 사탕이 붙은 입단 신청서를 한 장 꺼내 들고서 근처에 앉아있는 소년에게 접근했다.
“얘야.”
“……?”
“혹시 누나나 형 있니?”
“아니요?”
“아, 그렇구나. 이 사탕은 너 먹고 이 종이는 꼭 어머니 갖다드리렴? 알겠지?”
소년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순순히 입단 신청서를 받았다. 판매자 확보에 성공한 피라미드 직원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은 라라는 곧바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입단하시지 않겠어요?”
“…아, 괜찮아요.”
“안녕하세요? 입단하시지 않겠어요?”
“…아, 저희 집이 불교라서요.”
“안녕하세요? 입단하시지 않겠어요? 지금 입단하신 분께는 특별히 기사 제복과 훈련용 검을 사은품으로 드리고 있어요.”
“아뇨, 이미 집에 제복이랑 검이 있어서…….”
“안녕하세요? 이번 기회에 입단하시는 건 어떠세요? 입단하신 분들이 하나같이 그러더라고요, 정말 잘했다고.”
“아니요, 관심 없어요.”
생각보다 냉랭한 반응이었다. 몇 명은 손을 내밀어 받아주었으나 진짜로 입단하려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라라는 잠시 입단 신청서를 나눠주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에 사탕만 떼어낸 입단 신청서가 바닥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었다.
‘…아.’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밟히기 직전의 입단 신청서들을 재빠르게 주워갔다. 몸을 숙인 채 입단 신청서들을 하나둘 주워나갔을까, 굽혔던 몸을 들자 사람들이 없는 으슥한 복도가 보였다.
라라는 다시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돌아가려다가 맞은편 복도에서 홀로 걷고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홀린 듯이 라라는 남자를 따라잡기 위해 뛰었다.
“안녕하세요! 거기 지나가시는 분? 전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황실기사단에서 나왔는데요.”
황실기사단이라는 말에 조금 신뢰가 생긴 것인지 멀리 있던 사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라라는 그에게로 다급히 뛰어가 입단 신청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입단하시지 않겠…….”
남자가 자신에게로 반쯤 고개를 돌린 순간 라라는 숨 쉬는 법조차 까먹었다.
이분이 왜 여기에……. 검자줏빛 머리 뒤로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며 새벽이슬이라도 맞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라라는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 때문에 입단 신청서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곧 사내, 카를라히가 몸을 숙여 주웠다.
“입단 신청서인가? 신입 기사로 보이는데 열심이군.”
“아… 감사합니다.”
‘아… 이 모습으로는 처음이겠구나.’
부끄러워 옆머리만 배배 꼬던 라라는 뒤늦게 자신의 꼴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는 영락없이 갈색 고수머리를 한 남장 기사일 텐데 괜히 이상하게 비치진 않았을까 가슴이 술렁였다.
라라가 제자리에서 떠나질 않고 그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자 카를라히가 한쪽 눈썹을 아래로 일그러뜨렸다.
“왜 그러지?”
“…아, 아니요. 그게…….”
“그러고 보니 누굴 닮았군.”
“……?!!”
두근두근두근. 라라의 심장은 미칠 듯이 뛰었다. 이렇게 그에게 정체를 들키고 남장 여자의 로맨스가 성립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은근히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때였다.
“저와는 친분이 있는 기사랍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아름다운 목소리에 라라는 순간 공포 영화 속에 들어온 사람처럼 승모근을 바짝 세웠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다.
성스러운 은빛 머리칼을 출렁이며 성녀 엘리나5가 제게로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는 걸 붙잡고 뒤로 몸을 숨겼다. 뒤늦게 자신이 붙잡은 것이 단단한 페아의 팔뚝이며, 자신이 몸을 숨긴 곳이 페아의 거대한 등 뒤라는 걸 알아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때 스르릉 하고 검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그가 몸을 돌렸다. 목 옆에 닿은 차가운 쇠의 감촉에 라라는 딱딱하게 고개만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움직임에 피부가 베인 것인지 목에서 얕은 쓰라림이 일었다.
“페아……?”
“…건방지군. 감히 내가 누군지 알면서 이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그는 라라가 알고 있는 그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의 입단 신청서를 단박에 거절하던 사람들만큼이나 차가운 얼굴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엘리나5가 라라의 앞을 막아서듯 나섰다.
