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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34)화 (34/115)

34화

“됐고, 깎아봐.”

갑자기 날아온 사과에 라라는 “어엇.” 하고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받아냈다. 이제까지 기사단에서 훈련했던 것이 마냥 쓸모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마검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마! 갱상도 사나인 과일 같은 거 깎을 줄 모른다!”

“쓸모없는 납덩이.”

“마! 말 다 했나?!!”

“맞는 말 했는데 왜?”

씨익씨익대며 마검이 옅게 떨리기 시작했다. 열을 받은 건지 검 손잡이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는데, 미하일은 개의치 않고 신랄한 비꼼을 이어갔다.

“베고 썰고 깎는 데 쓰이는 게 검 아닌가. 제 기능조차 못 하는 검을 검이라 부를 필요가 있다고 봐? 그냥 장식용 납덩이일 뿐이지.”

“…그 말 취소하게 만들어 주마. 마!! 사과 준비하지 않고 뭐 하노!”

왜 나한테……. 라라는 구시렁댔지만 순순히 사과를 검에게 내밀었다.

“마!! 사과를 위로 던져봐라! 얼른!”

“네? 아, 네…….”

사과를 허공에 던진 순간 갑자기 팔이 멋대로 움직이며 사사사삭 사과의 껍질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벌거벗은 사과는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라라의 손바닥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마! 보이나? 이게 바로 갱상도 사나이 아이가!”

“와……. 정말 대단하세요.”

이 자존심 센 마검을 능수능란하게 부려먹은 미하일이.

미하일은 반달 모양의 사과 한 조각을 들고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보다 그 칼 씻었냐?”

“아뇨……?”

“…그럴 줄 알았어. 이 사과 땅에나 묻어라. 더러워서 어떻게 먹어.”

“마!! 깎아줬더니, 죽고 싶나! 내 오늘 기필코 니 쥑인다! 알긋나?! 쥑이삔다고! 마!!”

마검에서 흉흉한 살기가 방출되었다. 날뛰는 마검을 가까스로 제압한 라라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왔다.

“진정하세요, 좀!”

“닌 누구 편이가!! 말리지 마라! 내 오늘 점마랑 끝장을 낼 기다!”

“으아악, 진정하시라니까요! 자기가 검이라는 자각은 있으세요? 그러다 진짜 사람 죽여요!”

“니, 내가 이미 주긋다는 거 아나? 사람 죽이는 거, 그깟 거 내 무서워할 줄 알고! 내 이래 봬도 살아있을 땐 갱상도에서 알아주는 칼잡이였다 아이가!”

휙 쳐올라간 검에 라라가 어어어, 하고 다른 팔로 한 손을 잡아 눌렀다. 정말 사람이라도 벨 것처럼 난동을 부리는 이 마검을 어떻게 진정시키나 다급하게 머리를 쥐어짜 낼 때였다. 라라의 눈에 기적처럼 길바닥에 똥개가 싸질러 놓은 개똥이 들어왔다.

라라는 개똥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날뛰는 한쪽 팔을 눌러 검 끝이 개똥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가져갔다.

“…움직이지 마세요. 여기서 더 난동 피우면 개똥 썰 거예요.”

“니… 진심이가?”

“…말했어요, 한 번만 더 난동 피우면 이 개똥 썬다고.”

차가운 바람이 라라의 뺨을 스쳤다. 서슬 퍼렇게 빛나던 마검에서 퍼져 나오던 살기가 차차 흩어지더니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제까지 이토록 무서운 주인은 첨이다…….”

“제가 왜 주인이에요?”

“닌 내가 선택했으니까.”

“거절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떨어지세요.”

라라는 마검의 검 손잡이 부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쓸쓸한 눈빛에 마검은 흠칫하고 몸을 떨며 더 악착같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못 놓는다……. 내 니 없으면 못 산다!”

“…미안해요. 전 검과는 멀어지고 싶어서. 대신 검 쓰는 여주를 소개시켜 줄게요.”

“니 아니면 안 된다 안 카나!”

“그만해요! 이제 검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요!”

공허한 외침이 어두워진 숲속에서 울려 퍼졌다. 마검의 비스듬히 눕혀진 검날 위로 자포자기의 빛이 흘러내렸다.

“변했다……. 니 내를… 그렇게 다른 여자한테 보내고 싶나? 근데 그거 아나?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맞아요. 개똥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검 없죠.”

“마! 그건 아이지!! 마!! …아, 알겠다!”

팔을 늘어뜨린 채 있던 라라가 마검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일주일만! 내랑 일주일만 살아보는 건 어떠노! 그래도 내가 쓸모없다 생각되면 검 쓰는 여준가 하는 가한테 팔아라.”

“흐음…….”

라라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 중요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은 웬일로 조용했는데 고뇌에 찬 인간 라라는 신에게 답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신님, 듣고 계세요? 어떡하죠. 마검은 원래 여주 손에 들어가야 옳잖아요. 저 같은 엑스트라가 이런 대단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

<어차피 마검 클리셰는 망했는데 알아서 하거라. 난 게임 중이라 바쁘니라. 좀 있다 귓속말 고고.>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사람은 못 죽여요. 다치게도 못 하고요. 살면서 벤 건 A4용지에 손가락 벤 게 다였어요.”

