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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31)화 (31/115)

31화

덕후 냄새가 난다는 듯 라라가 코를 잡고 인상을 썼다.

“너도 똑같으면서 웃기다능. 아까 로브신사 끌어안고 뒹굴던 애가 누구였었지.”

“하, 그건 당연히……! 오늘 처음 봤으니 감격스러워서였죠!”

“언제든 찾아오겠다고 한 주제에.”

“집 전체를 덕질 공간으로 만든 주제에.”

잠시간의 티격태격도 라라가 먼저 흥 하고 고개를 돌림으로써 끝이 났다. 라히는 작지만 선명한 웃음소리를 냈다.

“계속 그렇게 나올 거냐능?”

괜히 자상한 어조에 라라도 마음이 사르륵 풀렸다. 다시 사근한 분위기로 바뀌자 그는 미소를 누그러뜨렸다. 그러곤 손에 든 포크를 잠시 접시 가장자리에 걸쳐놓고선 라라를 응시했다.

“사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키스했다능.”

“귀중한 만화책을 침 따위로 훼손시키다니, 지금 생각이 있는 거예요?!”

“종이 여친 말고… 현실 여자라능.”

안경테 너머로 주름이 잡히는 게 보이자 라라는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근데 릴리카와 로브신사의 첫 키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능.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고 달콤한 맛이 나진 않았지만 뭐랄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능.”

“어머나!”

“물론 상대는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쓰레기…….”

“사고였다능. 알지 않냐능, 흑마법사 극혐하는 거!”

흠.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라라가 더 말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취조실에서 이실직고하는 범죄자처럼 머리를 숙인 채 낮아진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라 미처 대비할 수가 없었다능……. 나보단 상대가 더 놀랐겠지만. 너, 너, 너는 최근에 키스한 적 있냐능?”

“그, 그걸 왜 묻는 건데요!”

“…그냥 궁금해서라능! 어떤 느낌이었냐능. 기분 나쁘지는 않았냐능……?”

“사실… 저도 최근에 어떤 남자한테 첫 키스를 당했는데… 그,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위험한 순간 자신을 보호해 준 그 단단한 품, 내려오던 잘생긴 얼굴, 따스한 숨결, 촉촉하게 스며들었던 입술. 라라의 머릿속에 순간 분홍빛 장미가 한가득 피어났다.

휘날리는 장미꽃잎 사이로 멋들어진 제복을 입은 검자줏빛 머리의 미남자가 서있었다. 자상하게 눈꼬리를 휘며 그가 제게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몽롱함에 젖어 자연스레 상상에 빠진 라라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헤벌쭉한 낯짝을 본 건지 앞에선 말이 없었다.

침묵은 길게 이어져만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있던 라라는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식탁을 내리쳤다.

“물어봐 놓고 조용해지면 어떻게 해욧!”

“…미, 미, 미안하다능. 자, 잠깐 뭐 좀 가져오겠다능!”

얼굴을 푹 숙인 채 허둥지둥 일어나는 그의 귀가 빨갰다. 하지만 민망함에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던 라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뒤 들려온 발소리에 라라는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애인이라도 대동한 듯 라히는 한 팔로 다정하게 릴리카 다키마쿠라를 안아 들고 있었다.

“갑자기 나가길래 뭐 중요한 걸 가지고 오는 줄 알았는데…….”

“내겐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거라능! 마음의 안정에 반드시 필요하다능.”

“아…, 네.” 하고 라라는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다키마쿠라를 옆자리에 소중히 앉혀놓고 냅킨까지 깔아주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히기 위해 반으로 구긴 탓에 프린트된 릴리카의 전신 모습이 조금 찌그러져 보였다. 라라가 애써 안 보이는 척 식사를 이어나갈 때였다.

“확실하게 마음을 다잡았다능…….”

“뭘요?”

“나는 릴리카 짱을 배반할 수는 없다능. 오래전 릴리카에게 약속했다능, 평생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누가 뭐랬나……. 라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얘기했다.

“변치 않는 사랑 하길 응원할게요…….”

“인정해 줘서 고맙다능.”

“뭘요. 덕분에 조금 알게 됐어요. …아까 물어봤었죠,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요.”

그 말에 라히는 포크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사실은… 있어요. 이게 사랑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분을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주체가 안 돼서……. 아, 아무튼 그렇다고요.”

맞은편에서 수줍은 얼굴로 허둥지둥 말을 끊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아, 따로 좋아하는 현실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능. 하하……. 나도 응원해 주겠다능.”

“고마워요. 물론 제 영원한 최애가 로브신사인 건 변함없겠지만요.”

왠지 허탈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세라 황급히 옆자리로 시선을 피했다. 이제야 못마땅한 듯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릴리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릴리카 짱, 왜 인상 쓰고 있냐능?”

천에 주름이 진 탓에 프린트된 릴리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라히는 손바닥으로 슥슥 주름을 펴주었다. 마치 식사를 하다가 뭐가 묻은 여친의 입가를 닦아주듯 섬세한 손짓이었다.

