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29)화 (29/115)

29화


5장 짝사랑의 정석

“…….”

“…….”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날렵한 눈이, 베일 것 같은 콧날이, 모두 꿈인 것만 같았다. 라라는 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화끈한 감정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 한 번 더!

하지만 같은 행운이 두 번이나 찾아올 리 없었다. 그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라라가 눈을 떴을 땐 이미 그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영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뒤늦게 큰 소리에 놀라 깬 건지 엘리나4가 책 더미 사이에 누워있는 라라에게 다가왔다.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손길에 라라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이렇게 많은 책들이 한 번에 쓰러지다니.”

엘리나4는 사서에게 허술한 관리 책임을 물어야겠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깨를 덮고 있던 겉옷이 스르륵 흘러내려 발치에 떨어지자 그제야 겉옷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지 눈을 크게 떴다.

이 겉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엘리나4는 알 수 있었다. 바로 두 시간 전쯤에 입고 있던 그를 직접 보았으니까.

“폐하…….”

대기에 흩어지는 엘리나4의 중얼거림에 라라는 수줍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 그 사람 이름 페아라고 하는구나.’

페아, 왠지 정감 가는 이름이었다. 라라는 그의 이름을 가슴속에 꼭꼭 잘 새겨두었다. 다음에 만났을 땐 레이디의 입술 순결을 빼앗아 간 책임을 지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장미가.”

라라는 이제껏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넘어졌을 때 손에서 떨어뜨린 건지 존잘님에게서 받은 흰 장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미라면 여기 있네요.”

함께 찾아주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리나4가 책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 빨간 장미를 주웠다. 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왜 이곳에 빨간 장미가 떨어져 있는진 몰라도 찾는 장미는 아니었다.

“아뇨, 제가 잃어버린 장미는 흰 장미예요.”

“혹시 이건가요?”

“아……. 찌그러졌네요.”

찾기는 찾았지만 책 아래에 반쯤 뭉개져 있었다. 라라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책을 들어 올렸다.

“정원사에게 새로 하나 꺾어달라고 말해볼까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이 장미가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라라는 반쯤 꽃잎이 떨어져 나가 너덜너덜한 흰 장미를 손에 쥐었다. 살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쉬운 마음뿐이었다.

물이 담긴 예쁜 유리잔에 반쯤 잠긴 흰 장미의 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라라는 방을 나섰다. 오늘은 미하일에게 빌린 옷을 돌려주러 가야 했다.

“라라.”

저택 밖으로 나오자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 탄 엘리나2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어서 타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그렇다. 옷을 돌려주러 간다는 건 단순한 핑계고 진짜 목적은 클리셰를 성립시키는 것으로, 미하일에게 찾아온 첫 여자 손님을 엘리나2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미하일이 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친한 첫 번째 여자는 여주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사교성하면 엘리나2이기 때문에 까칠한 미하일의 성격을 받아넘기며 다가갈 수 있는 인물로는 제격일 테다.

라라는 남장용 가발이 삐뚤어지지 않게 한 번 더 고쳐 썼다. 휴일에도 기사 제복을 입고 있는 라라에게 엘리나2는 흥미 어린 눈길을 던졌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더니, 그 복장을 보니 뭔가 있는 모양인데? 혹시 내가 미끼야? 잠복 수사라거나?”

“엘리나3이라면 몰라도 난 아직 그런 일을 맡을 정도로 실력 있지 못해.”

걱정 말라는 듯 한번 웃어 보인 후 라라는 목소리를 낮춰 당부했다.

“지금부터 만날 사람은 나를 남자로 알고 있어. 그러니깐 내가 여자라는 건 비밀이야, 알겠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진 몰라도 재밌겠다! …어우, 그렇게 잔소리할 것까진 없잖아. 실피드! 뭣하면 네가 지켜주면 되고. 아, 알겠어. 위기의식을 가지면 되잖아. 진짜 잔소리만 많아서.”

정령왕이 마차 어딘가에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내 옆은 아니겠지. 라라는 떨떠름하게 빈 좌석을 바라봤다가 혹여 눈이라도 마주쳤을까,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는 대신전의 입구를 지나 한적한 별관 근처에서 멈췄다. 라라는 엘리나2와 함께 내린 후 기억을 더듬어 정원 입구를 찾아갔다. 엘리나2는 정령왕과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걷는 동안에도 허공에다 대고 뭐라 뭐라 떠들어 댔다.

다행히 자신의 기억력은 꽤 쓸모가 있었다. 정원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건물에 엘리나2는 이런 곳도 있었냐며 놀라워했다. 라라가 먼저 문을 두들긴 후 안으로 들어서고 그 뒤를 엘리나2가 따라갔다.

‘안 계시나?’

한번 왔었던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라라는 소파 너머로 드러난 옅은 금발을 발견했다. 소파에 누워 한가롭게 낮잠이라니, 정말 할 맛 나는 교황직이었다.

“저 왔어요. 이봐요.”

