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32)화 (32/115)

32화

“저… 단장님, 이걸 제게 주는 이유가 뭐죠? 보고 힘내라는 건가요?”

“이대로는 훈련에 지장이 갈 겁니다. 이 책이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라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자 디체스는 창피해할 필요 없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굴었다.

“이해합니다. 같은 남자 아닙니까.”

“아니, 저 여자라고요!”

“아, 그랬습니까. 잠시 헷갈렸습니다. 그건 다시 돌려줘야겠습니다.”

‘그게 더 중요하냐……!’

라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야한 잡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소중하게 두 손으로 잡지를 받치고 책상 앞으로 가는 그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싶었지만 꾹 짜증을 눌렀다. 대신 얼른 휴가서를 작성하고 나가기 위해 그에게 휴가서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긴 은발을 늘어뜨린 엘리나1이 안으로 들어섰다. 도시락 통을 들고 있던 그녀가 두 사람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텅, 댕그르르르. 도시락 통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뚜껑이 열리며 장렬하게 쏟아진 음식물에 라라가 다 놀라 어안이 벙벙할 때였다.

“라라… 아, 둘이 함께였군요. 죄송해요. 실례했어요.”

빠르게 몸을 돌린 엘리나1이 그대로 뛰쳐나갔다. 곧바로 디체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라라를 돌려세우더니 날카롭게 캐물었다.

“지금 뭘 한 겁니다.”

“전 아무것도…….”

“그대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엘리나1이 저럴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엘리나5도 아니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서 도시락을 맞혔을 리 없잖아요…….”

라라 자신도 좀 알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오해를 하고 저러고 뛰쳐나간 건지 말이다.

디체스는 엘리나1을 쫓아 복도로 나갔다. 라라는 여전히 집무실 안에 서있었는데 열린 문 사이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기다리십시오. 어딜 가려는 겁니까.”

“…라라와 단둘이 마저 얘기 나누세요. 저, 저는 방해되잖아요.”

“누가 그럽니까, 그대가 방해된다고.”

‘당연히 업무 중에 찾아오면 방해되겠지…….’

덤덤한 라라와는 달리 두 사람은 애절한 줄다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디체스가 엘리나1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멀쩡한 소파를 놔두고 굳이 엘리나1을 벽에 밀어붙이더니 한 팔로 그녀의 퇴로를 차단했다. 라라는 디체스의 등 뒤에 멀찍이 서서 “저기, 휴가서 좀…….” 하고 눈치만 보았다.

“오해입니다.”

“저… 알고 있었어요, 제가 첫 번째 여자가 아니라는 거.”

“오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만났던 81명의 여자는 전부 진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을 준 적 없습니다.”

“저도예요. 당신이 제 첫 번째 남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벅찼어요. …행복했는걸요,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웃으며 같이 지냈던 시간들이.”

‘아니, 너희 서로 알게 된 지 한 달도 안 지났거든.’

라라가 조용히 속으로 토를 다는 동안 멀리서는 꽤나 스펙터클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엘리나1이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디체스의 옷자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면 저를, 저를 대체 왜 붙잡으신 거예요. 사실 저흰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흐윽.”

“오해입니다. 제가 이렇게 아무나 붙잡을 남자로 보입니까. 맞습니다. 128번째입니다. 하나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기, 휴가서 좀…….”

애틋한 눈길과 뺨을 덮는 자상한 손길에 엘리나1이 고개를 떨구고 끅끅거렸다.

“제 자신이 흐윽… 너무 못나 보여요. 친구를 의심하고… 당신을 의심하고… 저 못된 사람인가 봐요.”

“아닙니다. 당신만큼 마음 여리고 착한 여인이 세상에 또 어딨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의심해도 괜찮습니다. 내게서 일방적으로 멀어지지 않는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언제든 당신의 의심을 받아줄 수 있습니다, 엘리나1.”

“흐윽……. 미안해요.”

“저기, 휴가서 좀…….”

기어이 엘리나1은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손이 엘리나1의 왼뺨에서 오른뺨으로 빠르게 옮겨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병원균을 옮기는 바퀴벌레보다도 잽싸고 끈질겼다.

“눈물 그치고 날 보십시오. 모든 것은 오해입니다.”

“저기, 휴가서는 언제쯤 받을 수 있는…….”

“비록 이제껏 수많은 애인들이 있었고 다른 여인들과 1153회 정도 잠자리를 같이했으나 당신 같은 여자는 내 인생 처음입니다.”

‘아니, 엘리나1이 의심할 만도 하네!!’

그 정도 여성 편력이면 엘리나1이 그를 가둬두지 않은 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 얘기까지 하지 않으려 했는데… 내 어머니는 아들과 남편은 나 몰라라 한 채 애인과 뒹굴기를 좋아하던 이기적인 여자였습니다.”

“아…….”