“부탁드립니다. 아직 예법에 미숙한 평민 기사입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경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지요, 폐하.”
“공녀, 그대의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을 리 없지 않나?”
카를라히는 다시 시원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깊어진 푸른 눈동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사의 갈색 머리통에서 성녀의 얼굴로 옮겨갔다.
“단, 오늘 밤 황궁으로 와주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말이지.”
“…폐하, 그 명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은밀히 입궁할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을 붙여주겠다. 이 정도 배려로는 부족한가?”
얼핏 여인을 배려하는 자상한 음성이었지만 그 속엔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짙은 중압감이 숨겨져 있었다.
“…아닙니다. 명에 따르지요.”
엘리나5는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춰 보였다. 폭군 황제와 성녀의 클리셰였다.
그가 가고 라라는 한동안 그 자리에 발이 붙은 것처럼 서있다가 얼마 못 가 허물어졌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혼란스러워서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따스한 손가락이 목 옆에 와 닿았다.
“괜찮은가요?”
“…아.”
아픔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문 것처럼 따끔거림이 사라졌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자 라라는 손을 들어 목을 만져보았다. 얕게 베인 상처가 말끔히 나아있었다.
“고, 고마워요.”
“일단은 자리를 옮길까요?”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라라는 엘리나5를 따라 근처에 위치한 응접실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아 마음을 추스르자 엘리나5가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는 차였다.
“슈모르드 양, 폐하께서 갑자기 검을 겨누셔서 무서웠죠?”
차를 들이켜던 라라는 그 질문에 살며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무섭지는 않았다. 단지 크게 혼란스러웠다.
황실 무도회에서 쓰러졌을 때 오빠쓰레기 대신 제 곁을 지켜주었던 그. 불법 성형 시술을 하려던 제게 귀엽다고 말해주었던 그. 떨어지는 무거운 책들을 몸으로 막아주었던 그.
만난 적은 고작 몇 번뿐이었지만 라라는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전 그는 차가운 얼굴로 남장을 한 자신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자 가슴이 크게 술렁였다. 라라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 폐하를 좋아하는 건가요?”
뜨끔하고 가슴이 찔린 기분에 라라는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왠지 많이 속상해 보여서요.”
아, 라라는 작게 소리를 냈다. 그제야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은 속상한 것이었다.
“…맞아요. 그분을 좋아하고 있어요.”
“어머.”
“하지만 깊은 감정은 아니에요. 사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속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라라는 자신이 얼빠라는 것을 알았다. 좋아한다고는 해도 사실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었다. 이름이 페아라는 것뿐, 아마도 남주인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자라는 것 정도가 자신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와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도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와 이미 많은 것을 공유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이긴 했지만 그분과 입술이 닿은 적이 있어요. 첫 키스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그 뒤로 계속 그분이 떠올랐죠. 하지만 이걸로 과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마음이나 감정은 남이 나서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찰나의 사소한 일에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어루만지듯 자애로운 목소리로 얘기한 엘리나5는 은은히 웃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고 고민하는 것을 보면 그분을 향한 마음이 작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네요.”
“…아.”
“그리고 방금 전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모르는 사내라고 여겨 검을 겨누신 것뿐, 슈모르드 양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시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아요.”
“제 얘기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라라는 새삼 엘리나5를 우러러보았다. 아무리 눈에서 파괴적인 빔을 쏜다곤 해도 성녀는 성녀였다. 타인을 보듬을 줄 아는 자애로운 마음씨나 아름다운 미소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두려워하고 피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라라가 머쓱하게 웃으며 앉아있을 때였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엘리나5가 상냥하게 눈매를 휘며 손을 내밀었다.
“저희 이제 따로 계획을 세워볼까요? 오늘 밤 폐하를 뵈러 가서 어떻게 할지.”
“저희라면… 어, 저도… 같이 가는 건가요?”
“당연한 걸 물어보시네요. 놀라게 한 만큼 사과를 받아야지 않겠어요?”
엘리나5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투명해서 라라는 그녀가 간 크게 어떤 일을 꾸미려 하는지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이래도 돼요……?”
라라는 머리를 덮고 턱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새하얀 면사포와 몸을 장식하고 있는 은장신구들을 내려다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현재 라라는 엘리나5를 대신해 성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