그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라라는 생각했다. 자신은 저 정도로 씹덕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깊은 밤, 라라는 어디선가 들려온 인기척에 몸을 뒤척였다. 방문 밖에서 나는 소리인가, 귀를 기울이다가 뒤늦게 확 잠에서 깨어났다.

‘발코니에 누가 있어……?’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 문 위로 큰 그림자가 져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라라는 옆에 있던 촛대를 조용히 쥐었다.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부를까……. 옆방에 오빠 새끼도 있는데 오빠 새끼 방이나 갈 것이지 연약한 숙녀의 방에 침입하려 하다니.’

그러나 라라의 예상과는 달리, 밖에 서있는 남자는 안으로 침입하려는 시도는커녕 한번 몸을 숙였다가 다시 발코니 밖으로 뛰어내렸다. 라라는 놓칠세라 문을 확 열어젖혔다. 범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발코니 난간 밑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새하얀 꽃다발에 라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난 흰 장미의 자태가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대체 누가…….’

뒤늦게 고개를 들자 멀리 떨어져 있는 지붕 위에서 펄럭이는 새까만 로브를 볼 수 있었다. 지붕 위를 달리는 남자의 뒷모습에 라라는 산타할아버지라도 목격한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분명 로브신사 코스어님이었다.

“존잘님, 감사해요!!”

뜻밖의 선물에 라라는 밤하늘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크게 외쳤다. 이에 바로 옆방에서 반응이 왔다.

“아나, 시끄럽게……! 조용히 안 해!!”

“닥쳐, 쓸모없는 오빠 새끼는!”

“너… 오늘 뒈졌어. 문 열어.”

“문 잠갔거든, 멍충아.”

“안 열어! 야! 라라 슈모르드!!”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라라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밤이었다.

* * *

행복한 시간도 잠시, 다음 날 거지 같은 마법이 라라를 덮쳐왔다. 남장을 한 채 기사단으로 가는 중에도 아랫배가 조금 콕콕 쑤신다 했더니 아침 훈련을 하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왔다.

‘…자궁 죽여버릴 거야. 으으윽.’

연병장 구석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라라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때 지나가던 로렌스가 라라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라안? 여기서 뭐 하는…….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식은땀이 맺힌 그녀의 얼굴에 로렌스는 손수건을 꺼내 들어 닦아주었다. 평소에 여동생한테도 이렇게 좀 대해주지, 새끼. 라라는 냉정하게 그의 손을 쳐내곤 눈을 위아래로 흘겼다.

“눈도 제대로 못 뜨다니……. 확실히 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업혀, 의무실까지 데려다줄게.”

“의무실 말고… 단장님한테나 데려다줘요. 아무래도 오늘내일 휴가 써야 될 것 같아요.”

“그래, 너 지금 안색이 시퍼런 게 그냥 쉬는 게 좋겠어.”

라라는 오빠의 등에 군말 없이 업혔다. 오래전 자신을 업고 다녔던 그 다정한 품이 떠올랐다.

‘언제쯤이면 오빠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일을 하란 말이다! 일을!>

‘오늘은 아녜요. 혼자 걷지도 못하겠는데 일은 얼어 죽을…….’

속으로 불량하게 중얼거리던 라라는 단장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여기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로렌스는 라라를 조심스럽게 내려주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라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있잖아, 묻는 게 실례인 건 알지만… 그날인 거지?”

‘죽일까.’

라라는 생기가 사라진 까만 눈동자로 오빠의 얼굴을 담았다.

“온찜질 꼭 하고, 약도 챙겨 먹고, 오늘 하루는 침대에 누워서 푹 쉬어. 그리고…….”

순간 이마에 닿는 입술이 있었다. 로렌스는 한 손가락을 들어 인중을 문지르다가 반대편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그건 아픈 건 다 날려 보내는 키스.”

‘죽일까.’

마침 들고 있는 훈련용 목검을 힐끗 내려다본 라라는 충동을 억제하고 문을 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못 볼 걸 봐서인지 눈가는 삽시간에 퀭해져 있었다.

집무실에는 디체스가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정갈한 모습으로 사인을 휘갈겨 넣던 그가 뒤늦게 라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라안 경.”

“그게 으으…….”

말하려는데 갑작스럽게 또 배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라라가 문가에 주저앉자 디체스가 재빠르게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그… 뻐근한 게… 생리…….”

“생리적인 문제라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자신이 여잔 걸 아는 그는 다행히 이해해 주는 듯했다. 그는 잠시 라라를 세워두고는 업무 자리로 돌아가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표지가 없는 책 같았다.

“이거 받으십시오.”

“…그게 뭔데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빌려줄 테니 가져가서 쓰십시오.”

“……?”

읽으라고 주는 건가 싶어서 라라는 슬쩍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요염한 미인이 봉을 잡고 있는 전신 초상화가 양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자들의 야한 잡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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