“…이봐요라니, 제대로 안 부르냐?”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위로 쳐들며 미하일이 미간에 미세한 주름을 잡았다. 뒤늦게 라라 말고도 다른 이가 와있단 걸 알아차린 미하일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넌 뭐야?”

경계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벌써부터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라라와는 달리 엘리나2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어요, 워워. 전 엘리나2라고 해요! 라라의 친구구요.”

“친구라고……?”

“네. 참고로 공작가에서 공녀 하고 있습니다!”

“큭, 그게 뭐야.”

역시나 엘리나2였다. 미하일의 경계를 단번에 누그러뜨리다니, 이게 바로 여주인공 버프라는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있어봤자 방해밖에 안 될 것 같고,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고 여겼다. 여주와 남주인데 어련히들 잘하겠지. 라라가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넌 내가 일일이 챙겨줘야 되냐? 거기서 혼자 얼빵하게 뭐 해.”

“네? 아, 제가 바빠서. 오늘은 이 옷만 돌려주러 온 거거든요.”

“무책임한 것도 정도가 있지. 네가 손님을 데려왔으면 중간에서 소개든 뭐든 해야 될 거 아냐?”

“어…, 죄송해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라라는 어정쩡하게 그들 곁으로 다시 끌려갔다. 세 명이 마주 보고 서서 막 얘기를 나누려 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방 안을 지배했다.

<저년은……!>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처럼 풍성한 드레스 자락과 짙은 화장, 목과 손가락에 주렁주렁 달린 보석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웨이브기 도는 붉은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린 여인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방 안을 살폈다.

곧바로 미하일과 가까이에 서있는 엘리나2를 타깃으로 지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악녀 로잘리이니라.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은 부수고 말겠다는 집념으로 여주와 남주 사이를 번번이 훼방 놓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랫사람에게 늘 패악을 부리는 모오옷된 년이니라. 결국 여주를 음해하려다가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처형당하는 년이니라.>

‘아니, 근데 벌써 나와요?!’

왕년에 연애 소설을 꽤나 읽어봤던 라라도 라이벌녀 등장이 없어선 안 되는 중요한 클리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일렀다.

“미하일, 이 여잔 뭐죠? 대체 두 사람 다 무슨 관계예요!”

“넌 대체 뭐야?”

‘너도 모르는 거야?!!’

미하일의 경계 어린 태도를 보건대 모르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악녀 로잘리는 별로 당황하지 않고 부채를 펼쳐 들었다.

“처음 뵙겠어요. 당신의 약혼녀인 로잘리 베르벨이랍니다. 비록 정략혼으로 맺어진 관계고 저도 당신을 오늘 처음 본 데다 서로 마음도 없지만, 제 가문을 위해선 어떻게든 교황인 당신의 옆자리를 차지해야만 해요.”

“헉. 미하일 씨, 교황이세요?”

엘리나2는 뜨악하고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이에 로잘리의 눈이 엘리나2에게로 옮겨갔다. 확실히 표독스럽게 찢겨 올라간 눈이 한 성질 할 것처럼 보였다.

“천박한 게! 감히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건드려?”

역시나 로잘리는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뺨을 내리칠 것 같았으나 엘리나2의 이어진 말에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내려가던 손이 우뚝 멈췄다.

“미하일 씨, 저희가 정말 무슨 관계죠? 오늘 처음 만난 사인데, 흐으음. 친구라고 하기엔 아직 서먹하죠? 말도 안 놓았고요.”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긴 엘리나2는 정말 이 관계를 정의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시름겨운 한숨 소리에 로잘리는 왼손을 움찔움찔 떨다가 마침내 순순히 내려놓았다.

“…두 사람 정말 아무 사이도 아냐?”

“네.”

“…그럴 리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가만 안 둘 거야!”

“가만 안 두고 자시고,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어떡해요. 아오, 답답해. 라라, 뭐라고 말 좀 해봐.”

엘리나2가 눈을 번쩍 뜨고 라라를 돌아보았다. 라라는 움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곧바로 타깃을 바꾼 건지 로잘리가 또각또각 라라에게 걸어왔다. 왼손을 높이 허공에 쳐들고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강하려는 순간이었다.

“걘 남자.”

미하일이었다. 로잘리는 흠칫 손을 거두고는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손만 떨었다. 황망한 시선은 잇따라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에게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결국 다시 원래대로 맨 처음 타깃으로 바꾼 로잘리는 엘리나2의 앞에 섰다. 손이 다시 높이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

“다시 한번 묻겠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네. 법원 갈까요?”

“뭐, 법원?”

“네, 법원 가서 공식적으로 재판을 받아 봐요. 저와 미하일 씨는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거든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오늘 처음 봤고요.”

“됐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아니, 그래도 라이벌녀 입장에서 봤을 땐 좀 그렇잖아요. 약혼남이 다른 여자랑 같이 있다, 저 같아도 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확실하게 법원 가는 게 어떨까요?”

“그러기엔 너무 일이 커지잖아. 소문이 퍼지면 내 이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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