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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33)화 (33/115)

33화

“하지만 검이라니……. 나는 엘리나3과는 달리 그런 무기는 무거워서 못 휘두를 거야. 폐만 끼칠 게 분명해.”

“우와, 엘리나3처럼 남장하고 기사단 다니는 것도 재밌겠다! 아, 그래, 실피드. 나도 안다고. 내가 남장해서 검을 휘두르겠다는데 네가 왜 난리야.”

라라는 빠르게 두 공녀를 스캔했다. 한 명은 너무 착한 데다 청순가련 공주님 같은 타입, 그래서 거절에는 약하지.

“나 같은 가녀린 영애도 입단했는데 엘리나1이 못 할 리 없어. 게다가 디체스 단장님과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일 텐데 놓칠 거니? 호호.”

“아… 아…….”

예쁜 입술을 빠끔거리며 볼을 붉히던 엘리나1이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거렸다. 이제 한 명만 남았다. 다음 타깃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벌써부터 안면을 때리는 바람이 느껴졌다.

“저기… 정령왕님?”

보이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엘리나2의 보호자인 그를 어떻게든 꼬드겨야만 했다. 라라는 ‘내가 빠져나가려면…….’이라는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성실 영업 사원에 등극한 화려한 말발을 선보였다.

“기사단은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에요. 엘리나2가 매일 집에서 뒹굴기만 하고 하는 일이 없잖아요? 그 시간을 좀 더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저는 기사단을 추천해요. 기사단에선 각종 호신술을 가르쳐 주는데요. 사고만 일으키는 엘리나2에게는 꼭 필요할 거라 저는 생각해요.”

“거기서 말썽 피우면 어쩌냐는데? 실피드, 말 다 했어?”

“음, 그건 제가 잘 감시할게요. 그리고 듬직한 기사분들이 많아서 자칫 사고를 일으키려 하면 나서서 막아주실 거예요. 무엇보다 황실기사단 아니겠어요? 웬만한 사고에도 끄떡없을 거예요.”

웃음. 어떻게든 전기장판, 아니 기사직을 팔겠다는 강렬한 의지에 피라미드의 신이 도와주기라도 한 것인지 방 안을 휘몰아치던 바람이 잔잔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페레우스를 보고 배운 대로 라라는 꾸벅꾸벅 인사하고는 뒤돌아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첫 영업부터 두 명 성공이라, 출발이 상쾌했다.

라라는 모든 인맥을 다 털어서라도 기사 100명을 채우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인맥이라 봤자 제 또래 영애들밖에 없다지만 악질 피라미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누구든 상관없었다. 양심 따윈 팔아먹은 지 오래였다.

* * *

“휴우……. 18명인 건가.”

라라는 제법 두꺼워진 서류 봉투에 담긴 입단 지원서들을 세어보았다. 크리스틴 영애, 밀레 영애, 슈리아 영애 등 하루 실적치고는 꽤 두둑했다.

‘그래도 나머지 두 명을 채워야 하는데.’

하루 목표 달성량을 20명으로 정한 이상 어떻게든 끝을 봐야 했다.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지만 라라는 꿋꿋하게 대신전 정원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도달한 건물로 들어서자 소파에 반쯤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연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미하일 씨?”

“미하일이라고 불러.”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라라는 싱긋 웃으며 그의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기사단에 지원해 볼 생각은 없나요?”

“넌 내가 교황이란 자각이 없나 보지?”

“호호, 아뇨~ 매일 이렇게 틀어박혀 계시는 것보다는 나와서 활동적인…….”

“싫어.”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요.”

“굳이 듣지 않아도 개소리일 게 뻔한 얘기를 내가 왜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들어줘야 해?”

“매일 여기서 틀어박혀 있는 건 시간 낭비 아니에요?”

“계속 그런 식으로 토 달 거면…….”

미하일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라라가 놀라 서류 봉투를 떨어뜨리자 그는 그것을 한쪽 발로 슥 치워내고는 그녀를 문 쪽으로 끌고 갔다.

“신전에나 갔다 와. 내 개인 집무실의 오른쪽 방에 들어가면 찬장이 하나 있을 거야. 그 안에 있는 과도 좀 가져와.”

“그, 그걸로 뭘 하시게요?”

“과일 깎아야지. 그렇다고 널 깎을 수는 없잖아.”

라라가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그를 보자 미하일이 피식 웃으며 “농담이야, 쫄기는.” 하고 말했다. 면전에서 닫힌 문에 라라는 하는 수 없이 과도를 찾으러 신전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넓은지 신전에 들어서는 데만 꼬박 반 시간이 걸렸다. 몇몇 신자들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 더 깊숙한 중심부에 들어서자 근엄한 얼굴로 문을 지키는 성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황제도 함부로 지나갈 수 없는 이곳을 어떻게 지나야 하나 라라는 조금 난감해졌다. 교황 성하가 과일 좀 깎게 과도를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다행히 라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예전에 라라를 이곳으로 안내했었던 성기사가 그녀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라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지나쳐 교황의 개인 집무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분명 오른쪽 방이라고……. 아, 저 방인가 보다.’

