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30)화 (30/115)

30화

“그래도 확실한 게 좋죠,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같이 친자 확인도 해요.”

‘대체 뭐를……?’

친자 확인이 뭔지도 모르면서 쓴 거지. 라라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분명 오늘 잘 때 생각날 거예요. 이거 사람 아주 미치거든요. 판결 받고 깔끔하게, 좋죠?”

역시 엘리나2였다. 친화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악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법원으로 가기 위해 사이좋게 마차에 오른 두 여인을 라라는 밖에 나와 배웅해 주었다.

<남주와 여주의 관계가 어느 정도 발전했을 때 라이벌녀가 등장해야 스토리가 쫄깃해지는데 이건 무슨 만난 지 5분도 안 됐는데.>

‘하지만 쫄깃해진 건 맞네요……. 법정 드라마 쫄깃하잖아요…….’

라라는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노을이 져가는 공원은 아름다웠다. 강렬한 주홍과 흐릿한 보랏빛의 조화가 이뤄낸 분수대는 명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홀린 듯이 바라보던 라라는 수풀 사이에서 바스락거림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능. 혹시 늦었냐능?”

오늘도 남자의 검은 자주색 머리는 답답하게 이마를 덮고 있었다. 동글뱅이 안경도 긴 콧대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지인의 모습에 라라는 방긋 웃어 보였다.

“아뇨, 딱 맞춰 오셨어요. 그보다 정말 정상적인 길로 안 다니시네요.”

“아무래도 사람들을 따돌리기엔 이 길이 제격이라능.”

“네, 네. 그래도 사람들 보는데 나뭇잎은 좀 떼세요.”

그는 오늘도 어깨와 흐트러진 머리칼 여기저기에 나뭇잎을 달고 있었다. 라라는 손가락을 들어 나뭇잎의 위치를 일일이 짚어주었다.

“거기요, 거기서 좀 더 위예요.”

“여기 말이냐능……?”

“아뇨, 거기서 좀 더 왼쪽으로요.”

“여기? 아무것도 안 만져진다능.”

“휴우…….”

포옥 한숨을 쉰 라라가 손을 들었다. 손끝이 검자줏빛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나뭇잎에 닿으려는 순간, 그가 자신도 들릴 만큼 숨을 급작스럽게 들이켜며 뒤로 물러났다.

“…뭐예요? 기껏 떼어주려고 했는데?”

“…괘, 괜찮다능. 내가 하겠다능.”

그러곤 자기 혼자 머리를 연신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딱 봐도 의심을 부추기는 과민 반응에 라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안면을 샅샅이 살폈다. 그놈의 동글뱅이 안경 때문에 감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보다 어디까지 읽으셨어요?”

“아……! 릴리카가 위험에 처해 밧줄에 묶여있을 때 로브신사가 다가와서 풀어주려다가 왠지 모르게 야한 그녀의 모습에 키스를 하는 부분까지라능.”

“그 부분 최고지 않아요?”

“읽다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능. 수위본은 사실 잘 안 읽는데 유리 님 동인지를 모으는 이유가 있다능. 유리 님은 특별하다능. 잔잔하면서도 인간의 내면 밑바닥까지 쥐어짜 내는 그 강렬함.”

“뭔지 알 것 같아요! 하악.”

“하악하악.”

더운 숨을 내뿜는 두 남녀를 행인들은 알아서 피하며 길을 터주었다.

동인지 얘기를 서로 주고받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덧 주택가에 들어섰다. 상류 귀족들이 사는 거리답게 조경이 잘되어 있었다. 라라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화단에 피어난 하얀 장미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에로디스의 꽃!”

“에로디스의 꽃!”

거의 동시에 외쳤단 사실에 라라와 라히는 서로를 바라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같은 장르를 파는 덕후끼리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한편으로는 흰 장미를 보니 라라는 괜히 찌그러진 장미가 떠올라 입맛이 씁쓸해졌다.

“사실 얼마 전에 어느 존잘님께 흰 장미꽃을 선물받았거든요. 로브신사 코스어분이신데, 음 라히 씨 정도의 체격이고 평소에도 로브신사 로브를 쓰고 다니세요. 목소리는 들어본 적 없고요. 혹시 누군지 아세요?”

“…아,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왜 그러냐능.”

“저도 우연히 알게 된 분인데, 제게 흰 장미를 주시지 뭐예요. 저희 같은 덕후들은 딱 봐도 봉인 장미인 걸 알잖아요?”

라라는 발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뭔가 기뻤어요. 전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통한 기분이었거든요.”

“그 꽃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능?”

“물론이죠. 근데 그만 책에 뭉개져서 지금 시들어 가고 있어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정원사에게 맡겨도 봤지만 정원사도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서운하겠다능.”

라라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라히가 곧 고개를 들더니 미소 띤 입으로 말했다.

“여기라능.”