법을 준수하는 일반 시민의 말에 마검은 분노했다.

“니 그럼 평소에 칼은 어따 쓰노!”

“요리할 때 쓰겠죠?”

“마! 갱상도 남자는 부엌에 들가는 거 아이다!”

“안 그러면 개똥이나 썰어야죠 뭐…….”

“마! 남자가 부엌에서 요리도 하구 그래야 진정한 싸나이 아이가!”

그렇게 졸지에 봉인되어 있던 마검, 아니 마식칼을 얻게 된 엑스트라 라라였다.

“자요, 오늘 할당량 채웠어요.”

라라는 입단 지원서로 두둑이 채워진 서류 봉투를 디체스에게 내밀었다. 이미 푸른 달이 뜬 지 오래였지만 집무실 안은 밝았는데, 환한 조명 아래서 디체스는 서류 봉투를 건네받으며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100명을 줄여주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없습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임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 그렇게 자신과 약속했으니 말이다. 라라가 막 뒤를 돌아 나가려던 찰나였다.

“라안 경.”

라라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강한 손아귀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눈을 내리깐 그가 절박한 음성으로 호소했다.

“어떻게 하면 내 곁에서 벗어나지 않을 겁니까.”

“단장님?”

“마!! 이 새끼가 누굴 만지노! 안 떼나!”

갑자기 들려온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에 디체스가 빠르게 검을 뽑아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동시에 촤하하하, 하고 할아버지 같은 웃음소리가 주위에서 울려 퍼졌다.

“마! 웃긴 자슥이네, 이거!! 내 여기 있다 아이가!”

라라는 닥치라고 마검의 손잡이를 눌러 쥐었으나 마검은 아주 신나게 검집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떠들었다. 뒤늦게 디체스가 라라의 허리께에 걸린 마검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것은…….”

“그, 말하는 검이라고, 요즘 애들 장난감으로 출시된 마법 검이에요. 호호, 신경 쓰지 마세요.”

“마!! 내 경고하는데, 우리 라라 건드리면 쥑이뿐다. 알긋나!!”

라라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스러워서였다.

“어째서 내게 거짓말을 하려는 겁니까.”

분위기가 변한 디체스가 싸늘한 눈으로 라라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어느새 그의 악력이 더욱 강해지자 라라는 “읏.” 하는 가냘픈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깨를 틀었다.

“이 검과는 무슨 사이입니까. 솔직하게 말하십시오.”

“단장님, 이것 좀 놓아주시…….”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니 제대로 말하십시오. 오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연락이 안 된 것도 다 이 검이랑 단둘이 뒹굴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말해보십시오!”

“뭘 뒹굴어요! 그냥 말하는 장난감 검이라니까요!”

“니 내가 창피하나……? 하, 알겠다. …갱상도 남자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물러날 줄도 아는 법이다.”

“닥쳐요! 닥치라고요!”

라라가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물들인 채 쓰러질 것처럼 고함을 내지르자 두 사내도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디체스는 라라의 손목을 세게 쥔 손을 약간 느슨하게 풀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를 잡아둘 수 있는 겁니까.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그대를…….”

“이러지 마세요. 엘리나1이 있으시잖아요.”

“엘리나1도 있고, 당신도 있고, 티나도 있고, 제이닐도 있고, 아즈웬도 있고, 줄리도 있고, 그레이프도 있고, 에이미도 있고, 클로에도 있고, 베라도 있고, 데이지도 있고, 파로시아도 있고, 그 외 228명이 더 있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228명이나 되시겠다, 그냥 저 같은 송사리는 어장에서 놓아주는 게 어떠세요.”

라라는 정색하며 그의 손을 내쳤다. 이 쓰레기도 과연 남주라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며 말이다.

‘앞으로 42명인가…….’

100명을 모으기로 약속한 지 이틀이 남은 상황이었다. 라라는 영애, 귀부인 할 것 없이 영업했으나 아직도 반이 남은 상황이었다.

<교회 아줌마처럼 일일이 저택으로 찾아가지 말고 차라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홍보해 보지 그러느냐?>

‘홍보요?’

<그렇다, 선택받은 자여. 전단지라도 돌려 보거라. 사탕 같은 거 붙여두면 받기는 하느니라. 바닥에 버려진 거 보면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신의 충고에 라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홍보라,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어디에서 홍보를 해야 할 지였다.

‘수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데가……. 음, 평일 낮에는 상점가도 한가한 편이고……. 아!’

라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평일에도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딱 한 군데를 알고 있었다.

라라는 곧바로 입단 신청서를 두둑이 쌓아놓고 일일이 사탕을 붙이기 시작했다. 100장을 다 붙였을 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입단 신청서를 챙겨 들고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부지런히 달리던 마차는 대신전의 입구에서 약 50m 떨어진 지점에서 멈췄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지는 마차의 행렬을 보니 중간에서 내려 걸어가는 게 훨씬 더 빠를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라라는 무거운 입단 신청서를 든 채 걷기 시작했다. 입구를 지난 후에는 사람들을 따라 또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걷고, 달리고, 오르고, 영업 사원의 힘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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