우측으로 돌자 거대한 석조 문이 보였다. 문고리가 녹슨 자물쇠로 칭칭 감겨있어 성기사에게 열어달라고 해야 하나 난감할 때였다. 철컥 하고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자물쇠가 마법처럼 스르륵 풀려 바닥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음?’

라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슬쩍 문을 열고 머리부터 집어넣었다.

“거기, 누구 있나요?”

얼마나 넓은지 제 목소리가 한참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라라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깜깜해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벽 쪽을 더듬자 스위치가 있었다. 달칵, 하고 누르자 천장에 달려있던 마법 조명등이 방 안을 밝혔다. 환한 빛이 먼지가 쌓여있는 유리 진열장 위에 내려앉았다. 라라는 홀린 듯이 유리 진열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찬장인가.’

뭔 놈의 찬장이 이렇게 화려한지는 몰라도 아무튼 칼이 보관되어 있으니 찬장이 맞는 것 같았다.

유리 너머로 아이 키만 한 아름다운 검이 진열되어 있었다. 새하얀 은빛 칼날과 새까만 검 손잡이가 대조되어 그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어 보였다.

라라는 어떻게든 이 칼을 손에 넣고 싶었다. 과일 깎기엔 힘들 정도로 과도치곤 크고 아름다웠지만 사람이란 이렇듯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 쉽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본능처럼 유리 진열대의 문을 열고 안에 있는 검 손잡이를 쥔 순간이었다.

“마!”

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자 라라는 화들짝 놀라 반보 물러섰다. 검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려 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 여기다, 여기!”

“……?”

뒤늦게 라라는 그 걸걸한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마!! 봤으면 90도로, 행님 반갑십니더! 이케 따악 인사해야 될 거 아이가!!”

“…과, 과도가 말을 해……?”

“마! 과도라니!! 내 어딜 봐서 과도가!”

자신을 과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검을 라라는 귀신 보듯 보았다. 손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붕붕 팔을 휘둘러 보았지만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성기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천 년의 봉인이 풀리다니!”

성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빼들고 라라를 향해 겨누었다. 라라는 “이게, 이게 안 떨어져요!” 하고 외쳐대면서 계속 팔을 휘둘러 댔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하던 성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 영광영광영광~ 영광영광영광~”

“영광~ 영광영광영광~ 영광영광영광~”

찬송가가 이어지는 와중에 한 성기사가 라라의 곁으로 접근하며 말을 걸었다.

“정신을 지배당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저희 대신전에서 천 년간 봉인해 두었던 마검으로, 사악한 힘으로 검사의 마음을 현혹시켜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찬송가로 저 마검의 힘을 약화시키겠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제 말에 따르십시오.”

“이게… 마검이라고요? 그럼 과도는 대체 어딨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오른쪽 방 찬장에 보시면 있을 겁니다.”

“어머, 집무실 안이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 찾았네요.”

라라는 다른 손으로 뺨을 감싸고 부끄럽단 듯이 호호호 웃어 보였다. 그동안 날뛰던 라라의 오른손은 차차 진정되어 갔다.

“그보다 이 마검 말인데요. 그렇게 사악한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어떤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거죠?”

“그것은…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검사가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표준어로 교정하기 위해 교정 학원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준비물인 볼펜을 집에다 놓고 와버렸지요.”

“…….”

“그날은 볼펜을 입에 물고 발음을 연습하는 날이었습니다. 검사는 볼펜 대신 마침 허리께에 걸고 있던 검을 꺼내 들어 입에 물었습니다. 그리고 발음을 하는 순간 혀가 잘리고 말았습니다.”

라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끔찍한 괴담이었다.

“검사는 재빨리 응급실로 실려 갔고 혀 봉합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그 후유증으로 평생 표준어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검사는 68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투리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검사는 숨을 거뒀고 그 검사의 영혼이… 검사의 혀를 자른 검에 깃들었습니다.”

“…설마 그 검이…….”

“그렇습니다. 그 검이 바로 영애께서 들고 계신 마검입니다. 검의 주인은 경상도 사나이여서 평소 ‘마!’를 자주 말하고 다녔는데, 그래서 마!검입니다.”

결국 라라는 터지고 말았다. 웃으면서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라라의 침이 마검의 위로도 튀었는데 이에 반응하듯 곧바로 마검이 살기를 방출하며 파르르 떨렸다.

“마! 드럽게, 죽고 싶나!”

“야, 이게 어딜 봐서 과도야……?”

역시나 미하일에게 돌아오자마자 욕이 한 바가지 돌아왔다. 눈알은 장식이냐, 부엌 찬장에서 과도 하나 찾아오는 게 그렇게 힘들었냐, 어떻게 하면 과도 찾으러 갔다가 천 년 동안 대신전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마검을 찾아올 수가 있냐 등 적나라한 비꼼이었다.

“네 눈엔 이게 과도로 보이지.”

“…아니, 제가 뭐 일부러 그랬겠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마검을 손에 넣은 걸 어떡해요. 놓으려고 해도 안 떨어지고, 저도 난감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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