라라가 따라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자 고급 저택 한 채가 보였다. 연푸른색의 지붕과 주택 주위를 두르고 있는 아담한 정원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울타리를 지나 대문을 열자 긴 복도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라라는 복도를 보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긴 복도의 양 벽을 따라 장식장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는데 투명한 진열장 너머로 마법소녀 릴리카 피규어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니, 이건 수코 제8회 스페셜 이벤트 경매에서 나왔던 거잖아요? 그리고 이건 예약 한정 판매로 여럿 울렸었던 전설의 피규어!”

“후훗, 이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다능.”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라라를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본 라히가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을 열었다. 드러난 방 풍경에 라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릴리카로 벽지 도배는 물론 릴리카 침대 커버, 릴리카 다키마쿠라, 릴리카 등신대, 릴리카 코스프레 의상, 릴리카 굿즈 등 완벽한 릴리카의, 릴리카를 위한 방이었다.

“여긴 릴리카 방이라능.”

“그렇다는 말은…….”

“훗, 로브신사 방도 있다능.”

“……?!!”

오, 신이시여. 라라는 당장 안내해 달라고 그를 붙잡고 애원했다. 라히는 말없이 라라를 데리고 그 반대편 방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그곳엔 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라라는 두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웠다. 각기 다른 버전의 로브신사 등신대가 자신을 향해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연 이 성역에 발을 들여도 되는 것일까. 라라가 주저하자 옆에서 다정한 손이 내밀어져 왔다.

“즐기라능, 이 순간을.”

“…아.”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라라는 비틀거리며 로브신사 다키마쿠라가 누워있는 침대에 손을 가져갔다. 따스했다. 누워도 되냐고 묻기 위해 문가에 서있는 그를 돌아보자 라히는 느릿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라라는 천천히 몸을 누였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고 있는 로브신사 다키마쿠라를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식사가 아직이라면 이 내가 대접해도 되겠냐능?”

“정말요?”

“그럼, 맡겨만 주라능. 잠시 뒹굴거리고 있으라능.”

그리 말한 그가 문을 닫아주었다.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얼마 동안이나 다키마쿠라를 안고 뒹굴거렸을까, 부드러운 노크 소리에 라라는 잠시 잊고 있던 현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식사 다 됐다능.”

“네, 갈게요.”

헤어지기 아쉬웠지만 라라는 다음을 기약하고 다키마쿠라를 놓아주었다. 방을 나오자 라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혼자 사는 거예요?”

“그렇다능. 혹시라도 읽고 싶은 거나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놀러 오라능. 너한테만 특별히 허락해 주겠다능.”

“정말요? 정말인가요?”

흡사 꿈속을 헤매듯 몽롱한 목소리였다.

“오, 감사해요. 당신은 진정한 성덕이자 천사예요. 앞으로는 존경의 의미를 담아 라히 님이라 부를게요.”

“그냥 편하게 라히로 불러주면 된다능.”

라히는 주방과 이어져 있는 아늑하면서도 근사한 식사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라라의 의자를 빼주었다.

감사함에 고개를 작게 숙이며 자리에 앉은 라라는 눈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스파게티였다. 순간 제 표정이 이상했는지 곧바로 조심스러운 중저음이 날아들었다.

“스파게티 싫어하냐능?”

“호호, 아뇨……. 좋아해요! 단지 스파게티에 약간 트라우마가 있어서요.”

“그런 거라면 역시 다른 요리를…….”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맛있어 보이는걸요?”

우아하게 드레스 위에 냅킨을 깔고 라라는 은포크를 쥐었다. 면을 한입 크기로 돌돌 말아 입에 가져가자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라라는 립스틱이 묻지 않게 입을 동그랗게 벌려 스파게티를 맛보았다.

“으음― 맛이 훌륭하네요. 이 저택의 요리사를 만나보고 싶네요.”

“내가 만들었다능.”

“정말요? 어머나, 세상에.”

오빠가 끓인 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곳엔 나밖에 없다능.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요리를 해먹는데 이젠 취미가 돼서 웬만한 건 다 할 줄 안다능. 손님한테 대접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라능.”

“정말 뛰어난 솜씨예요. 감탄했어요.”

당연히 요리사가 준비했을 거라 여겼는데 모든 게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하니 새삼 식탁 위 세팅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테이블보와 노랗게 빛나는 촛불을 받치는 은촛대 그리고 화병까지, 하나하나 신경 쓴 듯했다.

“이렇게나 센스가 넘치시는 분이셨을 줄이야. 호호.”

“그렇게 치켜세우면 부끄럽다능.”

“스파게티밖에 끓일 줄 모르는 저에 비하면 엄청 대단한 거죠. 자랑스러워하셔도 돼요.”

라라가 작게 웃어 보이자 반대편에서도 입꼬리가 매끄럽게 휘어 올라갔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면서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너에겐 로브신사 같은 존재가 있냐능?”

갑작스럽게도 그가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을 직역하자면 ‘사랑하는 사람 있니?’라는 말과 동일했는데, 라라는 순간적으로 페아라고 불렸던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들짝 털어내고선 라라는 침착하게 반문했다.

“그러면 그쪽은 릴리카 같은 존재가 있나요?”

“릴리카만큼 모에한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능. 현실 여자에겐 관심 없다능.”

“어후……. 물어본 제가 잘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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