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맨 밑 칸부터 자신의 눈길이 닿는 높이까지 전부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마법소녀 릴리카 한정판 수록본』은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위쪽밖에 없었다. 엘리나4는 책장의 위 칸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높아서 사다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주변을 살피자 다행히 구석에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엘리나4는 사다리를 책장 앞으로 옮겨와 발판을 밟고 올라섰다. 한 여덟 칸쯤 올라서자 바닥과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다.
팔을 뻗어 위 칸의 첫 번째 책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몸의 균형이 조금 기울어 불안하다 싶더니 사다리 다리가 휘청하고 기울었다.
떨어진다. 엘리나4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몸에 전해져 오는 충격은 없었다. 자신의 뒷무릎과 머리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팔에 눈을 떴다.
“…아.”
“위험하질 않나.”
허밍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턱선은 날렵하게 목과 이어져 있었다. 뒤늦게 남자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엘리나4는 살짝 삐뚤어진 안경을 새로 고쳐 쓰고는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존귀하신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인사였다. 화장기 없이 두꺼운 안경을 쓴 얼굴, 약간 수수한 차림 때문에 스치듯이 봤다면 공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를라히는 부러 조금 차갑게 눈길을 던졌다.
“공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책을 찾으러 왔습니다.”
“무슨 책을 말이지?”
“그것이, 저기 첫 번째 책입니다.”
공손한 어조로 엘리나4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건가?”
카를라히는 사다리를 세 칸 정도 밟고 올라선 후 높은 곳에 있던 책을 손쉽게 꺼내주었다. 얼떨결에 책을 두 손으로 받게 된 엘리나4는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앞으로는 사람을 시키도록. 자칫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 말이다.”
“네.”
“업무가 많아 이만 가보지.”
시원스럽게 올라간 입술에 가슴이 술렁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엘리나4는 차분함을 되찾고 책을 살폈다.
‘국제 정세와 제국의 입장’이라는 제목이 박힌 겉표지를 쥔 순간 표지가 가볍게 벗겨졌다. 마치 맞지 않는 헐렁한 옷을 입은 것처럼 책만 아래로 쑥 빠져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자 뜻밖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마법소녀 릴리카 한정판 공식 수록본』. 찾고 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엘리나4는 황급히 책을 쥐고 도서관 맨 끝으로 걸어갔다. 자그마치 열여덟 줄의 책장을 지나자 바닥에 주저앉아 맨 아래 칸의 책들을 살피고 있는 라라를 볼 수 있었다.
“찾았어요.”
“정말요?”
라라는 드레스의 먼지를 털며 빠르게 일어났다. 어디 좀 보자고 손을 내미는 그녀에게 엘리나4가 책을 건네자 라라는 무슨 천년 된 문화재를 만지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책을 살폈다.
“이 출판사 로고와 특유의 종이 재질, 맨 뒤에 있는 이상한 까만 줄무늬까지. 네, 맞아요. 진품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보다 어디서 찾은 거예요?”
라라의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엘리나4는 직접 발견된 장소로 데려가 주었다. 까마득한 위 칸을 가리키는 엘리나4의 손가락에 라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높은 곳에 숨겨져 있었네요. 근데 대체 어떻게 꺼내신 거예요?”
“어느 분이 도와주셨어요.”
괜히 수상쩍게도 그녀는 자그맣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먼저 읽어요, 영애. 읽고 싶어 했잖아요.”
“아니에요. …물론 당장 읽고 싶지만 엘리나4 공녀님도 읽고 싶으셨잖아요? 찾으신 분이 먼저 읽는 게 옳죠.”
“그래도 읽고 싶은 책을 참는 건 좋지 못해요.”
“괜찮아요. 저는 도서관 주위를 걷다 올게요. 정원이 참 예쁘게 꾸며져 있더라구요. 호호.”
라라는 책을 안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른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을 건네주었다. 손안에 책이 들어오자 엘리나4도 생각이 바뀐 건지 고개를 한번 기품 있게 끄덕여 보였다.
도서관을 벗어난 라라는 정원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흰색 장미와 붉은색 장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정원 속 미로를 걷던 중이었다. 사람 키보다 높은 관목을 돌기 무섭게 나타난 무언가에 라라는 이마를 부딪쳤다. 아야, 하고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들어온 햇살이 로브 속의 아름다운 얼굴선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입술과 턱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라라는 이자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 당신은! 예전에…….”
전체적으로 보니 로브신사 코스용 로브가 확실해 보였다. 라라는 이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여겼다.
“당신은 코스어인가요? 아니면 코스 옷을 입고 다니는 일반인인가요? 행사도 뛰시나요?!”
“…….”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궁금해서 속이 타들어 가는 라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느리게 걸음을 떼더니 근처에 피어난 빨간 장미 한 송이를 꺾었다.
라라는 그가 뭘 하려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빨간 장미를 왼쪽 소매 뒤로 숨겼다. 그리고 3초 뒤 다시 꺼내자 빨간 장미는 온데간데없고 흰 장미가 들려있었다.
“어머!”
색이 변하다니 마법인 게 분명했다. 감탄하다가 자신이 너무 호들갑이었다고 여겨 조신하게 입술을 오므릴 때였다. 흰 장미 한 송이가 내밀어져 왔다.