엘리나1은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 반면 라라는 갑자기 얘기가 심도 있게 진행되자 답답함에 제 가슴만 퍽퍽 두드렸다.

“어머니는… 공작인 나의 아버지를 만나기 전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였습니다. 어머니의 배에 덜컥 내가 들어서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신분을 숨긴 채 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

그렇게 남주의 여성 편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약 30분간의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가정사가 이어졌다. 그동안 라라는 서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소파에 누워 기다렸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어머니의 외삼촌의 빚까지 떠안아 갚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자유로워지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외삼촌은 어떻게 하면 공작가에 더 돈을 뜯을 수 있을지 궁리했고, 마침내 어머니를…….”

“아…….”

“그렇게 어머니의 외삼촌을 감옥에 가뒀으나 술을 먹어서 그랬다는 이유로 감형이 되고 감옥에서도 나름 모범수로 지냈던 모양인지 5년도 되지 않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외삼촌은 휴양지로 떠난 어머니를 찾지 못하자 공자인 나를 노렸고…….”

“아…….”

그렇게 어느덧 1시간 30분이 지났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여성을 혐오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너를 혐오할 것 같아.’

라라는 이놈의 상사를 기절시킨 뒤에 책상을 뒤져 휴가서를 찾아 얼른 쓰고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나의 신분이 아닌 진짜 모습을 봐준 사람은 그대가 처음입니다. 모두 하나같이 공작이라는 작위만을 보고 접근한 여자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상처받은 듯이 처량한 눈빛이 마치 박멸 스프레이 앞에서 설설 기는 바퀴벌레 같았다.

다행히 사연은 이것으로 끝인지 엘리나1이 디체스의 커다란 몸을 한 팔 가득 끌어안아 주었다. 작지만 따스한 체온에 디체스는 답지 않게 놀란 듯 눈을 키우다가 무뚝뚝한 얼굴을 완전히 풀었다. 상처로 수두룩한 남주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여주 클리셰의 완성이었다.

“저 이제 좀 휴가서를…….”

라라가 슬며시 끼어들어 본론을 말하려 할 때였다. 디체스가 고개를 숙여 엘리나1의 입술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둘이 벽에 기댄 채 온몸을 비벼대는 꼴을 보며 라라는 담담히 생각했다.

‘…바퀴벌레 같은 새키들.’

* * *

며칠 뒤, 라라는 황실 기사 최초로 승급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퇴단뿐인 것일까. 라라는 내심 속으로 기대하였다. 디체스에게 직접 호출되어 불려갈 때도 상황의 심각성은 모른 채 흐뭇한 미소만 지었다.

“…뭐, 뭐라고요?”

그러나 라라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퇴단 제의가 아니었다.

“황실기사단 영업부서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황실기사단에 그런 것도 있었어요……?”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창설한 부서입니다.”

업무 책상 앞에 편히 앉은 채 디체스는 서느런 광이 흐르는 안경을 잠시 벗어 닦기 시작했다. 라라는 그의 앞에 서서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이대로 두면 그대의 퇴단은 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대의 검술 실력이 거지 같아도 나는 그대를 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방금 거지 같다고 했죠?”

“그러니 다른 재능을 살려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는 부서로 옮기라는 말입니다.”

“방금 거지 같다고 했잖아요.”

라라의 집요한 물음에 디체스는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디체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려 하는군요. 뭐 좋습니다. 부서가 실질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선 실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라안 경,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분명히 거지 같다고 한 거 이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일주일 안에 100명을 영업하십시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죠?”

“말 그대로입니다. 영업부원인 그대가 일주일 안에 신입 기사 100명을 입단시킨다면 그대에게 자유를 주겠습니다.”

“그 말은…….”

“그렇습니다. 퇴단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자유. 꿈에 그리던 자유였다. 라라는 이 지긋지긋한 땀 냄새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하겠어요……! 실적, 100명을 채우겠어요!”

디체스의 앞에서 당당히 외친 라라는 곧바로 영업부원으로서 새 업무를 떠맡았다.

‘…100명, 까짓 거 영업하고 말겠어.’

마치 전기장판 100장을 팔기 위해 이를 가는 피라미드 말단 사원처럼 라라는 비장하게 마차에 올랐다. 첫 번째 영업 타깃은 엘리나 공녀들이었다.

리니엇 공작 저택에 도착한 라라는 곧바로 엘리나 공녀들과 응접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디체스에게 줄 손수건의 자수를 놓고 있는 엘리나1과 한가롭게 소파에 누워있는 엘리나2뿐이었지만, 시작부터 예감이 좋았다.

“본론부터 말할게. 기사단에 입단하지 않겠어?”

“응?”

“으어어엉? 방금 뭐라고?”

티 없이 맑은 소녀 같은 목소리와 명랑한 소년 같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역시나 반응은 천지 차이로 엇갈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