“저 주는 거예요?”
가벼운 끄덕임이었다. 낭만적이란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장미를 건네주는 남자의 손가락에 꽂힌 수많은 가시들과 그의 로브 소매 속에 숨겨진 빨간 장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긴 갓 딴 장미에 가시가 없을 리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줄기를 한번 문지른 건지 건네받은 장미 줄기엔 가시가 없었지만.
“고마워요. …근데 손은 괜찮으세요. 마법 못 쓰시죠?”
“…….”
팩트 폭력이었는지 남자는 아까보다 더 깊은 침묵을 지켰다.
“근데 정말 코스어 아니세요? 행사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요.”
체형으로 보나 로브 사이로 드러난 옷차림새로 보나 확실히 일반인은 아닌 것 같았다. 궁금증이 더 짙어진 라라의 눈빛에 남자는 발을 움직였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라라는 두 주먹을 꼭 쥐고 크게 외쳤다.
“다음에……! 3코에서 뵐 수 있을까요?!”
남자가 잠시 뒤를 돌아본다. 로브 아래 입술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긴 채 남자는 정원을 벗어났다.
한 시간 정도 넓은 정원을 산책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입꼬리는 살며시 올라가 있었다.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언젠가 빛을 발할 가능성이 큰 존잘 코스어를 알게 되어 기뻤다. 흰 장미를 요리조리 돌리며 살피면서 라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3층으로 올라와 엘리나4가 있을 책장 사이로 들어서려던 순간, 라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다른 이가 먼저 와있었다.
‘누구지?’
역광이 진 뒷모습만으로는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왠지 조용한 분위기에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라라는 잠시 책장 뒤로 몸을 숨겼다. 일단 체격상 남자인 것 같았다. 그때 남자가 겉옷을 벗기 위해 어깨를 젖히자 그 아래로 엘리나4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벗고 창틀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그녀 곁에 다가온 남자가 비스듬히 몸을 숙였다. 아는 옆얼굴이었다.
‘황제사칭남? 대체 왜 여기에…….’
황제의 호위 기사인 그가 여기 있다는 건 황제 남주도 이곳에 있다는 걸까. 라라가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볼 때였다. 역시나 엘리나4의 어깨 위에 외투를 덮어주려는 건지 그의 손이 작은 어깨로 향했다.
<클리셰가…….>
그녀의 무릎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을 발견한 건지 그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동시에 라라의 머릿속에 이 상황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펼쳐진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웬만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선 읽을 수 없는 복잡한 마법 수식어와 고대어로 빼곡했다. 겉보기엔 책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귀족 영애인데… 의외의 반전 매력에 푹 빠지고 마는 클리셰이니라.>
역시나 그의 눈이 벌어졌다. 해괴하게 변한 눈은 ‘진짜 이걸 읽고 있었다고?’ 하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 그 두꺼운 책은 다름 아닌 『마법소녀 릴리카 한정판 수록본』이었던 것이다.
‘펼쳐진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웬만한 씹덕후가 아닌 이상은 읽지도 않을 복잡한 캐릭터 설정과 작가의 답변 코너로 빼곡했다. 겉보기엔 만화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귀족 영애인데 일코 중이었구나… 하는 논클리셰 같은데요.’
라라의 확신 어린 생각에 신은 침묵을 지켰다. 그때였다. 남자의 손이 『마법소녀 릴리카 한정판 수록본』으로 향하더니 그대로 들고 가는 게 아닌가.
‘혹시 버리려고……?!’
일반인이 봤을 때 확실히 도서관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게 탐탁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달라!’
라라는 허겁지겁 책장 밖으로 튀어나왔다. 비록 오늘까지 포함해서 네 번밖에 보지 못한 남자지만,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책에 등급이 어딨단 말인가. 만화책은 저열하다고 멸시받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눈물이라도 흩뿌릴 기세로 라라는 남자의 뒤를 쫓았다.
책이 한가득 쌓여있는 반납대 앞을 지나가려는 남자를 라라는 힘껏 달려 따라잡았다.
“잠시만요! 그거, 그 책은!”
갑자기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출 줄은 몰라 당황한 라라가 급히 발에 브레이크를 걸었으나 하필 굽이 있는 구두라 버벅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구두코가 카펫에 걸리자 앞으로 체중이 확 쏠렸다. 남자의 등과 세게 부딪쳐 버린 순간 반납대도 따라 밀려났다.
사람 키만큼 쌓여있는 책의 탑이 흔들리더니 곧 카를라히와 라라의 머리 위를 덮쳤다.
금방이라도 책이 얼굴 정면을 강타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라라는 지레 겁을 먹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프기는커녕 부드러운 것이 사뿐히 뺨과 코, 입술에 차례대로 내려앉았다.
라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흘러내린 검자줏빛 머리칼이 벨벳처럼 매끄럽게 뺨에 닿아있었다. 라라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천년 된 미라처럼 뻣뻣하게 굳어만 있었다.
그러다 그의 등과 목덜미 밖으로 하나둘 나가떨어져 뒹구는 책을 보고 깨달았다. 그가 몸을 던져 자신을 대신해 쓰러지는 책을 막은 것이라는 걸. 다만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고개가 숙여지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었다.
뒤늦게 맞닿아 있던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다.